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 너희들끼리만 위대하거나 평등할 뿐
분명히 다름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솔깃한 교훈을 새기도록 하는 게 있다. 이걸 '정치적 우화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옳을지 싶다. 비상계엄령이라는 현재적 사태를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을 빌려 사유해 보았다.
한때, 모든 것은 동등했다. 혁명의 깃발 아래 새겨진 글귀들은 희망의 불씨가 되었고, 농장에서 울려 퍼지던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목소리도 약자와 강자를 구분하지 않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내 글귀는 변질되었다.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조작된 진리는 지배자들의 도구가 되었고 혁명은 이제 기억 속 신화로 사그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 또한 이 서사를 흉내 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되고, 숨 가쁘게 달려왔던 11일 동안의 일정은 역사였다. 그리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참담하다. 국민의힘 절대다수가 내란죄를 심판하지 않고 동조했기 때문이다.
농장 안에서 황 돼지 나폴레옹이 농장의 주인이 되었던 장면을 우리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들의 행동은 사실상 새로운 “7계명”을 쓰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법치를 외치지만, 공포를 주입하고 홀대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그 말끝에는 항상 특권을 행사하는 거만함이 깃들었다. 그들의 법과 질서는 동물 농장에서 돼지들이 침대를 차지하며 이를 합리화했던 포장처럼, 강자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정치 언어는 오웰의 타락된 계명을 추종한다. 위기 상황을 유도하여 권력을 강화하려던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계명이 점차 변질되던 동물 농장의 모든 단계처럼, 그들의 언어는 교묘히 변조되며 강화되었다.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억압하고,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려던 것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문구는 언제부터인가 “특정 국민은 더 평등하다”로 변질되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선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들만의 생각과 행동이 선이며 합법이었다.
“어느 국민도 나에게 대항해서는 안 된다”로 들릴 수밖에 없었던 그의 ‘광란의 춤’ 담화는, 결국 사생결단의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국가의 중심이자 마지막 보루로 여기며, 국민을 향해 비장한 결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권력 유지의 욕망을 드러냈을 뿐이다. 국민을 적으로 둔갑시키는 그의 허튼 망상은,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분 뒤에 숨은 위험한 독선에 지나지 않았다.
오웰의 돼지들은 술과 침대의 특권을 합리화했던 것처럼,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의 문구를 세부적으로 수정하며 이를 정당화한다. 그리하여 “어떠한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원칙은 숙청과 살해를 정당화하는 변형으로 공포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작금의 비상계엄령에서는 이를 빌미로 누구누구를 체포·구금하고 나아가 살해 계획(미확인)까지 세웠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 ‘이유 없이’를 배제한다.
계엄령을 그들은 통치 수단의 하나로 주장한다. 그러나 엄중하게도 공포의 상징이며, 국민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사늘한 총구의 협박이다. 장갑차가 도로를 메우고 헬리콥터와 군홧발이 국회를 침략했다. 공권력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순간, 그들의 계명은 더욱 뚜렷해진다.
“모든 국민은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그러나 희생의 무게는 결코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희생은 항상 약자의 몫이었고, 강자들은 이를 이용해 더욱 공고한 위치를 점령해 왔다.
동물 농장의 나폴레옹이 적을 제거하고 동료들을 숙청하며 자신을 혁명의 주인으로 만들었던 모습은, 계엄의 우두머리가 행하려 했던 정치적 숙청 계획과 다르지 않다. 법과 정의를 내세운 결정은 법과 정의를 조악하게 만들었다.
국민의힘의 태도는 어떠하던가. 돼지들이 인간과 손을 잡고 동물 농장의 규칙을 뒤엎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두 발로 걷는 자는 적이다”라는 계명을 버리고, “두 발로 걷는 자는 친구다”로 둔갑시켰다. 자신들의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사태를 왜곡했다.
국민의 고통과 분노를 진정한 민심으로 대변하기는커녕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뿐이다. 탄핵소추에 반대했던 그들의 행보는, 돼지들이 농장 주인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며 “축배를 들자”라고 외치던 모습과 처절하게 겹친다. 자신들의 세상에 안주하려던 태세 전환이 흉측할 뿐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오웰이 보여준 비극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저항의 가능성이다. 동물 농장의 벽에 쓰인 계명들이 아무리 바뀌어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벤저민 같은 침묵의 증인이 있었고 클로버 같은 무력하지만, 양심 있는 존재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권력이 언어를 조작하고 법을 왜곡하더라도,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동물 농장의 이야기는 역사적 우화이지만, 오늘날의 정치를 압도적으로 풍자한다. 이후 확실한 정치 지형도를 이끌지 못한다면, 최근의 사태는 어떤 체제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방증이었다. 우리가 반드시 새기고 있어야 할 경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