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사람

미친년의 초하루

by 지오쌤

결혼 두 달, 낯선 집안에서 맞는 첫 설날 아침.

점심상을 치운 뒤, 경이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겨우 입을 뗐다.

“어머니, 친정에 세배 다녀오겠습니다.”


말끝이 채 맺히기도 전에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어머니의 눈빛이 번뜩이며 경이를 깊숙이 꿰뚫었다.

굳게 닫힌 입매는 말보다 더 큰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는 오래 쌓인 섭섭함과 체념, 그리고 차마 말 할 수 없는 억울함이 뒤엉켜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그 눈빛이, 오히려 가장 큰 대답이었다.

그때 부엌 쪽에서, 동서 주희가 팔을 걷어붙이며 성큼 다가왔다.

기름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손에서, 불쑥 불화의 기운이 번져왔다.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방 안을 가르는 칼날 같았다.

“아니! 친정을 갈 거면 나한테 먼저 말해야 하는 거 아냐?

누가 먼저 친정 가자고 한 거야? 삼촌이야?”

예사롭지 않은 한숨과 피로가 묻은 고음이 방 밖으로 튕겨 나갔다.

두 성질이 뒤엉킨 그 말 앞에서, 경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안 전체가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


들어오던 막내 시누가 ‘엄마’하고 부르다 말고

눈치를 살핀 뒤,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어머니의 무응답 속에서, 경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친정 올케는 점심 식사 후 당연하다는 듯 친정으로 향했고

언니들은 명절이 끝난 뒤 부모님을 뵈러 왔다.

자신은 예의를 갖춰 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친정 부모님께 세배를 다녀오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집안의 질서는 달랐다.

‘큰 며느리의 허락’이 어른의 허락보다 위에 있었다.

경이는 그것을 몰랐다.

주희의 얼굴엔 살기가 어렸다.

눈매가 날카롭게 일그러지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였다.

마치 공기까지 불온하게 흔들고 있었다.

경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저… 안 가겠습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고개를 숙였다.

마루바닥이 갑자기 더 차갑게 느껴졌다.

무언가 큰 실수를 저지른 듯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 번만 참으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 믿었다.


그러나 사태는 잦아들지 않았다.

“친정엘 그렇게 가고 싶니? 갔다 와 그럼”

주희의 목소리가 칼끝처럼 툭 튀어나왔다.


경이가 “괜찮습니다” 하고 중얼거리자,


동서의 고함이 다시 폭발했다.

“가라는데, 왜 또 안 간다고 난리야! 뭐가 문제야?

안 보내주면 신혼 때 친정 안 보내 줬다고 나중에 또 원망할 거 아니야.”

경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그 말만 입안에서 맴돌았다.

두 손을 무릎위에 꼭 붙이고, 손가락이 떨리며 움츠러들었다.

작은 떨림조차 들킬까 두려워, 손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그러자 주희는 이번엔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저 신혼 때 친정 간다고 했을 땐 안 보내주시더니,

동서한텐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어머니는 눈을 감은 듯, 돌처럼 앉아 있었다.

침묵은 대답보다 무겁게 방 안에 내려앉았다.

경이 눈에 시댁은, 마치 살얼음판 위에 불을 놓은 집 같았다.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어디서든 금이 갈 수 있었다.

음력 정월 초하루, 한해의 첫날.

친정에서는 어떤 실수도 웃음으로 덮였고,

복주머니에 용돈을 넣어 덕담을 건네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 집엔 웃음도, 덕담도 없었다.

경이는 마치 자신이 모든 걸 망쳐버린 사람 같았다.

그 죄를 씻어 내기라도 하듯,

설거지를 마친 그릇을 다시 헹궜다.

손끝으로 물기를 훑고

가스레인지 조작 버튼 사이사이 묵은 때를 문질렀다.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자신도 사라질까 봐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날 선 분위기 속에서, 결국 주희의 강권에 밀려

경이는 쫓기듯 친정으로 향하게 되었다.
설거지하던 옷차림 그대로, 헝클어진 머리와, 빨갛게 부은 눈을

거울 속에서 마주했다.

거기엔 ‘미친년’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옆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가라고 하셨다.

웃음도 덕담도 사라진 음력 초하루,

마치 경이를 위한 듯 설날임에도 미용실 문은 열려 있었다.

원장님은 드라이와 고데기로 한복에 어울리는 머리를 정성스레 만져주었다.

“ 새로나 슈퍼 며느리예요?”

나이 지긋한 원장님이 상냥하게 물었다.


경이는 맞다는 눈을 한번 깜박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옆에 앉은 손님에게 원장님이 말했다.

“이번에 새로 결혼한 새댁인가 봐요. 참 예쁘죠?”

예쁘지 않은 자신을 예쁘다 해주는 그 말에,

경이는 마음속에 잠시 온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거울 속에서, 아주 잠깐 웃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늘 하루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