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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임 Nov 16. 2024

고전소설의 미러링 전략,
정절(貞節)의 전유

<그녀의 이름은 난노> 공식 포스터/ 출처 :  NETFLIX 

넷플릭스 시리즈 가운데 <그녀의 이름은 난노>라는 태국 드라마가 있다. 시즌2의 첫 에피소드에는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난노가 같은 반 남학생 나나이와 사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인 나나이는 여학생들을 유혹하고, 관계를 맺고, 임신시키기를 반복한다. 나나이가 누군가와 사귄다는 소문이 돌면 학생들 사이에는 그들이 언제 육체적 관계를 하는지 내기가 벌어진다. 그렇게 나나이와 사귄 여학생들은 사냥감마냥 포획되고 전시되었다가 임신과 낙태, 혹은 출산의 부담을 오롯이 감당하는 처지에 몰린다. 난노가 전학 온 첫날, 나나이는 여느 때처럼 낯설고 매력적인 난노를 유혹하고 난노는 망설임 없이 그 유혹에 뛰어든다. 학생들은 다시 신나게 배팅하고, 나나이는 난노와 어김없이 관계를 맺는다. 


드디어 내기의 승자가 가려지는 순간,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난노가 등장해 승리의 미소를 띠며 판돈을 쓸어간다. 그는 자신이 미리 배팅한 정확한 시간, 분초에 맞춰 나나이와 관계를 맺고 내기의 승자가 된 것이다. 적당히 즐긴 후의 이별도 나나이가 아니라 난노의 주도로 이뤄진다. 이제 나나이의 관심은 다른 여학생에게 옮겨가고 다시 같은 패턴의 여성 편력이 시작되는 듯하다. 그런데 난노가 선사하는 진정한 반전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나나이가 입덧을 하고 배가 부르더니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는다. 


이 기괴한 사건은 나나이를 고립시킨다. 사귀던 여학생도 가족들도 모두 나나이에게 등을 돌리고, 나나이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임신의 부담을 오롯이 감당하게 된다. 그제야 나나이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 홀로 출산을 준비하는 전여자친구에게 비로소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난노가 벌이는 악희는 기괴하며 초현실적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이 난노에 의해 폭로되고 응징되는데, 시즌2 첫 번째 에피소드는 섹스와 임신 문제에 있어 남녀 간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조건이 다름에서 발생하는 불균등함,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젠더 이슈를 미러링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17세기 무렵 등장해 18,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기리에 읽혔던 한글장편소설에서도 미러링의 전략이 포착된다. 한글장편소설은 상층 가문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가문소설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주로 양반가 여성에게 사랑받은 장르이다. 가문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양반 여성들의 생활과 욕망, 취향이 반영된 로맨스도 풍부한데, 18권 18책의 <명주기봉>에는 미러링 전략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성취하는 여성인물이 등장한다. 여기서 미러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절 이데올로기이다. 


‘정절’이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왜곡된 욕망이 표현된 것으로 조선사회 상층 여성을 규제하고 억압했던 대표 이념이다. 미혼 여성에게도 요구되었으며 외간 남자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훼절의 혐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상층 여성을 교육하는 데 활용되었던 <열녀전>, <삼강행실도>와 같은 책에는 기혼이든 미혼이든 외간 남성과 접촉한 여성들이 그 신체 부위를 과감히 잘라버리거나 더 나아가 죽음으로써 자신의 올곧은 정절 의식을 보여주는 서사가 등장한다. 고전소설에 역시 외간 남성의 추행에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자결하는 장면은 흔하게 나오며, 특히 상층 여성이 즐겨 읽은 한글장편소설에서 ‘정절’은 절대적 규범으로 표상된다.


한글장편소설의 여성 주인공은 어김없이 정절 이념에 투철한 인물로 형상화되며, 정절 이념이 희박하거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17세기 작품인 <소현성록>에 그런 지점이 잘 드러나 있다. 반동인물인 취씨는 처첩갈등 중 시가를 속이고 살인을 도모하는 등의 온갖 악행을 저지르지만 남편에 대한 정절은 지킨 인물로, 결말부에 개과천선하고 용서를 받는다. 반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인 없는 소교영은 단지 훼절했다는 이유, 남편 사망 후 다른 남성과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친정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때 소교영을 죽인 친정어머니의 행위는 작품 내에서 엄정한 판단이라 여겨지며 긍정된다. 타인을 해하는 악행을 일삼는 것보다 정절을 잃는 것이 더 크나큰 죄악으로 형상화될 만큼 장편소설에서 여성의 정절은 엄중한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념인 정절을 전유하여 자신의 애욕을 충족시키는 여성인물이 있다. <명주기봉>의 사마영주는 처사 사마공의 딸로 아버지의 제자 현웅린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부모는 동생과 현웅린을 혼인시켜 버리고, 이에 사마영주는 부모와 동생을 원망하며 스스로 사랑을 쟁취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는 처갓집에 방문한 현웅린에게 미친 척하며 과감하게 안겨버린다.   

