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스펙트럼 아이의 언어 (3)
학교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를 학급에 소개할 때 생각주머니가 작다는 표현을 사용하던 시기가 있었다. (2018년 장애인의 날 특집 [대한민국 1교시] 영상을 보면 육상인 이봉주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소개하며 생각주머니가 작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요즘도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말이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생각주머니는 정형인의 생각주머니와 모양이 다를 뿐 더 작거나 크지 않다. 이번 장에서는 앨리스의 경우를 예시로 들어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의 생각주머니가 비자폐 아이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녹음기로 녹음하듯 다른 사람의 말을 모방하는 아이
자폐스펙트럼의 범주에 있는 아이들은 녹음기로 소리를 녹음하듯이 다른 사람의 말을 모방한다. 앨리스는 이제 즉각 반향어를 하지 않지만 앨리스가 하는 말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 어디에선가 단 한 번이라도 들었던 말이다. (다만 이젠 아이가 너무 많은 말들을 외워서 최초에 어디에서 들었던 말인지 내가 기억을 할 수 없다.)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은 언어를 이해할 때도 언어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보다는 언어가 담고 있는 표면적 의미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래서 은유나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비꼬는 말과 진심 어린 말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물론 언어 기능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외워서 하고 사전적 의미 위주로 말을 이해하는 아이. 얼핏 보면 사고의 폭이 굉장히 좁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소통 방식에도 장점이 있다. 방대한 양의 문장을 쉽게 외울 수 있어서 외국어 습득이 빠르고 말의 사전적 의미만 사용하니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줄이고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아이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은 같은 상황을 비자폐 아이들과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인지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앨리스는 인지행동 치료실에서 어떤 문제 상황을 그림으로 제시했을 때 정형인들과 비슷한 반응을 하지 못해서 교정을 받은 적이 많다. 하지만 그런 앨리스의 ‘오반응’이 모두 반사회적이거나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앨리스의 정형적이지 않은 반응이 정형인들의 생각보다 참신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는 자폐스펙트럼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슈퍼파워를 가진 것과 같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당신을 다르게 만들고 생각도 다르게 할 수 있도록 합니다. 특히 이러한 큰 위기상황(기후위기)에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고를 하고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Because that makes you different, that makes you think differently and especially in such a big crisis like this one, we need to think outside the box. We need to think outside our current system, that we need people who think outside the box and who aren't like everyone else.)
툰베리의 말처럼 신경다양성을 가진 아이들의 사고는 신경정형인과 매우 다르다. 따라서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신경다양성을 가진 아이의 새로운 사고방식이 더 필요한 영역도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을 뒤흔들었던 작품을 만들었거나 발명을 한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자폐스펙트럼 아이의 생각주머니는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번 그것을 앨리스로부터 느끼고 있다.
눈으로 기억하는 아이들
내가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의 생각주머니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폐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시각적 기억력 때문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 극 중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주인공 우영우가 지나가는 택시에 적힌 전화번호를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해 내는 장면이 나온다. 우영우처럼 서번트 급의 능력은 아니더라도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의 시각적 기억력은 매우 좋은 편이다.
마이레인보우베이비 인스타그램의 <자폐아이들의 신기한 능력, 기억력> 영상을 보면 앨리스가 41개월에 보여준 시각적 기억력이 잘 드러난다. 당시 앨리스는 약 30 여가지 종류의 개의 이름이 적힌 책받침을 나에게 들고 와서는 개 이름을 몇 번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개 이름을 제법 빠른 속도로 모두 읽어주자 잠시 후 앨리스는 이내 모든 개의 이름을 사진을 보며 스스로 읽어냈다. 당시 앨리스는 글자를 전혀 읽을 줄 몰랐다. 따라서 개의 이미지에 이름 소리를 연결하여 기억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미지와 소리를 연결해서 기억하는 능력 때문에 앨리스는 책을 읽는다는 오해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실은 글자를 읽은 것이 아니라 그림책의 그림과 그 그림에 해당하는 부분의 소리를 외운 것이었는데 말이다.
인터넷 카페에서 자폐스펙트럼 아이 양육자의 경험담을 살펴보면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의 놀라운 시각적 기억력은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회성이 자라날수록 평범해진다고 했다. 어떤 의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앨리스를 예로 들자면 이는 사실이다. 지금은 앨리스의 시각적 기억력이 신경정형인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느껴질 만한 일들이 딱히 없다. 신기한 능력이 없어진 것은 조금 아쉽지만 아이 뇌의 균형이 좀 더 좋아졌다고 생각하면 기쁘기도 하다. (실제로 앨리스의 지능검사 결과를 살펴보면 36개월보다 48개월의 각 영역 간 지능 편차가 줄어들어 있었다.)
만 5세가 된 앨리스는 현재 별다른 문자교육 없이 스스로 우리말 책과 영어책을 읽게 되었다. 나는 앨리스에게 문자교육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림책은 꾸준히 읽어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통문자를 이미지로 인식하고 이미지에 소리를 연결하여 꾸준히 통문자를 축적한 결과였다. 만 5세의 나이가 되면 문자교육을 받은 아이들도 많아져서 글자를 읽는다는 것이 특별히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앨리스는 스스로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시각적 기억력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