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내린 아이

나도 이문을 나서야 하지 않을까

by 지오쌤

전날 밤, 늦은 수업을 마친 경이는 마트에 들렀다.

입구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현미는 투박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남편 거 아니야?”

고무줄처럼 튕기는 어조로 현미가 답한다.

“먹는 사람이 주인이지. 내거 네거가 어딨어”

경이가 소리 없이 웃으며 물었다.

“어디 가셨어?”


“내 화장대 정리 해준다고 소쿠리 사러갔어”

현미는 이제 남편을 ‘언니’라고 부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말 한마디, 농담 하나에, 고단한 하루가 살짝 녹아내렸다.

명절이면 항상 여행을 떠나는 현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참 너희 정말 명절에, 제사 안 지내?”


“우린 그런 거 안 해, 제사 지내다 이혼하는 것보다 낫잖아.”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그 말은 덤덤했지만, 마음 한편 부러웠고 따뜻하게 남았다.

이른 아침이다.


내일은 설날이다.

어제 밤 찬물에 불려 둔 노가리를 살폈다.

아직 덜 불었다.

생선전용 냉동 대구와 동태를 실온에 꺼내놓고,

채반에 받쳐둔 두부를 베보자기에 싸서 물기를 짰다.

당근 하나, 양파 하나, 쪽파 한 줌을 다져 볼에 담았다.

데친 배추는 소금으로 밑간을 해두었다.


아침 식사 전에 준비를 해둬야 제사 음식을 순조롭게 할 수 있다.

가족들을 깨워 허기만 면할 식사를 차렸다.


설거지를 마치면 집에 남은 누군가가 일을 거들었다.

때로는 석훈, 때로는 인서나 인후였다. 이번엔 남편이 도왔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랬다.

매년 같은 아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남편이었다.

“큰집에 빨리 가자”


늘 그랬듯, 그 한마디가 경이를 몰아세웠다.

거실엔 전 부치는 냄새가 고였고, 부엌에선 기름이 튀었다.

추위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 수 없어 공기가 눅눅했다.

머리는 띵하고, 속은 울렁거렸다.

그날도 늦도록 전을 부치고 자정 넘어 청소를 마쳤다.


새벽녘 겨우 눈을 붙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새벽 여섯 시, 전화가 줄기차게 울렸다.

동서, 주희였다.

“몇시 쯤 올 수 있어? 오는 길에 주호 좀 같이 데리고 와줘.”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주호를 데려 가려면 외곽 순환도로를 지나지 않고 서울 시내를 관통해야 했다.

강남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주호가 머무는 오피스텔 가까이 왔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주호 데려오지 말고 그냥 너희끼리만 먼저 와.”

그들이 사는 ** 뉴타운,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어디쯤이야 몇시쯤 도착할수 있어?”

명절이면 되풀이되는 ‘가족 의례'는 늘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그런데 빨간 신호 등 앞에 차가 멈추자 뒷 문이 열리고 인서가 뛰어내렸다.

“난 안 갈 거야. 이제부터 엄마, 아빠만 다니세요.”

돌아서는 인서 뒷모습은 단호했고, 단 한 치도 망설임이 없었다.


대학 3학년 딸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경이도 석훈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인서는 정말로 큰집에 가지 않았다.

엄마의 눈물, 아빠의 침묵, 그 모든 것을 오래전부터 바라보던 아이였다.

딸 인서가 오래묵은 '침묵의 장벽'을 가장 먼저 깬 것이다.

엄마보다 먼저 이 집안의 ‘질서’와 ‘순응’을 거부했다.


경이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감히 마음속으로조차, 품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나도 이 문을 나서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는 인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형에게 향하던 무조건적 충성은 조심스러운 회피로 바뀌었다.

집 안에는 조용한 시간이 길어졌다.

딸은 마치 어떤 선을 그은 것처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선 너머 세계에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아이는 마음을 굳게 닫았고, 남편은 그 변화를 무심히 지나쳤다.


며칠간 어색했지만,

석훈은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경이는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늘 ‘형’이 있었고,

남편은 자신의 삶을 기꺼이 그 테두리 안에 묶어두었다.

그 안에서 경이는 언제나 조용해야 했고,

먼저 말해서는 안 되었고, 아직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