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은임 Nov 09. 2024

<춘향전>, 대중적 러브스토리의 진취성

<춘향전>은 러브스토리이다. 학교에서는 조선 후기 민중의식이 발현되었다거나 인간 평등과 존엄성이 주장되었다는 등의 주제를 강조해 가르치지만, <춘향전>은 본디 전통시대를 대표하는 대중적 러브스토리이다.(물론 전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부분은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니 여기서는 사랑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 시대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늘날에도 영화, 드라마, 광고 등 대중 콘텐츠로 활발히 재창작되며 여전히 사랑받는 고전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춘향전>은 익숙한 만큼 구태의연한 러브스토리로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재자가인(才子佳人)의 만남, 높은 지위의 능력 있는 남성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신데렐라콤플렉스의 반영 등 뻔한 구닥다리 남녀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물론 춘향의 사랑은 전통사회의 시대적 한계 내에서 전개된다. 신분적 제약 너머의 삶을 꿈꿨던 춘향의 진취성도 남성과의 혼인을 통해 표현되었다. 춘향과 몽룡 사이 형성되는 관계의 양상, 사랑의 감정,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신분, 젠더 규범 토대 위에서 이뤄진 까닭에, 오늘날 관점에서 그런 지점들은 구태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춘향전>은 조선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과 분투로 추동된 서사이기도 하다. 시대적 한계, 통속적 관념을 토대로 하면서도, 이야기 속 인물들은 사랑을 방해하는 부조리한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개인의 권리, 자신의 주체성을 진일보시키는 삶을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하층’, ‘여성’인 성춘향의 주체적 선택과 행위가 주도적으로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상층’이자 ‘남성’인 이몽룡 역시 이야기의 주체로 역할하며 ‘상호성’이 잘 갖춰진 러브스토리가 완성된다.      


춘향과 몽룡은 첫 만남에서 ‘기생’과 ‘양반 남성’이라는 신분적 정체성을 의식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신분 격차가 뚜렷이 표상된 이본 <남원고사>에 그런 지점이 잘 드러나 있는데, 몽룡은 그네 타는 이가 기생의 딸이라는 방자의 말에 “제가 만일 창녀일진대 한번 구경 못 할쇼냐” 기뻐한다. 기생과 한번 놀아보자는 유희적 감정이었던 것이다. 춘향을 데리러 간 방자 역시 도련님이 오입쟁이니 잘 보이면 남원 것이 다 네 것이 된다며 춘향에게 기생의 행위 양식을 기대한다. 그러나 몽룡이나 방자가 기대하는 ‘기생’이고 싶지 않던 춘향은 추근대는 방자에게 발끈 성을 내고, 자신을 기생으로 바라보는 몽룡을 거부한다.      


인연 맺어 백년해로하자고 수작을 거는 몽룡에게 춘향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일부종사(一夫從事)하며 아들 손자 낳아 살겠노라 평소의 바람을 말하면서 만남을 거부한다. 이때 방해가 되는 요소는 몽룡의 신분이다. 사실 춘향도 몽룡을 슬쩍 올려다보고서는 ‘만고영걸(萬古英傑)’ 그의 기상에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천인인 자신이 양반인 그를 만나보았자 기껏 첩실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잠시 만나다 버림받게 되리라는 현실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수작을 거절한다. 천향국색(天香國色) 춘향을 가까이 보고 “정신이 황홀하고 심신이 녹는 듯” 더욱 안달이 난 몽룡이 다시 만남을 종용하고, 이에 춘향 역시 재차, 자신이 비록 창가(娼家)의 천기(賤妓)지만 “남의 첩됨이 가소롭고 일시 꽃을 찾는 나비 원치 않는다”며, 설사 당신이 지금은 좋다고 만나더라도 훗날 권문세가의 요조숙녀 맞아 금슬지락 즐기며 자신을 헌신짝마냥 버리면 속절없이 가련한 신세 될 것이라며 거절의 의사를 또렷이 전한다.      


첫 만남에서 춘향과 몽룡 모두 서로를 보편적 ‘기생’과 ‘양반’으로 의식하며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간절해진 몽룡이 당장 정식 혼례 절차는 갖추지 못하나 혼인하여 백년해로할 것이라 달래고, 다시 문서로 서약해 달라는 춘향의 요구에 응하며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재자가인(才子佳人)의 만남은 러브스토리의 전형적 설정이며 그런 면에서 춘향과 몽룡의 만남도 전형적이며 통속적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춘향과 몽룡이 처한 신분, 젠더적 위상을 고려해 볼 때 이 장면은 꽤 흥미롭다. 천민인 춘향이 양반인 몽룡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당돌하게 말하고, 몽룡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정실이 되어 해로하고 싶다는 그 바람을 자신과 함께하자고 대응한다. 양반 남성과 기생의 사랑이 형상화된 작품은 숱하게 많지만, 기생은 양반의 첩(妾)이 되면 되었지 처(妻)가 될 수는 없는 사회에서, 몽룡은 춘향의 바람에 흔쾌히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춘향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얕은수를 부린 것일지 모르나, 그 순간 몽룡은 여느 양반님네처럼 춘향의 바람을 허무맹랑하다고 비웃거나 무엄하다고 비난하지 않고,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존중했다. 춘향은 그 신분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며 수용하려는 몽룡의 유연한 태도에 마음이 동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젊은 남녀의 생기발랄하고 열정적인 사랑이 경쾌하게 전개된다. 첫 만남에서 몽룡이 춘향을 유희적 감정의 성적 대상으로 대했든, 춘향이 양반의 수려한 면모에 혹해 만남에 응했든, 이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상대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전변(轉變)되는 사랑의 관계를 생생하게 그린다.      


