자폐스펙트럼 아이의 언어 (2)
신경정형인과 구분이 어려운 말하는 자폐스펙트럼 아이들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의 범주에 있어도 또래 수준의 말을 할 수 있다면 비자폐 아이들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쉽게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능력과는 달리 사회성은 한 번에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말을 잘하는 자폐스펙트럼 아이도 겉으로 드러나는 자폐적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폐스펙트럼 아이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앨리스의 경우에는 어색하고 단조로운 말투, 불안한 눈 맞춤, 예민한 감각을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폐 진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사회적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잠깐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다.
다만, 이렇게 신경정형인들과 구분하기 어려운 말 잘하는 자폐스펙트럼 아이들도 직접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어 보면 그 “말”에서 무엇인가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앨리스의 경우를 예로 들어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의 말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자기만족을 위해 말하는 자폐스펙트럼 아이
앨리스는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나열하기 위해, 혹은 갑자기 어떤 아이디어가 생각났을 때 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보통은 상대방이 대답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앨리스와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말을 주고받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듣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내가 먼저 앨리스에게 말을 걸어도 앨리스는 대화 주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금세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로 바꾼다. 대화를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대화를 독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따라서 대화는 말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앨리스는 만 3세경부터 지금까지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말을 잠깐 참는 연습과 함께 말을 독점하지 않고 주고받는 연습을 꾸준히 하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일상생활에서 아이와 대화할 때 아이가 한마디 말을 하면 양육자가 바로 그 말에 대꾸를 하는 것이다. 아이가 만약 쉬지 않고 계속 말을 하려고 하면 그 말을 잠깐 끊고 양육자가 말을 한 후에 아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아이가 화제를 바꿀 때마다 “근데 우리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지?”라고 말하며 계속 원래 대화 주제를 환기한다.
63개월이 된 앨리스는 이러한 연습을 통해 (완벽하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말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2.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자폐스펙트럼 아이
흔히들 자폐스펙트럼장애의 범주에 있는 아이는 무발화이거나 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어능력은 그 자체로는 자폐스펙트럼장애의 진단 기준과 관련이 없다. 언어능력이 또래 평균 범주인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은 오히려 대부분 말을 ‘너무’ 많이 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앨리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할까? 앨리스는 31개월 즈음 즉각 반향어가 완전히 사라지며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앨리스가 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로 말을 많이 했는가 하면 정말 숨 쉬는 시간 빼고는 계속 말을 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엄청난 각오가 필요했다. 한 번은 발달치료센터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앨리스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기사님이 한숨을 깊게 내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꽤 여러 번 택시에서 그런 상황을 마주한 후 나는 아예 택시 대신 버스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버스를 탄 첫날에 버스 승객으로부터도 좀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나는 주차 자리도 없는 센터에 다시 차를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말을 너무 많이 하는 하이퍼버벌(hyper verbal) 증상도 자폐스펙트럼장애의 특징 중 하나다. 하이퍼버벌 증상을 가진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은 말을 잘해서 말이 많은 것이 아니다. 사회성이 낮아서 말을 하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도 계속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앨리스의 하이퍼버벌 증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앨리스와 대중교통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물론 앨리스도 조용한 순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먹거나,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거나, 잠을 잘 때는 조용하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와 같이 억지로 조용히 시켜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단시간에 몰입이 가능한 영상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편이다.
단, 아이가 성장할수록 아이가 “스스로” 말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 수업 시간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영상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평소에 아이가 말을 하지 않고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수시로 체크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말이 많은 아이들도 나이를 먹을수록 조절력이 조금씩 좋아지기 때문이다. 앨리스의 경우도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세 돌의 앨리스보다 현재의 앨리스가 본인이 말하고 싶은 욕구를 더 잘 참는 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시기가 되었는데도 말을 하지 않아야 할 시기에 계속 말을 한다면 그때는 소아정신과 의사와 상담 후 충동성을 낮춰주는 약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 40분 내내 교사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아이의 정서에도 좋지 않다.
