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울은 늘 형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발톱 하나를 기꺼이 희사하고도, 석훈은 또다시 형 걱정으로 가득했다.
“형, 괜찮을까… 밥은 먹었을까…”
석훈의 입에서는 ‘형’이라는 말이 마치 기계처럼 흘러나왔다.
매일 전화를 하고 형 이야기를 쏟아냈다.
“형- 꼭 식사하세요. 퇴근하고 갈게요. 절대 다른 생각 하면 안 돼요”
주경야독하며 준비했던 시험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형에 대한 염려가 그의 영혼을 이미 점령해 버렸다.
경이는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 일은 마치 석훈이 ‘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검증 같았다.
형, 형, 형.
고장 난 장난감처럼 튀어나오는 말은, 경이 귀엔 주문처럼 들렸다.
그는 형의 집에 반쯤 몸을 옮긴 듯, 하루는 집에서, 하루는 형 집에서 출퇴근했다.
경이는 석훈의 그 뒷모습을 볼 때마다, 말로 붙잡을 수 없는 피로가 덮쳐왔다.
배신과 허탈도 함께 밀려들었다.
‘똥개가 진돗개 걱정하는 꼴'이라더니,
석훈은 정말 진돗개 걱정을 하러 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경이는 남편 없이 보낸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인서와 인후는 초등학생이었다.
경이는 큰 냄비에 카레 한 솥을 끓였다.
“인서야 카레 데워서 밥 먹고, 인후 잘 챙겨야 해”
아이들만 남겨둔채 집을 나서면서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여름 방학이면 시어머니가 자주 입원하는 지방의 백강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남편의 세계에서만 유효했다.
그 안에서 경이의 감정은 늘 순서 밖에 있었다.
주희가 들고나간 돈은 그녀가 그 집을 위해 바친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경이와 석훈에게는 큰돈이지만, 그들에게는 잔물결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미 아버지 유산으로 수도권 집 한 채 값 이상을 손에 쥐었다.
어머니가 남긴 상가에서는 꼬박꼬박 백만 원 이상씩 월세가 들어왔다.
또 시누이들은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효를 몸소 실천했다. 매년 제사 비용이며 산소 정리비까지 분담했다.
그들의 ‘가족애’는 샤머니즘적 질서와 닮아 있었다.
석철은 대기업 출신으로 안정적인 연봉을 받는 인재였다.
IMF니 경기 불황이니 하는 말은, 능력 있는 석철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정년퇴직 후에도, 회사 관련 업계에서 일을 이어갔다.
주희는 부동산 투자로 차익을 챙기던 사람이었다.
석철은 ‘똥개 중의 상,
경이는 호구 중의 상’ 그들은 그렇게 불렸다.
자신들의 집을 담보로 그들에게 대출까지 해주었다.
평생을 ‘호의’라는 오해 속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남편은, 여전히 형 걱정이 먼저였다.
남편을 보면 말만 막히는 게 아니라, 숨도 막히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맨몸인 자신들과 큰집의 격차는 커졌다.
자식들 교육수준도, 돈도, 직업도 감히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그 집이 경이는 말할 수 없이 부러웠다
석훈은 왜 그렇게 형을 걱정하는지,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이 차올랐다.
석훈은 자기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형을 아버지처럼 모셔라”는 유언에, 인생을 건 사람처럼 보였다.
굴종과 복종이, 사랑과 효심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경이는 그 등을 바라볼 때마다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솜뭉치가 물에 잠기듯 침묵 속으로 잠겼다.
중년의 사내가 책상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뒷모습은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그건 열심히 사는 사람의 그림자이자,
필사적으로 견디는 사람 그림자였다.
하지만 경이는 그 그림자에서 위로를 찾지 못했다.
기대는 허무와 분노에 눌려 식어갔다.
그녀가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동안,
남편은 늘 자기 자리에서 삶을 이어갔다.
조용히 공부하고, 아이들을 위해 애쓰고, 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
한 때는 무해함과 둔감함이 위로였지만,
이제는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혼자서 기대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묻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은 사랑이 식는다는 말과 닮아 있었다.
삶은 선택과 해결의 연속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저울은 늘 형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왜 석훈은 스스로를 그렇게 낮추는가.
왜, 언제나 더 작아지는 쪽을 택하는가.
이 삶은 경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있지 않았다.
이 남자를 영영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제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경이는 남편의 등을 보며 말없이 이별을 연습했다.
어릴 적 욕 잘하던 큰어머니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호랭이 물어갈 놈”
순간 가슴 한쪽이 탁 트이는 듯했다.
큰어머니의 입말을 흉내 내듯, 경이는 그 말을 뱉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던 말이, 이제는 꼭 자기 말 같았다.
‘그놈도 물어가고, 나도 물어가지.
남한산성 호랭이는 다 어디 갔나,
나 하나 안 잡아가고.’
‘호담국’이라 불릴 만큼 많던 그 호랑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육당 최남선은 “호랑이 이야기를 모아 아라비안나이트를 만들 곳은
조선밖에 없다”라고 했다는데.
아직 한 마리쯤은 어디 숨어 있지 않을까.
경이의 정신은 느닷없이 숲 속 호랑이 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옛날 사람들은 호랑이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입에 분노와 체념을 담아 내뱉곤 했다.
경이도, 자신에게 누군가 ‘욕쟁이’라고 할 것 같았다.
방을 나서며 문을 닫고 주전자에 물을 올리는 시간.
아이들 옷을 개고 고요한 저녁을 견디는 시간.
어쩌면 그 모든 시간이 작별의 리허설 같았다.
호랑이에게 물려가 버리는 그런 리허설.
그 과정에서 경이는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여성해방일지 2> 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