에스닉 퓨전 밴드 ‘두번째달’은 2016년 판소리 소리꾼들과 함께  춘향가를 재해석해 <판소리 춘향가>를 발매했다.
[온스테이지] 299. 두번째달 - 사랑가(feat. 고영열)
https://www.youtube.com/watch?v=aZaWg0-p-D8


사랑에 빠진 춘향과 몽룡의 마음이 사랑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EBS스페이스공감] 두번째달 - 이별가(얼음 연못)(feat. 이봉근)
https://www.youtube.com/watch?v=x0LFh5De_-E

몽룡을 떠나보낸 후 춘향이 느끼는 그리움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엇을 하든 온통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해지는 첫사랑의 설렘, 달뜬 청춘의 열정적이고 농밀한 성애, 이별 순간의 지질하고 발악스러운 비탄과 이별 뒤 그리움까지, 그들의 사랑은, 몽룡에게 춘향과 재회하기 위해 출세에 힘 쏟을 동기를, 춘향에게는 변학도의 폭압에 목숨 걸고 항거할 의지를 다지게 하는 데 충분한 계기를 마련한다.(몽룡은 춘향을 떠난 후 그리움에 힘겨워하다가도 “힘써 공명을 이루면 부모를 영화롭게 해 효도하고 가문을 빛낼진대 내 사랑은 그 가운데 있으리라”며, 춘향과 재회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학문에 힘쓰고,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항거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자에 대한 성적자결권의 행사이며 인간의 존엄성, 기본권에 대한 주장이면서도, 몽룡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아름다운 하층 여성이 능력 있는 상층 남성을 만나 결혼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이고 환상적인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라는 구체적 시대, 사회적 상황 안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전복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대체로 <춘향전>에 나타난 봉건적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적 저항의 의미를,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항거와 몽룡의 연대 장면에서 읽어내지만, 기실 춘향의 사랑 자체가 이미 당대 헤게모니에 대해 저항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생이라는 신분에의 부정, 몽룡과의 관계에서 동등한 위계로 자리하겠다는 바람은, 명시적이지 않더라도 봉건적 신분 관계의 부정, 인간 평등의 요구로 이어지며, 이후 춘향과 변학도의 대결을 추동시킴으로써 기존의 남녀/신분 관계를 회의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의 전통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에도 <춘향전>은 앞으로 도래할 근대적 자유연애의 ‘낭만성’을 선취한 측면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 결혼은 사랑과 무관하게 가문의 유지와 번영, 그리고 세습의 문제가 결부된 정략적 행사였다. 낭만적 사랑을 혼인의 필요조건으로 여기며 자유로운 관계에서 비롯한 결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낭만적 자유연애 → 결혼’이라는 구도는 이몽룡이 속한 양반 계층에서는 낯선 문화인 것이다. 조선 상층의 혼인은 내외법(內外法)에 따라 같은 신분 내의 중매혼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실하에서도 조선의 소설 가운데는 <이생규장전>과 같이 혼인으로 이어지는, 혼전 자유연애를 그린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같은 신분 내에서의 일이다. 상층 남성이 기생처럼 낮은 신분의 여성과 연애를 한다면 정식 혼인과 무관한 것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때 하층 여성은 <구운몽>의 기생 계섬월과 같이 일대다 구도에서의 한 명, 처첩제 구도하에서 첩의 위치에 놓인다. 

     

이러한 신분 관계의 정략혼인 전통 속에서 춘향이 몽룡과 형성한 일대일의 관계와 공식적 혼인의 성취는, 객체가 아닌 주체적 인간 간의 자유로운 관계와 사랑, 결혼에 대한 환상성과 낭만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더욱이 낭만적 사랑의 성취를 위해 당대의 신분과 젠더 정체성에 구애되지 않고 주체적이며 적극적으로 역할하는 하층 여성의 등장은 그 자체가 시대의 충격으로, 지배질서를 일탈한 것이었다.


미천한 신분으로도 당차게 신분적 속박 너머의 삶을 꿈꾼 춘향과, 신분적 우위의 거들먹거림 없이 춘향의 바람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존중하려 한 몽룡이, 서로를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여기게 되며 자신들의 신의와 사랑을 정식 혼인으로 귀결시키는 이 낭만적 러브스토리는, 통속적 설정과 구조 속에서도 과거의 관습과 통념에 저항하며 새로운 사랑의 감각을 선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춘향전>의 ‘사랑’은 다음 시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진영 외, 『춘향전 전집』 4·5, 박이정, 1997

고은임, 「고전서사 콘텐츠화의 한 사례 - <방자전>에 대한 비판적 검토」, 『우리문학연구 』78, 우리문학회, 2023

박희병, 『한국고전소설의 방법적 지평』, 알렙, 2019 

커버이미지 : 불어판 춘향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