3. 다른 사람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자폐스펙트럼 아이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즉각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앨리스가 반향어를 벗어나 자유롭게 말하게 되었을 때 기쁨도 잠시, 아주 곤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앨리스가 내뱉은 즉각적인 말에는 남들이 들으면 기분 나쁜 표현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아줌마! 혹은 할머니!
앨리스는 매우 외향적인 성향이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인사하고 스몰토크를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때 앨리스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여자 어른인 경우에 자꾸 문제가 생겼다. 앨리스가 잘 모르는 여자 어른에게 자신만의 기준대로 아줌마나 할머니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줌마나 할머니라는 호칭은 진짜 아줌마나 할머니가 들어도 상황에 따라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그래서 요새는 아예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알려주고 가게에서 만나는 잘 모르는 어른은 사장님으로 부르게 하고 있다.
▶탈모
앨리스는 대형 병원에 매우 자주 가기 때문에 종종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들을 병원에서 마주친다. (물론 병원이 아닌 곳에서 볼 때도 있다.) 머리카락이 아예 없는 사람을 볼 때마다 앨리스가 너무나도 큰 목소리로 “엄마, 왜 저 사람은 탈모예요?” 혹은 “왜 저 사람은 카이유처럼 탈모 머리예요?”라는 말을 해서 곤혹스러울 때가 정말 많았다.
▶왜 얘는 말을 못 해요?
앨리스는 병원뿐만 아니라 아동발달센터에도 정말 많이 다니기 때문에 발달지연이나 발달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거의 매일 보고 있다. 그런데 앨리스는 체격은 비슷한데 말을 하지 못하는 또래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그 아이의 엄마에게 가서 왜 얘는 말을 못 하냐고 물어본 적이 많았다. 물론 그때마다 상대 어머님들이 현명하게 답을 해주시긴 했으나 나 또한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처지이기에 그분들의 기분이 얼마나 나쁠지 생각하면 죄송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와 좀 더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상황”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이와 단둘이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먼저 아이가 방금 했던 말이 왜 다른 사람을 기분을 나쁘게 하는지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언급을 아예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앨리스가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나 질문을 할 때마다 이러한 지도를 반복한 결과 요즘의 앨리스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외모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4.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자폐스펙트럼 아이
자폐스펙트럼장애의 진단 기준에는 제한적 또는 반복적 행동 및 관심이라는 항목이 있다. 이 “제한적 또는 반복적 행동”에는 같은 말 혹은 같은 패턴의 말을 계속 반복하는 행동도 포함된다. (음성상동행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이레인보우베이비 인스타그램에 올라와 있는 [왼손 오른손 논쟁]이라는 제목의 영상과 댓글을 보면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이 동일한 패턴의 말을 반복하는 현상을 잘 관찰할 수 있다. 영상은 앨리스가 51개월일 때 촬영한 것인데 당시 앨리스는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는 법은 알았지만 마주 보는 사람끼리는 왼쪽과 오른쪽이 반대가 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때 내가 마주 보는 사람의 왼손 오른손은 내 기준에서는 반대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앨리스는 영상에서처럼 집요하게 마주 보는 사람의 왼손과 오른손은 정확하게 말하고 본인의 왼손과 오른손은 반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굉장히 재밌는 유머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똑같은 말을 수십 번 이상 반복한 이후에야 앨리스는 이 재미없는 농담을 그만두었다. 이 밖에도 앨리스는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주어 혹은 어미만 바꾸어서 따라 하거나 다른 사람이 했던 장난과 그 장난에 대한 반응까지 통째로 따라 하면서 반복하는 등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같은 말의 반복을 스스로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질문과는 상관없는 말 반복을 멈추어야 한다. 아이가 말 반복을 스스로 멈추는 것이 어렵다면 역시나 양육자가 현재 상황을 환기하고 적절한 반응을 직접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양육자는 상황에 맞지 않고 반응할 필요가 없는 아이의 반복적인 말을 적당히 무시할 필요가 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할 시기가 가까워졌는데도 말 반복을 스스로 멈출 수가 없다면 소아정신과 의사와 상담 후 충동성을 낮춰주는 약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