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의 로맨스(1)
2021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옷소매 붉은 끝동>은 궁녀 성덕임(이세영 분)과 정조(이준호 분)의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로 실재했던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모티프로 하였다. 드라마 주인공 성덕임은 천진난만한 소녀이지만 오라비 신분 세탁을 위해 백 냥 모으기에 몰두하며 잇속을 따지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고 필사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는 덕임은, 당시 소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돈벌이가 되던 분위기에 힘입어, 동료들 앞에서 핫한 소설을 맛깔나게 낭독하고 고운 글씨로 소설을 필사하여 부수입을 두둑이 챙긴다. 현대적 감각의 허구적 설정이 가미되고 이세영 배우의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연기가 어우러지면서, 궁궐의 여러 제약 속에서도 당차게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매력의 궁녀가 탄생하였다.
역사 속 실존 인물 성덕임도 정갈한 글씨로 소설을 필사하며 소설을 즐겼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딸 청연, 청선군주, 그리고 동료 궁인들과 함께 고전소설 <곽장양문록>(10권 10책)을 필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곽장양문록>에는 필사 부분에 따라 필사자 각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의빈이 된 성덕임은 자신이 필사한 부분에 ‘의빈글시’라고 적어 두었다.
그렇다면 성덕임과 같은 조선후기 여성들은 실제로 어떤 소설을 즐겨 읽었을까? 궁녀, 공주, 비빈과 같은 궁궐 여성들, 상층의 양반 여성들이 당대에 매료되었던 로맨스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전통시대 ‘사랑’은 ‘결혼’과 무관한 것으로 얘기되곤 한다. 특히 상층 사회를 주목할 때 그러한데, 양반가에서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결연으로, 중매혼의 절차를 갖춰 철저히 공적 이벤트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문의 유지와 번영, 그리고 세습의 문제였지 결혼 당사자 개인의 취향, 의사와 같은 것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혼례 당일 배우자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는 것이 조선 상층의 혼속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말들은 조선 양반가 부부와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양반 남성들은 ‘외정(外情)’이라 불리는 관계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외정’은 남성의 혼외 관계를 일컫는 말로, 조선시대에는 관기제, 축첩제 등에 기반한 혼외 관계가 존재했으며 남성들은 여러 여성과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서인지 남성 문인의 작품에는 주로 혼외 관계의 사랑, 혹은 혼인 이전의 사랑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사랑 서사의 대표 장르인 애정전기소설을 살펴보면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애정전기는 남성 문인이 한문으로 창작하고 즐겨 향유한 장르로 그들의 사랑관,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유명한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짧은 만남과 영원한 이별”(박희병, 1997)이란 미학이 마련된 이래, <운영전>의 궁녀와 이룰 수 없는 사랑, <주생전>의 기생에게서 규방여성으로 옮겨간 사랑 등, 애정전기의 사랑은 결혼과 반드시 직결되지 않는다. 또한 남성들의 유희적 감성이 담긴 패설문학, 연애시 등에서 성애적 사랑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혼외의 여성, 특히 기생인 경우가 많다.
한편 우리가 잘 아는 조선 최고의 로맨스 <춘향전>에는 결혼으로 이어지는 연애 스토리가 전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서사의 초점은 혼전 연애에 있고, 그토록 열정적인 혼전 연애가 그려질 수 있던 것은 춘향이 기생의 딸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몽룡이 춘향에게 추파를 던진 처음의 순간 몽룡에게 춘향은 기생과 다를 바 없었고, 몽룡은 연애 초기 춘향과의 정식 혼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춘향전>에는, 처음 어떤 마음이었든 사랑이 깊어지며 서로에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 생기 있게 전개되지만 말이다.) 이처럼 조선의 상층 남성에게 사랑은 결혼과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층 여성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주지하다시피 조선의 양반 여성에게는 ‘일부종사(一夫從事)’, ‘정절(貞節)’과 같은 이념이 강력하게 요구되었다. 또한 내외법(內外法)에 따라 혼전에 남성과 연을 맺기 힘들었고, 혼인 후에는 규방이라 불린 깊숙한 안채에서 지내며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에게 남녀관계란 부부관계,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처음 결혼한 한 명의 남성에게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양반가 여성에게 혼인이란 한평생 남성과의 만남이 허락된 거의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이 가문을 위한 공적 행사였듯, 부부생활 역시 가문의 유지와 번영을 위한 것이어야 했고, 부부가 서로에게 열정을 갖고 몰입하는 일은 위험한 일로 취급되었기에 결혼을 했다 해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할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남성들은 혼인과 무관한 사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 규방여성에게 사랑은 너무나 요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그들이 사랑과 무관한 삶을 살았을 리는 없다. 아무리 억압적이고 조악한 환경이라 해도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꿈꾸고 사랑을 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이제 규방여성의 로맨스에 접근하기 위해 한글장편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조선의 로맨스라 함은 중고등학교 때 ‘애정소설’이라 배운 <이생규장전>, <운영전>과 같은 전기소설이나 <춘향전>, <채봉감별곡>, <숙영낭자전>과 같은 단편의 애정소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반면 국문장편소설, 가문소설, 대하소설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한글장편소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나마 최근 수능 공부를 했다면 <소현성록>, <유씨삼대록>과 같은 작품에 대해 배웠을 테고, 한글장편소설이 ‘상층 가문 간 혹은 가문 구성원 간의 갈등과 그 해결이 유교 사상과 가부장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장르’라는 단편적 지식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한글장편소설과 로맨스라니?
한글장편소설은 상층 가문들 간의 갈등이나 가문 구성원 간의 갈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가문의 이야기 안에는 남녀의 혼인 전후의 연애 서사가 매우 높은 비중으로 펼쳐져 있다. 거질의 연작 형태를 띠고 한글로 쓰인 이 작품들은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던 상층의 규방여성들이 즐겨 읽었다. 규방여성들에게 한문으로 쓰인 애정전기소설은 접근하기 쉬운 텍스트가 아니었고, <숙영낭자전>과 같은 ‘~전’책은 평민들이 읽는 수준 낮은 책이라 여겨졌다. 반면 고상한 필치의 한글로 쓰인 <소현성록>과 같은 ‘~록’책은 상층 여성의 세계와 관심사가 “말이 우아하고 점잖아서 상스럽지 않게"(이언주, 1975) 담겨 있어 선호되었다. 비와 빈, 공주나 옹주, 궁녀 등의 궁중 여성들도 한글장편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 그러한 지점이 흥미롭게 반영된 것이다.
상층 여성들은 한글장편소설의 열독자였을 뿐 아니라 180권 180책 대장편의 <완월회맹연>과 같은 작품을 직접 창작하기도 했으니, 애정전기소설이 남성 문인의 장르라면 한글장편소설은 규방여성의 장르, 그들의 의식, 정서, 욕망이 투영된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창작활동이 금기시되었고, 더군다나 ‘사랑’이라는 사정(私情), 절제되고 규제돼야 하는 내면을 드러내는 일은 더더욱 불온시했던 시대, 여성의 사랑, 사랑에 대한 내밀한 욕망이 직접적으로 기록될 수 없던 상황에서, 한글장편소설은 허구의 장 안에서 규방여성의 현실과 욕망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편에서 한글장편소설에 형상화된 규방여성의 사랑, 그들의 현실과 사랑관, 사랑에 대한 욕망과 판타지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참고자료
박희병, 『한국전기소설의 미학』, 돌베개, 1997
이원주, 「고전소설독자의 성향-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3, 계명대 학국학연구원,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