  

문득 뒤에서 큰 울음소리가 나더니, 한 여자(사마영주)가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낯을 가린 채 통곡하며 달려들었다. 현학사(현웅린)의 몸을 붙들고는 정신없는 두 눈을 떠 바라보며 허허 웃어 왈, “나와 그대는 옥황상제 명하신 배필이어늘 그대 어찌 신의 없이 정실을 잊었다가, 오늘은 어찌 나를 와서 보느뇨?” 또 크게 울어 왈, “이런 근원을 누가 인연을 막느뇨?” 하였다. 그리고 학사의 몸을 껴안아 정히 한 몸이 되고자 하니 그 모친과 좌우 사람들이 경악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학사 대경실색하여 힘써 몸을 빼려 하나 음녀(사마영주)의 마음속에 맺힌 바 그리던 정인을 대하여 정히 망부석 되고자 하던지라. 온 힘을 다하여 얽어매 놓지 않으니, 마치 모진 거머리 같아 떨어지지 아니하고, 손과 팔을 어루만지는 것이 호탕한 남자가 미인 길들이는 거동 같더라.(<명주기봉> 권2)      


광기를 부린 사마영주는 약을 먹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척하며 어머니께 자신의 실행(失行)에 대해 전해 듣는다. 그리고는 거짓으로 자책하며, 스스로 ‘절개 잃은 계집’이라 규정하고, 자신의 몸과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으니 혼사를 폐하고 오직 규방의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웅린과 몸을 접한 사이이니 그를 위해 수절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 일이 현웅린 가문과 황제에게까지 알려지면서 젊디 젊은 규수가 혼사를 폐하게 된 사정이 딱하게 여겨지고, 그 절개가 인정되면서 사마영주를 현웅린의 둘째 부인으로 삼으라는 황명이 내려진다. 이 혼인이 달가울 리 없는 현웅린은 혼사를 거부한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서 아들을 타이른다.


“규문 여자 너를 위하여 수절(守節)하였으니 네가 거둬야 하지 않겠느냐”      


영주의 계략은 적중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가 정한 혼처에 시집을 가야 하는 처지에서, 남성들이 여성을 종속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정절 이념을 역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남성과 혼인하는 전략을 펼쳤고 이내 성공을 거둔 것이다. 


기실 정절 이념을 이용하여 원하는 상대와 혼인하는 것은 남성인물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명주기봉>의 현명린은 부모 뜻에 따라 이미 혼인을 했지만 아내의 외모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연소저의 미모에 반해 그의 방에 침입하고 강제로 손을 잡는다. 그리고선 훼절을 빌미로 자신과 혼인해야 한다고 겁박한다. 연소저 부모 입장에서는 명린이 괘씸했지만 그에게 손을 잡힌 딸을 다른 사람에게 혼인시키는 일이 불가했고, 현명린 부모 입장에서는 그 패행을 책망하면서도 아들이 훼절시킨 여인을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결국 그의 전략대로 이 혼사는 이뤄진다. 이처럼 정절 이념을 이용하여 멋대로 여성을 취하는 남성들의 이야기가 고전소설에는 흔하다.(현실에서도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성적 폭력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사망영주는 바로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거나 착취했던 이념을 전유하여 역으로 자신이 원하던 남성을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영주의 행위는, 현명린의 행위가 연소저에게 그렇듯, 현웅린에게는 부당하고 폭력적인 것이 된다. 때문에 사마영주는 음녀(淫女)로 지목되며 혼인 후 오래도록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혼인을 강제했다는 면에서 사마영주 역시 현명린을 평가한 잣대로 동일하게 비판해야 할 터이다. 


그럼에도 조선이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라보면 퍽이나 다르게 느껴진다. 당대에는 서사 안팎에서 현명린의 행위는 그런대로 받아들여진 반면 사마영주의 행위는 부정되었다.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강압적인 혼인을 했어도 현명린은 만족스러운 혼인 생활을 영위하고, 사마영주는 오랜 기간 남편에게 박대를 받는다. 더욱이 사마영주는 스스로 훼절의 혐의를 자처한 것이라서, 그 혼인 전략은 현명린과 비교할 수 없이 큰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사마영주는 어쩐지 딱해 보인다. 


더욱이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왜곡된 욕망이 발현된 부당한 규범을,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전복시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데 전유했다는 면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조선시대 여성을 억압했던 남성 지배질서가 바로 그 남성 지배이념에 의해 희롱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18세기 소설 <유씨삼대록>(20권 20책)에도 보인다. 양성공주는 번왕의 딸로 북쪽 변방을 순무하러 온 소경문을 보고 흠모하여 청혼한다. 그러나 소경문은 공주를 오랑캐라 멸시하며 이미 혼인을 했다는 점을 들어 거절한다. 이에 번왕이 분노하고 소경문을 잡아 유배 보내는데, 공주는 아버지 모르게 위기에 처한 소경문을 물심양면 돕는다. 뿐만 아니라 소경문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수절을 다짐하며 스스로 볼모를 자처해 소경문을 따른다. 양성공주는 소경문을 처음 본 순간 피어난 연모의 정을 전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일편단심 지켜내고, 이러한 공주의 사랑은 결국 황제에게 알려져 ‘절개’ 있는 행위라 칭송되어 혼인을 명 받게 된다. 

 

양성공주가 애정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역시 정절 이념이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여성이 '감히' 먼저 구혼하자 그것이 처음에는 소경문에게 “음탕한 오랑캐 계집이 감히 조정 대신을 업신여기”는 행위로 취급받지만, 결국엔 절의 있는 행동이라 여겨지며 사랑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양성공주가 소경문에게 호감을 표하고 수절을 어필하는 과정이 사마영주의 경우와는 달리 의로운 행동으로 형상화되어 있어, 정절을 전유해 적극적으로 구혼한 서사가, 여성의 '애정 욕망'이 긍정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처럼 한글장편소설에는, 여성이 수행 주체이지만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것이었던 정절 이념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전유하며 여러 억압 속에서나마 발랄하게 사랑을 성취해 갔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참고자료

커버이미지 출처 : 그녀의 이름은 난노 넷플릭스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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