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은임 Nov 02. 2024

딸 팔아먹은 아비, 부모화된 아이(2)

<심청전>, 심청 부녀 이야기

‘부모화된 아이’     


2022년 미국의 한국계 대학생 줄리아 류가 심청전을 모티브로 창작한 디즈니 버전 뮤지컬곡 ‘DIVE’가 화재를 불러일으켰다. 줄리아 류는 심청에게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디즈니에 아시안 공주가 ‘뮬란’ 밖에 없는 것이 아쉬워 디즈니 풍 한인 공주를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줄리아 류의 ‘DIVE’가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자 LG전자에서 이 곡을 애니메이션 광고 영상으로 만들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https://live.lge.co.kr/2210-simchoengjun/)     


LG gram 360 x 줄리아 류 : 심청전 Dive 편 영상 중 한 장면|출처: LG전자 유튜브
“All of the fish in the sea can‘t stop me/ All of the waves in the world can’t rock me/ I’m on a mission and gee, just watch me/ Go! Dive, all that’s left is the dive
(바다 물고기들도 나를 막을 수 없어/ 세상의 모든 파도도 날 흔들지 못해/ 나에겐 임무가 있어. 지켜봐 줘/ 가! 이제 남은 건 다이빙이야!)”     



‘DIVE’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질 때의 순간을 매우 주체적이며 용감하게 전진하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심청이 임무를 수행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행한 후 제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계기로서 적극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DIVE’는 우리 고전에 현대적 사유와 감각을 부여해 재창조한 신선하고 흥미로운 작업이다. 노래와 영상 속 심청은 누구보다 당차고 신념에 차 있으며 그의 다이빙은 진취적이며 희망찬 행위로 그려진다. 아버지를 위해 목숨 바쳐 생을 마감하는, 지극한 효성의 비극적인 효녀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고전 <심청전>에서 인당수 장면의 심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심청은 시각이 급하니 어서 바삐 물에 들라.”
심청이 거동 보소. 두 손을 합장하고 일어나서 하느님 전 비는 말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느님 전에 비나이다. 심청이 죽는 일은 추호라도 섧지 아니하여도, 병든 아버지 깊은 한을 생전에 풀려하고 이 죽음을 당하오니 명천은 감동하사 어두운 아비 눈을 밝게 띄워 주옵소서.” 눈물지며 하는 말이, “여러 선인님네 평안히 가옵시고 억십만 금 이문 남겨 이 물가를 지나거든 나의 혼백 불러내어 물밥이나 주시오.” 하며 안색을 변치 않고 뱃전에 나서보니, 티 없이 푸른 물은 ‘월러렁 콸넝’ 뒤둥구리 굽이쳐서 물거품 북적찌데한데, 심청이 기가 막혀 뒤로 벌떡 주저앉아 뱃전을 다시 잡고 기절하여 엎딘 양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심청이 다시 정신 차려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온몸을 잔뜩 끼고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바닷속에 몸을 던지며, “애고애고, 아버지 나는 죽소.” 
                                                                                                  <완판 71장본 심청전>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 재물로 팔려 간 심청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고 두려워한다. 아버지에 대한 염려와 사랑의 마음으로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태연히 떠나려 하지만, 막상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바다, 집어삼킬 듯 용솟음치는 거친 파도를 직면하자 공포감에 주저앉는다. 다시 정신을 차려서도 맨 정신으로 뛰어내릴 수 없어 치마폭을 뒤집어쓰고서야 몸을 던진다. 심청은 아버지 개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출천대효(出天大孝)’지만 죽음이 두렵고 슬픈 보편적인 인간, 여리고 약한 어린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이 이토록 두렵고 슬픈 심청이는 왜 몸을 팔아 죽음을 자처한 것일까?     


아무리 장한 효녀라지만 목숨을 바친 심청의 행위는 현실적 맥락에서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부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단지 장애를 고치겠노라고 죽음을 자처한 것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으며, 환생 후 맹인잔치를 열어 부친을 찾은 것을 보면 심청 자신도 개안에 대해 맹신한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장애가 있는 아버지를 홀로 둔 채 떠났다. 또한 딸을 죽음으로 내몬 아비가 남은 생애를 어떤 심정으로 살아갈지 생각해 보면, 심청의 효행은 ‘이효상효(以孝傷孝)’, 즉 ‘효로써 효를 상하게 한다’는 딜레마를 내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욱이 장승상부인이 등장하는 이본에서조차,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지불하겠다는 제안에도, 즉 시주를 하고서도 살 방도가 있음에도 심청은 끝내 인당수에 빠지고 말았으니, 효심이 깊었다는 해석만으로는 그 심리가 명쾌하게 납득되지 않는다.     


