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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임 Nov 23. 2024

<토끼전>, 얄미운 토끼 요설로
용왕을 우롱하다.


2020 한국관광 해외홍보 영상.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2020년 발표된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수궁가>의 한 대목을 얼터너티브 팝으로 재해석하여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은 바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를 홍보마케팅에 활용해 5억 뷰를 넘기기도 했다.

https://youtu.be/i-E7NiyRDa0?si=RiRgh9r9BXHHINfj


 <범 내려온다>는 아래턱을 밀며 뭍으로 열심히 올라온 자라가 “토선생(토끼)”을 부르려다 턱 힘이 빠져 “호선생”으로 잘못 부르자, 범이 자신을 "선생"이라 부른 소리에 신이 나 내려오는 모습을 노래한다. 엉뚱하게 범을 불러버린 자라는 그 위용에 겁을 먹지만 얼른 임기응변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고 토끼 찾는 임무에 돌입한다. 


<토끼전>은 봉건체제의 부조리와 지배층의 부패가 극심해지던 19세기 조선에서 인기리에 향유되었다. 지배층은 변화하는 현실의 제문제를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토끼전>은 조선의 지배이념과 체제가 ‘윤리성’을 잃어가는 상황, 즉 유교 윤리가 선(善)에서 멀어져 그저 행위 규칙인 낡은 인습으로 굳어져 가는 현실에서,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배층의 횡포를 조명하고 새로운 윤리적 화두를 제기하는 이야기이다.     


사건이 발생하는 수궁(水宮)은 왕과 신하의 위계와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중세이념이 작동하는 사회지만 ‘의로움’은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져 간다. 병이 든 용왕은 토끼의 간을 먹어야 산다는 진단에, 자신의 병이 국가 전체의 위기인 것마냥 신하들을 전부 소집하고, 왕명에 불려 온 신하들은 토끼를 잡으러 육지로 가야 한다는 말에 선뜻 나서지 않고 쭈뼛쭈뼛 눈치만 본다. 보다 못한 용왕이 “우리 수국 온갖 수생(水生) 중 충신(忠臣)이 없으니 이 아니 원통한가! 내가 죽을 수밖에 없군!” 한탄을 해서야 신하 하나가 나서서 말문을 열지만, “세상이라 하는 곳은 인심이 영악하여 물고기를 보면 얼른 잡기만 하니 보내기가 어렵소이다”라며 목숨 바쳐 충신 되기가 곤란하다 말한다.      


용왕이나 신하나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는 것은 매한가지인바,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라는 유교적 명분 사회에서, 이제는 왕은 왕다움을 잃어가고 신하는 신하다움을 잃어가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자라만이 기울어져 가는 이념을 추종하며 왕 답지 못한 용왕을 위해 나서지만, 그 “장한 충성”으로 기껏 하려는 것은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토끼를 잡은 매, 심사정(1707-1769).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토끼의 삶은 어떠한가. 토끼는 자라의 꾐에 빠져 목숨 잃을 위기에 봉착하기 전부터 이미 녹록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토끼를 처음 만난 자라가 자신을 수궁(水宮)의 ‘좌랑 별주부’라 소개하며 산속 삶이 어떠냐 질문하자, 토끼는 한가로움이 천지간 으뜸이라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잔뜩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기실 토끼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울이면 굶주리고, 산속 어디를 다니든 호시탐탐 그를 노리는 포식자로 가득하다. 근래에 와서는 언제 어디서 사냥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게 되었다.  

   

산속 다른 동물들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속을 호령하며 산군(山君)이라 불리던 호랑이조차 이제는 소총과 사냥개를 동반한 사냥꾼의 위협에 안전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산속 동물들을 모아 회의를 열지만 회의에서도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한다. 동물들이 서로 다툼만 벌이는 사이, 약삭빠른 여우는 호랑이 곁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호랑이 역시 별다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여우의 부추김에 공연히 멧돼지 자식을 잡아먹는다.      


