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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임 Nov 30. 2024

고전소설의 정신과의사,
<명행정의록>의 위천유


출처: tvN 조선정신과의사 유세풍 대표이미지

드라마 <조선정신과의사 유세풍>은 침을 놓지 못하게 된 천재 의원 유세풍(김민재 분)이 심의(心醫)로 거듭나,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정신의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조선&정신과의사’라는 낯선 조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조선의 '정신과의사'라니? 그때는 정신의학의 개념조차 생기기 전이지 않은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의사가 출세의 상징이자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 되었지만, 조선시대 의사는 최상층인 양반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중인층 담당의 기술직이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병을 고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내의원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왕족이나 양반들조차 의술이 시원찮을 때는 치병을 위해 무속에 의지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과(醫科) 시험에 하위 분과도 없던 형편이라 정신의학의 개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왕자인 사도세자가 오래도록 정신 질환을 앓았음에도 별달리 효과적인 의학적 조치를 받지 못했던 것을 보면 당대 정신의학의 위상이 짐작될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소설 속에도 유세풍처럼 정신의학적 치료를 선보이는 인물이 나온다. 19세기 향유된 <명행정의록>(70권 70책)에 등장한 ‘위천유’가 그러하다. <명행정의록>과 같은 한글장편소설에는 조선 상층여성들의 질곡이 다채롭게 반영되어 있는데, 작품 속 여성인물이 겪는 질곡은 대개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끼리 공감되며 다독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위천유는 공감능력이 뛰어나 여성인물의 고통을 곡진하게 보살피고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위천유는 위씨 가문의 삼 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나 사태를 파악하고 예견하는 능력이 뛰어나, 가족이 처할 위기를 가장 먼저 간파하고 대처한다. 게다가 그는 의학적 능력도 탁월하다. 상층 가문의 자제이니 당연히 문관이 되지만 의술을 독학으로 터득해 집안사람이 병이 나면 뭇 의원보다 더 나은 실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는 내과, 외과적 질환뿐 아니라 누구도 치료하지 못하는 정신적 병증까지 치유한다.    

  

위천유의 의학적 역량은 여러 차례 발휘되는데 특히 그의 동생 위천강이 휘두른 폭력에 그 부인인 양현강이 트라우마를 겪고 신체적 병증을 앓는 사건에서 그 능력이 크게 발휘된다.

      

위천강은 곧잘 정념에 휩싸이는 다혈질적 인물로 아내 양현강을 격정적으로 사랑하다가 그가 다른 남자와 사통했다고 의심하며 격렬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것은 기실 첩인 교강선이 정실부인 양현강을 내쫓으려 꾸민 사건이었는데, 위천강이 교강선의 계략에 놀아나 양현강을 오해했던 것이다. 위천강은 양현강의 면전에서 시비를 한 칼에 베어 죽이고 현강도 죽이려 한다. 다행히 때마침 위천유가 현장에 도착해 사태를 수습하면서 양현강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현강은 큰 충격을 받는다.

      

양현강은 남편으로부터 간통했다는 의심받자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자신의 귀를 베고,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한다. 위천강의 의심과 폭력적 행태에 트라우마를 겪고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도(女道)를 내재화한 인물이기에, 남편이 시아버지의 엄벌을 받는다는 소식에는 한걸음에 달려가 남편의 죄를 용서해 달라 청하고, 매 맞아 몸이 상한 남편을 정성스레 간호한다. 이때는 이미 양현강을 모함했던 교강선이 쫓겨나고 관련자들도 엄중히 처벌받은 데다, 양현강에 대한 누명도 씻겨 부부간 외적갈등이 해소된 상황으로, 이제 위천강의 건강이 회복된다면 두 사람 사이는 화합할 일만 남은 듯 보인다. 그러나 시부모와 남편 앞에서 여도를 완벽히 수행했던 양현강은 사실 아직 남편을 두려워하며 심적 안정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위씨 가문의 구성원 모두가 위천강·양현강 부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생각하는 순간, 위천유만은 양현강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음을 간파한다. 그 염려에 답하듯 머지않아 양현강이 혼절하고,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의식을 회복하지만 이후 사지가 마비되는 증상을 겪는다.     