심청의 죽음은 심청의 효를 지극한 것으로 승화시키는 설정이며, 희생제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통과의례의 과정, 이후 심청의 환생과 새로운 삶, 행복한 결말을 매개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서사론적 혹은 결과론적 해석이다. 훗날의 환생이니 해피엔딩이니 알 리 없는 심청은 그저 자신이 죽는 줄로만 알고 팔려갔다. 심청은 왜, 어떤 마음으로 인당수에 간 것일까?     


앞서 심학규가 무능한 아비여도 심청을 얼마나 사랑하며 키웠는지 살펴보았다.(https://brunch.co.kr/@f0d27b56d3a6474/5) 심청의 효 근저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중에도 애지중지 보살펴준 아버지의 깊고 따뜻한 사랑이 선재해 있었고, 그러한 아버지를 향한 효심은 단지 당위적 이념을 추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 응당한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모를 그토록 사랑하는 착한 아이들은 부모의 질병이나 무능력을 목격했을 때 부모 역할을 떠안곤 한다. 이를 ‘역할 전도(Role reversal)’라 하는데, 아이가 부모의 심리적, 신체적 안녕을 돌보거나 책임져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을 때 부모와 자녀의 역할이 전도되는 것을 말하며, 이때 부모 자녀의 역할이 전이되어 어린 자녀가 오히려 부모를 보호하는 조숙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바, 이를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한다. 

심청이 바로 부모의 역할을 떠맡은 ‘부모화된 아이(parental child)’라 할 수 있다.   

   

눈먼 아버지가 동냥길에 혹여 사고라도 날까 염려하던 심청은 7~8세가 되자 가족 부양의 일을 자임하며 홀로 동냥하겠다고 나선다. 그렇게 혼자 식량을 구하러 다닐 때도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놓지 못해, 심청을 안쓰럽고 기특하게 여기며 한 끼라도 따뜻하게 먹고 가라 붙잡는 이웃 어른의 호의에도 “치운 방의 늙은 부친 응당 기달”릴 것이라 사양하고, 종일 자신을 기다리며 추위에 배를 곯고 있을 아버지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 귀가한다. 심청을 반기며 손이며 발이며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심학규에게 심청이 애달프고 불쌍한 딸인 것처럼, 심학규 역시 심청에게는 불편한 몸으로 홀로 딸자식 키우느라 고생 많은 가여운 아버지인 것이다. 심청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순종해야 할 권위 있는 가장이기보다 보살펴야 할 가족이었다.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 부모를 잘 배려하고 조숙한 태도로 주변 환경에도 적응을 잘하는 아이는 바람직한 아동으로 여겨지기 쉽다.(이러한 긍정적 특성으로 인해 심리학자들도 오랜 시간 이들의 심리적 경험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한다. 조은영, 2004)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보살피는 행동을 발달시킨 부모화된 아이는, 부모와 지나치게 밀착해 있어 감정 전이가 빈번하게 일어나며, 부모 이외의 다른 사람들, 타인에 대한 행동에서도 강박적 배려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대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아이의 내면은 온전히 건강하다고 하기 어렵다.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거나 타인의 호의를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강박적으로 남을 과잉 배려하는 병리적 현상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심청의 매신 행위는 바로 그 강박행위라 해석될 여지가 있다.      


승상부인이 문 밖에 내달아 소저의 손을 잡고 울며 왈, “네 이 무상한 사람아, 나는 너를 자식으로 알았더니 너는 날을 어미로 아니 알았도다. 쌀 삼백 석에 몸이 팔려 죽으러 간다 하니 효성이 지극하다마는 네가 살어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을쏘냐? 나와 의논 터면 진즉 주선하였지야. 쌀 삼백 석을 이제 내어 줄 것이니 선인들 도로 주고 망령된 말 다시 말라.” 하시니 심소저 여쭈오되, “당초의 말씀 못한 것을 이제야 후회한들 어찌하오리까? 또한 부모 위해 공을 빌 양이면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빌려오며, 쌀 삼백 석을 도로 내어주면 선인들 일이 낭패오니 그도 또한 어렵삽고,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여 약속을 정한 후에 다시금 배약하오면 소인이 하는 짓이니 그 말씀 따르지 못하려니와, 하물며 값을 받고 몇 달이 지난 후에 차마 어찌 낯을 들어 무슨 말을 하오리까.”
                                                                                                <완판 71 장본 심청전>     

장승상부인이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제안하는 대목에서 심청의 강박적 사고가 잘 포착된다. 심청은 이를 거절하는 구실로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빌려올 수 없다는 것과, 이미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뱃사람들이 낭패를 볼 테고, 약속을 어기는 행위는 소인이나 하는 짓이라는 이유를 든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취해야 할 만큼 중대한 것이라 하기 어렵다. 이 장면은 심청의 지극한 효성과 사회적으로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되기도 하지만(김종철, 2013), 타인의 곤란함이나 약속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욱 중시하는 태도는 성숙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거나 타인의 호의를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강박적으로 남을 과잉 배려하는 병리적 행동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심청은 살고 싶었음에도 그리고 살 방도가 있음에도 죽음의 길을 택했다. 