수궁이 유교적 지배질서에 의해 운용되는 지배층의 공간이라면 육지는 야(野)의 공간, 세상 팔난(八難)이 존재하는데도 중앙에서 소외되어 지배이념도 공적 시스템도 잘 작동하지 않는 하층의 터전에 가깝다. 각기 다른 문화로 구성된 이질적 공간이지만 각자도생의 공간이 되어 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왕답고 신하다움의 명분론에 의한 정치 시스템이 붕괴되어 가는 수궁이나, 생존을 위협하는 일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나 의지할 만한 공적 시스템이 부재하여 더욱 고단한 육지나, 이제는 각자가 자신의 생존에 몰두해야만 하는 세계인 것이다. 봉건적 지배질서가 말폐를 양산하며 몰락해갈뿐 더 이상 변화하는 현실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총체적 난국에 들어서는 상황 속에서, 질서를 재건해야 할 지배층조차 개인적 삶에만 몰두하며 생존 자체에 급급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수궁의 용왕과 자라, 육지의 토끼가 각자의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자신의 수명 연장을 위해 남의 목숨을 노리는 용왕과 그것에 봉사하는 자라, 이에 맞서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토끼의 대립과, 그 대립의 결과 토끼가 승리하는 서사는, 지체와 신분 귀천에 따라 삶의 가치, 생명의 무게가 다르다는 낡은 질서를 부정하고 ‘호생오사(好生惡死-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에 빈부귀천이 없다’고 주장한다.      


“죄 없는 줄이야 알지만 과인의 한 몸이 너와 달라, 만일 불행하면 한 나라의 백성과 신하를 보존하기 어려운 줄 너인들 설마 모르겠느냐? 너 하나 죽은 후에 과인이 살아나면, 모든 백관 다 살리는 것이니 일등 충신 너 아니냐? 특별히 사당 지어 천만년 다하도록 봄가을로 향화를 끊어지지 않게 하면, 은나라 비간이며 한나라 기신인들 너보다 더할쏘냐? 죽는다고 슬퍼마라.”
- 용왕이 잡혀온 토끼에게 간을 달라며 한 말. 가람본 <별토가>
“네 충성 지극키로 병든 용왕 살리자고 성한 토끼 나 죽으랴?”
 -육지 도착 후 토끼가 도망가며 별주부에게 한 말. 가람본 <별토가>


그런데 당대에는 이와 같은 서사와 캐릭터가 꽤나 논쟁적이었던 듯하다. 이본별로 인물과 이야기 전개가 단일하지 않다. 경판 <토생전>에서는 토끼가 도망간 뒤 망연자실한 자라가 곧바로 자결하고 용왕은 충성을 기리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가 하면, 신재효본 <퇴별가>에서는 토끼를 놓친 자라가 토끼 똥을 얻어 용왕을 살리고, 가람본 <별토가>에서는 돌아갈 면목 없는 자라가 소상강에 은거했다가 이후 아내와 용왕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자결한다.(이 버전에서 자라의 아내는 대외적으로는 떠난 자라를 그리워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며 열녀문이 세워지지만, 사실은 하룻밤 잠자리를 했던 토끼에 대한 상사병으로 사망한다.) 이 밖에도 용왕이 노욕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토끼를 다시 잡아 토끼 간을 먹고 회복하거나, 자라가 수궁으로 돌아가지는 못하나 자결하지 않고 타지에서 계속 살아가는 버전도 있다. 이처럼 단일하지 않은 인물의 향방은, 이야기의 전말과 인물을 바라보는 당대인의 시각이 동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특히 자라와 토끼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자라가 지배 질서에 맹목적으로 복무하며 약자를 희생시킨 부조리한 지배층으로, 토끼가 무고하게 희생될 위기에서 각성하여 저항한 선량한 백성으로만 읽힌 것이 아니다. 자라는 맹목적이지만 어쨌건 충성을 다해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의 충성스럽고 성실한 긍정적 면모는 당대 향유자의 연민과 공감을 받으며, 훌륭한 충신(忠臣)으로 기려지거나 토끼를 놓치고도 용왕 구할 약을 구해 임무를 완수하는 결말의 버전이 널리 읽혔다.      


