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방패가 필요했어

방패 없는 전쟁

by 지오쌤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수가 큰돈을 가지고 집을 나갔다고 하네”

남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침착함마저 불안하게 느껴졌다.

남편과 경이는 석철의 집으로 향했다.

석철은 장롱과 화장대, 책장, 서랍을 미친 듯이 뒤지고 있었다.

쏟아진 책더미 사이, 두꺼운 양장본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로스차일드 가문 바닥에 엎어진 이 책은 어쩐지 석철의 내면을 닮아 있었다.

그는 무심한 듯 그 책을 다시 주워 책장에 똑바로 세웠다.

주희의 여권이 없다고 했다.

석철은 곧장 아들 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여전히 질서와 권위를 되찾으려는 사람처럼 덤덤했다.

“야! 너 당장 집에 들어 왓.!!”

칼날 같은 목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연거푸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집안의 냉기를 삼키고 있었다.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주호가 현관에 들어섰다.

고개는 들었지만,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주호는 집안을 빠르게 훑었다.

부엌의 찬장과 옷장, 서랍장이 활짝 열려 있고,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마치 속을 게워 낸 듯 흩어져 있었다.

담배연기를 힘껏 빨아들이고 내뱉는 석철의 눈동자는

이미 대상을 정한 듯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긋난 순간,

석철은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주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목소리는 낮았지만, 살이 떨릴 만큼 격했다.

“나를 말려 죽일 셈이야? 이것들이… 네 엄마 어딨 어?”


주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 내가 엄마를--"


주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석철의 손이 공기를 가르며 주호의 뺨을 후려쳤다.

주호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싸늘한 침묵이 집안을 감쌌다.


입술을 꾹 깨문 주호가 안경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집안의 긴장을 더 단단하게 조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제가 언제 유학 보내달라고 한 적 있어요, 예?

그런 적 있었냐고요? 저를 한 번이라도 이해해 준 적 있어요?”

항변인지 항의인지 모를 주호의 울부짖음이 거실 안에서 울렁였다.

석철의 눈빛이 아들을 태워버릴 듯 이글거렸다.

서늘한 분노와 엉킨 감정의 덩어리들이 뒤엉켰다.

주호의 두 주먹엔 젊은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왜 저한테 엄마를 찾으세요?

엄마는— 아빠랑 살았잖아요, 씨이...”


비웃음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으로 주호가 말을 뱉었다.

석철이 손을 다시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석훈이 다급히 몸을 밀어 넣었다.

“그만해 주호야. 너 지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호의 발이 거실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석훈의 발등 위로 실려 내려온 조카의 분노.

비명이 터졌고, 석훈은 그대로 나뒹굴었다.

발톱 아래 피가 맺혔다.

엄지발가락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경이는 움직이지 못했다.

몸은 부엌 쪽을 향해 있었지만,

시선은 그 자리에 오래 붙잡혀 있었다.


바닥의 피와 울음, 분노의 울림이 뒤엉킨 거실은

마치 폭풍 속 한가운데처럼 느껴졌다.

결혼 첫 번째 맞은 설날 아침이 오버랩되었다.

석훈의 일그러진 얼굴도, 주호의 뜨거운 눈동자도

그녀의 눈앞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경이의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꺾였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남편에게 등을 돌렸다.

말없이. 조용히. 완전히.


석훈의 상처 위로 스며든 피를 바라보며,

경이는 오랫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잠겼다.

누가 누구를 더 아프게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전쟁이었다.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더 많은 것을 누린 자들이

제 상처만을 앞세우며, 서로를 지워가고 있었다.


“엄마, 지아한테 갔대요”


울림통이 큰 주호의 목소리와

현관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그의 몸무게가 실린 문소리는, 집 전체를 진동시켰다.

엄마가 동생이 있는 프랑스로 떠났다는 말을 서비스하고 주호는 떠났다.


경이를 위해, 단 한 번도, 단 한 조각말도 꺼내주지 않았던 남자.

그는 형과 조카 사이에서 방패가 되어,

기꺼이 자신의 엄지발톱 하나를 희사하며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배신감과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