     

심청의 행위는 지극한 효행으로 인지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민과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효'가 절대적 가치였던 조선후기, 심청과 같이 부모화된 아이는 문제시되기는커녕 효녀로 추앙되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심청을 더욱 강력하게 부모화된 아이로 만들어 갔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후기 인신매매는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대개 가난을 타개하기 위해 아버지가 가족들 특히 딸을 많이 팔았고, 아이들 스스로도 자신을 파는 경우가 있었는데 부모를 굶주림에서 구한다거나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이지영, 2015) 실제 인신매매가 있었던 것이 당대 하층의 현실이었고 이때 효 이데올로기는 자식을 매매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좋은 명분으로 작용했을 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심청이 아버지의 개안을 위해 매신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설정은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고 공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명분으로든 아이를 파는 일은 비극이 아닐 수 없고, 심청의 매신은 심학규 말마따나 차마 할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선량하게 자라던 심청은 더 많은 사회·문화·경제적 자원이 필요한 나이로 성장하면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서포트를 받지 못한 채 부모 역할을 자임하게 되고, 정서적으로 결코 안정되고 안전한 환경에 놓이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취약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동안 점차 부모화된 아이로 강박적 사고가 강화되어 갔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의지할 데가 없던 심청은 과잉된 희생을 자처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심청전>은 심청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옥황상제마저 그 효심에 감응하여, 심청이 환생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토록 염원하던 아버지의 개안을 목도한다. 소설의 현실 반영, 사회 비판 기능을 중시하는 연구들은 비현실성과 환상성이 극대화된 후반부 서사에 대해 불필요한 부연이라거나, 하층의 통속적 운명론에 해당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청이 처한 간난이 천상계가 개입하는 환상적 전개가 아니면 해결 불가능한, 당대 하층에서는 도무지 현실적으로 대응할 방도가 없던 비극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심청전> 후반부 서사는 조선후기 비극적 현실에 대한 당대인들의 문학적, 정신적 대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신매매의 상황에까지 내몰리곤 하는 현실의 심청이들을 직접 구할 수 없던 조선후기 향유자들은 심청 부녀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비극을 다시 마주하고, 서사적 세계 안에서나마 착한 심청과 불쌍한 심학규를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닐는지.

      

오늘날에도 심청이들이 존재한다. 여전히 장애는 빈곤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취약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아동들이 있다. 안정된 가정에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한 것들이 취약한 환경에서는 엄청난 위기로 전화하여 도처에서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위태롭게 한다. 더욱이 경제적 취약성은 문화적 취약성으로도 이어져 아이의 정신 건강을 위협하고, 자신의 삶, 그들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진실을 내면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한다.     


과거 <심청전> 향유자들이 실질적 해결책이 여의치 않은 조악한 현실에서 문학적으로나마 심청 부녀의 비극에 대항하며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 냈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조선의 삶을 추체험함과 동시에 우리의 심청이들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심청전>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풍요롭고 매 순간 안온한 생활이 보장되는 삶은 또 다른 판타지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통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이 누구에게나 보장되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되자고,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방식으로 <심청전>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진영 외, 『심청전 전집』 1,3권, 박이정, 1997

정하영, 『한국고전문학전집 13: 심청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5

고은임, 「부녀관계를 중심으로 읽는 <심청전>」, 『판소리연구』 50, 판소리학회, 2020

김종철, 「<심청가>와 <심청전>의 ‘장승상부인 대목’의 첨가 양상과 그 역할」, 『고소설연구 35, 한국고소설연구, 2013

이지영, 「조선시대 장편한글소설에 나타난 ‘못된 아버지’와 ‘효자 아들’의 갈등」, 『고소설연구』 50, 한국고소설학회, 2015

조은영, 「부모화된 자녀의 심리적 특성 및 가족 내 영향력 연구」, 중앙대 박사논문, 2004

마리오 마론, 이민희 역, 애착이론과 심리치료, 시그마프레스, 200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