한편 토끼 역시 선량한 약자, 무고한 피해자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조선후기 문인 송만재는 시를 쓰며, “얄미운 토끼 요설을 펴 간 두고 왔다고 용왕을 우롱했네”라 하였고, 이해조는 <토끼전>을 개작하며, “토끼 무단히 허욕을 발하여 자라를 좇아왔다가 수국 원혼이 되게 되었으니, 이는 스스로 취한 것이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리오. 세상의 아무 재덕도 없이 명예와 이익 탐하는 자 이를 보아 징계할지로다.”라는 평설을 더했다.      


그도 그럴 것이 토끼는 긍정적 이미지의 선량한 약자, 지배층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 저항한 의로운 민중이라 하기 어렵다. 토끼는 분명 민중의 재기 발랄함, 기층의 지혜를 갖추고 있지만 경망하여 자라의 감언이설에 혹하고 허세를 부리며 허욕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도 하다. 자라가 아부하며 토‘생원’이란 존칭을 쓰자 못 견디게 좋아라 하며 자라에게 깡총깡총 뛰어가서는 수궁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허황된 말에 홀랑 넘어갔다. 더욱이 가람본 <별토가> 계열에서 토끼는 용왕의 신뢰를 얻게 되자 자라탕으로 몸보신하기를 아뢰며 자라에게 복수하려 하고, 목숨을 구하는 자라에게 하룻밤 상대로 그의 아내를 요구하기도 한다.(이때 자라의 아내는 남편의 명에 따라 원치 않은 잠자리를 하지만 토끼를 잊지 못해 사망하고, 앞서 언급했듯 대외적으로는 열녀가 된다.) 토끼는 지배체제의 부당한 위협에 대항하였지만 용왕의 헤게모니 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라 그 헤게모니 안에서 권력을 누리고 스스로 용왕의 욕망을 욕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점이 더 흥미롭지 않은가. 요즘에도 대중 콘텐츠에서 ‘부패한 지배층’과 ‘선량한 약자’의 대결 구도는 흔하게 보인다. 그런데 <토끼전>은 부조리한 봉건체제와 부패한 지배층을 풍자하고 서민의 발랄한 생명력과 기지를 그려내면서도, 자라를 통해 생명을 착취하면서 성실하고 나이스한 이미지를 고수할 수 있는 지배층의 기만을 보여주고, 토끼를 통해 긍정적이거나 선량하기만 할 수 없는 서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도처에 도사린 위협 속에서 먹고사느라 고단하고 그래서 유혹에 쉬이 솔깃하며, 일관된 신념이나 지향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주한 일상을 바쁘게 살아내면서 때론 허욕을 품기도 하는, 서민의 평범한 삶을 묘출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당위의 문제에 현실을 사장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인간과 사회를 인식하며 실체적 삶을 포착하였다.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훌륭하고 선량하기만 한 ‘이상적 민중’이 아니라, 각자도생의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는 '미천한 처지의 결함 많은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 그리고 그런 인물의 ‘생명의 무게’도 용왕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이치가 토끼 스스로의 의지와 기지로 증명되었다는 점에서, 더욱이 21세기에도 빈부귀천에 따라 생명을 저울질하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작품 <토끼전>의 현실성과 현재성을 다시금 음미해 볼 만하지 않은가.



*참고문헌

김진영 편, 『토끼전 전집』  1~6, 김진영 편, 박이정, 1997~2003

고은임, 「<토끼전>에 대한 21세기 시좌, 영화 <소리도 없이>」, 『한국학논집』86,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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