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죽은 말괄량이

소리가 멈춘 부엌

by 지오쌤

결혼 후 경이는 명절에도, 생신에도 친정을 가지 못했다.

그러다 일흔 번째 엄마생일에 처음 참석했다.

엄마가 물었다.

“경이야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

“아이들 키우느라 그러지.” 경이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의 눈빛은 오래 머물렀지만 경이는 시선을 피했다.

시댁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었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선택한 남편과 그 집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을 삼킨 얼굴은 그 자체로 답이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예전의 ‘말괄량이 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이의 어깨엔 주눅과 우울이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다.

이미, 너무 오래도록.


“요즘 엄마들 다 그렇게 살아. 애 낳고도 복직하고,

자격증 따고, 사업도 하더라. 유별나게 힘든 척하네”

누군가 위로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경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가 지나치게 예민한 탓인지,

아니면, 단지 몸이 약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얇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경이는 말을 빨리 배웠다.

또래보다 키는 작았지만, 그녀는 꽃과 더 많은 말을 나눴다.

강아지에게도 “너 오늘은 무슨 꿈 꿨어?” 하고 묻던 아이였다.

하지만 마음은 조용했다

쉽게 젖고, 오래 스며드는 마음은

세상속에서는 종종 무기력처럼 비쳤다.


동서 주희는 그런 경이를 “특이하다”고 했다.

그 말의 뜻을 경이는 끝내 알지 못했다.

사람마다 결은 달랐다.

누구는 강철처럼 벼려진 단단함으로 삶을 뚫고 나가고,

누구는 얇은 종잇장처럼 흔들리며 겨우 버텼다.

경이는 후자에 가까웠다.

울타리 속 봉숭아처럼, 흙에 닿은 뿌리로 간신히 피어난 꽃.

약해 보이지만, 잔상처럼 오래 남는 존재였다.

그날, 친정 어른의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맺혔다.

“막내가 왜 저렇게 기가 죽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경이는 석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창 밖 풍경은 봄을 알렸지만, 그녀의 마음은 겨울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다.

어릴 적, 그녀가 있는 곳은 늘 작은 아고라 같았다.

운동회 날엔 앞에 나섰고, 음악 시간엔 ‘삑’ 소리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얌전한 척은 했지만, 기죽지 않았던 아이.

말괄량이면서도 혼자 꽃을 바라보던 밝은 아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온몸을 감쌌다.

자신이 선택한 삶이 어느 날은 바람처럼 가볍고

어느 날은 벽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표정을 감췄다.

혼자 방에 누워, 긴 숨을 내쉬며 자신이 사는 방식을 의심했다.

친정에서는 모두가 경이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주눅 들고 기가 죽은 막내딸, 아픈 사람, 어딘가 모자란 사람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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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말 “친정에서 그렇게 배웠냐?”는 귓가에 맴돌았다.


그 냉담한 질문은 그녀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사실 경이는 친정에서 많은 걸 배우지 못했다.

중학교까지만 엄마와 함께 지냈고,

고등학교부터는 오빠와 언니 집에서 신세를 지며 학교에 다녔다.

직장도 다녔고 스스로 세상을 배워야 했다.


시댁은 기대와 사랑보다 알 수 없는 오해와 낯선 시선만 가득했다.

경이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경이는 그날의 새댁 시절을 떠올렸다.

어느 날, 어머니가 끓인 육개장을 처음 맛봤다.

진하고 얼큰한 국물, 손수 끓인 맛은 특별했다.

어머니는 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무좀 썰어 봐라”

경이는 조심스레 무를 잡고 칼을 들었다.


무의 결을 따라 일정한 크기로 썰어보려 했지만 크기가 늘쭉 날쭉 했다.

두께도 결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도마를 집어 들더니, 텅-

속이 빈 플라스틱 소리가 가볍게 울려 부엌 안에 맴돌았다.


경이는 그 소리를 자기 마음이 깨져 내려앉는 소리처럼 느꼈다.

부엌 안은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어쩌면 이 집에서는 평범한 풍경일지도 몰랐다.

금이 간 것은 오직 경이 마음뿐이었다.

석훈은 아는지 모르는지, 형제들과 우애를 다지는 데 바빴다.

경이는 고개를 숙이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무와 함께, 자신의 마음도 삼켰다.

사실, 경이는 무 써는법은 물론 밥짓는 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친정에서는 부엌일이 엄마 몫이었고, 경이는 아버지가 허락한

작은 꽃밭과 청소가 유일한 책임이었다.

진짜 ‘살림’이란 늘 누군가의 일이었고,

자신의 것이 된 적이 없었다.


새벽빛이 희미한 부엌,

엄마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갓 지은 밥을 퍼 담았다.

성인이 되어 집을 방문해도,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막내딸로서의 평화, 그저 받아먹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경이는 장 보는 법을 배웠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 골목을 걸을 때, 흐르는 땀이 낯설게 느껴졌다.

살림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몸으로 익히는 일이었다.

그 모든 처음은, 어쩌면 무를 잘못 썬 그날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는 일은 어느새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렇게 살림을 배우며, 장보는 일도 익숙해졌다.

‘익힘’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