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팔순

너희 친정에서 그렇게 배웠냐?

by 지오쌤

친정 부모님 생신, 결혼 후 아버지 칠순과 어머니 칠순 때는 참석했었다.
아버지 팔순 즈음, 친정 올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가씨, 이번에 아버님 팔순인데… 안 오시면 섭섭해요. 꼭 오세요.”
하지만 시어머니 생신이 주말로 당겨져 아버지 생신과 일정이 겹쳤다.


겨울의 끝자락 늦추위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폭설로 고속도로가 마비되고 도로에는 대형 사고가 연속 일어났다.

경이는 시어머니와 동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업주부인 주희는 이미 시댁에 가 있었다.


“어머니, 눈이 많이 와서 도로가 막혔대요.

저 어머니 사실 내일이 친정아버님 팔순이라 기차로 다녀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시댁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경이 마음에는 친정 올케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또 눈 핑개로 친정을 갈 수있게 되어 기뻤다.

어머니는 선뜻 그러라고 하셨다.


남편과 함께 서울역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겨울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워 코끝이 얼얼했다.
좌석 표는 이미 매진이었다.

“힘들겠지만, 입석으로 가자.” 남편이 말했다.

숨을 쉴 때마다 허공에 하얀 김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마음은 따뜻했고, 어딘가 달뜨기까지 했다.


기차에 몸을 싣고 서서가는 고단함은 설레는 경이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날 생각에, 밤새 무령으로 달려가는 기차 속 흔들림조차 기분 좋은 것이었다.


창밖으로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허공을 맘대로 휘저었다. 꼭 속없는 경이의 마음같았다. 빠바바방... 빵! 막대기 하나들고 적을 찾는 눈빛, 동생과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집은 드라마 “전우”의 무대였다. 그 무대로 향하는

경이는 날풍경에 마음을 실으며 속삭였다.

"오늘은 내가 나인 날이다."


자정무렵, 친정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키우는 메리가 컹컹 짖어대고, 마당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부지런한 엄마는 댓돌 위 신발들을 모두 마루로 올려놓았다.

어릴 적 화단 자리에는 짚가리가 누워 있었고, 그 위에도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장독대 항아리 뚜껑은 하얀 모자를 눌러쓴 듯, 다정하게 웃고 있는 듯했다.

추위와 개 짖는 소리마저 이날은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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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여는 소리에 마루 너머 안방문이 열렸다.

한기가 가득한 마루를 넘어, 아버지의 침묵이 먼저 맞았다.

예전 같으면 “우리 막내구나” 하고 한마디 던지며 웃었을 아버지였지만, 이날은 말없이 경이만 바라보았다.

경이는 그 침묵 속에서 오래 묵은 사랑을 느꼈다.

말하지 않아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따뜻함조차, 멀리서 전해오는 햇볕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언니, 형부, 오빠, 동생 모두 아버지 생신을 위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형제들, 엄마, 아버지 그리운 온기가 경이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아버지의 말없는 침묵도, 엄마의 수다스러움도 모두 포근하게 느껴졌다.

발을 집어넣었던 아랫목의 온기가 다시 살아난 듯했다.

이튿날, 아버지 친구분들과 동네 어르신들을 초대해 생신을 치렀다.


하루쯤 더 있고 싶었지만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경이는 아버지께 가난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괜찮다, 나 돈 많다.”

여든을 넘긴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경이에게는 ‘내가 너를 돕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경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국화꽃이 만개해 벌떼가 덤벼들던 뒤꼍과,

하루 두 차례 씩 경이에게 딸기를 공급해 주던텃밭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눈에 뒤덮여 있었지만 경이눈에는 엑스레이처럼 훤히 보였다.


꽃 모종을 옮기기 위해 마당 한 귀퉁이를 파헤치던 날,

“여기다 심어라. 햇빛 있는 곳에 심어야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 저편에서 울려왔다.


‘언제 다시 오게 될까.’

친정집을 떠나려니, 멀어진 거리가 더욱 체감되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경이는 엄마가 챙겨준 보따리를 들고, 대문 밖에서 집안을 한 번 돌아봤다.

‘아버지 생신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결국 그녀는 그날이 아버지 생신에 참석한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결혼 후 막내딸이 아버지 생신 자리에 함께한 건 칠순과 팔순, 단 두 번 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는 시어머니 생일날 전화 한 통 할 줄 모르냐? 너희 친정에서 그렇게 배웠냐?”


“어머니,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과는 했지만, 마음은 돌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희 친정에서 그렇게 배웠냐.’

그 말이 가슴 깊이 박혀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가기 전, 분명 양해를 구했고 생신 선물도 미리 챙겨드렸는데,

그런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셨을까.


그 말이 누구의 입을 거쳐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 경이는 알고 있었다.

그 존재는 시어머니보다 점점 더 기세가 세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 세력이 서서히 경이의 숨통을 조여왔다.


팔순상을 마주했던 아버지의 미소가 자꾸만 떠올랐다.

어릴 적, 그녀의 웃음소리만으로 방 안이 환해졌던 그 기억이 이제는 가장 먼 풍경처럼 아득했다.


지금 말없이 앉아 있는 경이에게,

‘괜찮다, 나 돈 많다’ 던 아버지의 웃음 띤 말씀이 허공에 흩날린 눈처럼 사라져 버리고,

"네 친정에서 그렇게 배웠냐"는 어머니의 말씀만 가슴을 계속 때렸다.

누구보다 크게 울고 있다는 것을, 경이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친정 부모님 두분과 시어머니의 생신이 단 일주일 안에 몰려 있다는 것을.

그러나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경이는 그 무심하고도 무정한 사람들과 함께

무언의 경계 속에 갇혀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할 남편조차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다.


-다음 편 <딸이 던진 질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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