여러 날이 지나도 마비증세가 지속되자 가족들은 의술이 뛰어난 위천유에게 방도를 묻는다. 이에 위천유는 그동안 현강이 겪어왔던 정신적 외상[trauma]을 주목하며, 그간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서도 그것으로 인한 심적 압박을 해소하지 못한 까닭에 신체적 병증이 나타났다고 진단한다.(실제로 정신적 문제는 신체적 징후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를 ‘신체화’(somatization)라고 한다. 이는 방어기제의 하나로 정서적 고통 혹은 감정 상태들이 신체적 증상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양현강과 대화를 나누며 그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의 울화를 간파하고 그 고통의 기억들을 풀어낸다.      


기실 양현강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속적으로 겪어왔다. 아버지는 정적(政敵)에 의해 처형당했고 어머니는 아버지 장례 중 양현강 앞에서 자결했다. 불과 그의 나이 10세 때의 일이다. 이후 우처사의 호의에 그 집에 의탁했지만 마을 무뢰배들의 겁탈 위협에 시달렸고, 혼례 후에는 마음을 놓을 새 없이 남편 위천강에게 심각한 육체적, 성적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간통의 누명을 써 남편의 칼부림 사태까지 겪었던 것이다. 이토록 심각한 위기상황을 경험하면서도 양현강은 그것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항상 여도에 부합한 규범적 태도를 고수하며 온화한 모습 속에 내면의 상처를 숨기고 스스로도 내면에 쌓여가는 고통을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위천유가 마치 양현강의 삶을 고스란히 본 듯이, 들은 듯이 그 마음을 차근차근 세세히 풀어내면서 정신적 고통을 헤아려준다.

     

양소저(양현강) 금병풍을 기대 두 손을 겨우 무릎 위에 놓고 고개를 나직이 하여 듣기를 다하더라. 자신의 마음속 품은 생각과 가슴 가운데 뭉친 것이 처음 불과 총알 같더니 점점 거위 알 같아져서 호흡을 좇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시비들도 알지 못하거늘, 위천유 본 듯하며 들은 듯함은 이르지 말고, 고달프고 기력이 사리짐을 몰랐던 것을 스스로 괴이히 여기나, 또 깨닫지 못한 바를 이같이 홀연히 의논하며 듣고 생각하니 정말로 그러한지라. (…) 가슴이 탁 트여 드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듯하니 문득 부지불식간에 옥 같은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고 무릎을 움직여 자세를 고치니, 병이 든 후 능히 못하던 바라.
                                                                                  (<명행정의록> 54권)


위천유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해 내는 것을 귀 기울여 듣던 양현강은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짐을 느끼며 서서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위천유의 뛰어난 의술 감각과 탁월한 공감능력이 어우러져 병을 치유하게 된 것이다. 위천유는 이후에도 여전히 남편을 불편해 하는 양현강의 마음을 배려해, 위천강에게 성급히 굴지 말고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마련하고, 무엇보다 공경하여 대할 것을 당부한다.     


이처럼 위천유는 양현강의 심적 상태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곡진하게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차분하고 섬세하게 그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내면의 아픔을 차근차근 풀어내 양현강이 그것과 대면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곁에서 지속적으로 돕는 정신과의사, 혹은 상담자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이다. 위천유의 탁월한 의술은 타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에서 비롯한다. 그는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지만 또 그것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여성인물의 수난이 그려지고 그것이 복선화음으로 귀결되어 보상받는 이야기는 한글장편소설에 숱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 수난의 고통은 비슷한 처지의 여성인물간 공감되고 위로된다. 이때 남성인물은 대개 여성에게 고통을 부여하는 존재이거나, 여성인물의 편에 서더라도 내적갈등으로 괴로운 그들의 내면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바, 위천유의 존재는 독특하다. 더욱이 정신의학의 개념도 마련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이처럼 인간 심리의 문제, 정신적 병증을 조명한 작품 전개는 흥미롭다.


현대적 관점에서 그 방식이 조악하고 단순할지라도, 위천유는 양현강이 앓고 있는 병의 본질을 간취하여 심리 상담을 진행함으로써 정신 질환을 성공적으로 치료하였으니, 이만하면 ‘유세풍’보다 앞선 ‘정신과의사’라 할 만하지 않은가.



*참고문헌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명행정의록』 한중연 소장본 70권 70책,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커버이미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https://jsg.aks.ac.kr/viewer/viewIMok?dataId=K4-6805|0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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