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침묵과 허용
경이는 친정 마당에 들어서자 어린 시절 화단 앞에서 흙을 만지며 느꼈던 순수한 설렘이 문득 떠올랐다.
그 순간은 지금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의 시작이자,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던 시간이기도 했다.
세상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의 생애 가장 빛나던 시간은 한 줌 꽃씨에서 시작되었다.
친정집 마당 한쪽 작은 화단.
안방 문을 열고 나와 마루에 걸터앉으면, 화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랫집과 경계를 나누던 울타리엔 매일 아침,
나팔꽃들이 고개를 들어 해를 맞이했다.
분홍, 보라, 담홍, 하얀 꽃잎이 고요히 흔들릴 때면 마치 “잘 잤어” 하고 속삭이는 듯 했다.
해님이 이슬을 삼키면 꽃잎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해마다 식목일이면 경이는 창고 안에서 삽과 호미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 있던 흙을 손바닥으로 눌러보고
삽으로 조심스레 파내곤 했다.
가끔 꼼지락거리는 지렁이나 굼벵이를 만나면
“으악!”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지만, 금세 다시 흙을 만졌다.
곱게 핀 꽃들이 울안 곳곳을 꽃으로 치장할 걸 생각하면, 지렁이쯤은 참을 수 있었다.
콩가루처럼 바스러지는 흙 속에 아주 작은 씨앗들을 살짝 묻고,물 조루로 조심조심 물을 뿌렸다.
그때 경이는 정말로 꽃들이 말을 걸어올 것 같다고 믿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 눈을 비비며 화단 앞에 섰던 작은 소녀.
아직 어린 손으로 흙을 들춰보며,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떡잎을 찾았다.
떡잎 하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 그날,
경이는 세상에 기적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꼬물꼬물 흙을 밀어 올리며 자라는 작은 생명을 바라보며
그저 발아의 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매번 새로 배워갔다.
작은 싹들이 자라 잎이 되고 줄기가 되어
마침내 집안 구석구석에 꽃등처럼 환한 생명들을 피웠다.
울타리 아래, 대문 안팎, 마당 구석과 텃밭까지.
곳곳에 옮겨 심은 모종들은 계절을 밀어 올리듯 피어나 오래된 집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여름방학이면 봉숭아 꽃잎을 모아 손톱에 물을 들였다.
아침이면 손가락 끝에 고추장을 찍은 듯한 붉은 물이 들고 쪼글쪼글한 손끝마다 봉숭아가 스며 있었다.
함께 꽃을 키우던 친구와 모종을 나누고,
어제 핀 꽃에 대해 속삭였다.
골목집마다 매년 여름이면 비슷한 꽃들이 피었다.
봉선화, 과꽃, 채송화, 백일홍, 맨드라미는 매년 새롭게 태어나고, 국화와 청포는 마치 집안의 연장자처럼 늘 그 자리를 지켰다.
경이는 해마다 아버지 몰래 화단을 넓혀갔다.
경계석 너머로 삽날을 조심스레 세우고 발로 ‘쿡’ 한 삽을 떴다.
‘푹’—말없이 들어가는 흙도 있었고
‘탁’—돌에 부딪혀 손끝으로 진동이 전해지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흙이 순하게 갈라졌고,
어떤 날은 한 삽을 찍기 위해 숨을 고르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마당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었다.
한 삽, 또 한 삽. 파낸 자리에 벽돌을 새로 쌓았다.
어린 손으로 만든 그 작은 확장 공간에서
경이의 영혼은 이상하게도 가장 환하게 빛났다.
마루 끝에 앉은 아버지는 그녀의 ‘작전’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
무심한 척 고개를 돌리던 그 눈빛 속에,
말 없는 허락 같은 것이 잠깐 스쳤는지도 몰랐다.
경이의 하루 작업은 해가 기울 무렵에야 끝났다.
어둑해질 무렵 아버지는 부엌 귀퉁이에서
다알리아와 칸나 구근을 소쿠리에 담아 들고 오셨다.
무심한 듯 경이의 화단을 건너다 보시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승인인지, 허락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경이는 그걸 지지로 느꼈다.
아버지는 경이가 넓혀놓은 화단 경계 밖에
그의 다알리아와 칸나를 심으셨다.
그 꽃들은 집안에서 가장 화려했고
아버지는 날마다 그 꽃 앞에 잠시 멈춰 서곤 했다.
그래서 경이의 화단은 조금도 초라하지 않았다.
그 일은 매년 반복되었고,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만해라”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막내딸의 열정을 눈치채고도, 막지 않는 방식,
말없이 허용하는 사랑. 그것이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한 삽씩 화단을 넓히며, 경이는 한 뼘씩 자신의 세계를 키워갔다.
경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아이’였다.
누구도 그녀의 손끝에서 자라난 세계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도 없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그때의 경이가, 지금의 경이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래도 너에게는, 꽃처럼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잖아.”
그 기억이 없었다면, 지금의 경이는 어쩌면 훨씬 더 깊은 어둠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침묵은, 경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었다.
말 없던 그 사람은, 아이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법을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경이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그 침묵의 무게와 섬세함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세상 어떤 대접보다 따뜻하게,
경이의 영혼은 예우를 받았다고 느껴졌다.
아이의 열정과 꿈을 소리 없이 허락하는 사랑,
그것이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우울이 삶을 눌러올 때마다, 그녀는 자주 그 꽃의 시절을 소환해 냈다.
마음속에서 여전히 피어나는 그 작은 화단을, 조심스럽게 다시 들여다본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마당이 단지 햇살 아래 꽃을 피우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집 농사의 절반이었다.
봄이면 마늘을 말리고, 여름엔 보리를 털고,
가을이면 고추를 널고, 건초를 말리며,
볏가리와 짚가리를 쌓는 자리였다.
그러니 화단을 한 삽 넓히는 일조차,
아버지에게는 결코 가벼운 허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이는 봄이면 삽을 들었다.
화단은 해마다 조금씩 넓어졌고,
아버지는 마루 끝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셨다.
돌아보면, 그 꽃밭은 경이 인생의 첫 번째 ‘자율’이었고,
아버지의 허용은 그녀 삶의 가장 조용한 지지였다.
화단이 넓어질수록, 아버지의 마당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경이를 응원하는 방식이었다.
말 없는 양보, 침묵 속의 승인.
경이는 아이를 키우며,
자기 삶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게가 곧 사랑이었다는 것도.
아버지의 침묵은 경이 에게 가장 따뜻한 방식의 사랑이었다.
지식보다 값지고, 말로 전해지지 않았던 사랑.
‘내 영혼이 끝내 견딜 수 있었던 건
단 한 사람, 화단을 허락해 준 아버지의 침묵 덕분이었다.’
침묵은 결혼 후에도 경이 삶의 방식이 되었고,
허용은 그녀 삶을 지탱해온 가장 오래된 뿌리였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창작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 직접적 관련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