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으로는 부족했다, 돌봄에도 돈이 필요했다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김현철 작가

by 이윤지

학생 시절에는 “성적이 인생을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돈이 삶의 기준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도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30대가 되고,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고, (나의 부모와 자녀를 동시에) 돌봄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면서 돈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이전과는 다르게 느끼게 되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식만 보아도 그렇다. 손을 잡아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드리는 일은 분명 소중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이를 먹을수록 실감한다. 병원비와 생활비, 여행과 용돈처럼 더욱 현실적인 지원이 동반될 때 효도는 지속 가능해진다. 자녀에게도 마찬가지다. 품에 안고 애정을 표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과 치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


환우회 활동 역시 나의 세계관을 바꾼 계기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친목 모임 정도로 생각했다. 모임이 있으면 다과 비용을 나누고, 장소도 적당한 금액대에서 정하면 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임원으로 활동하며 거의 모든 결정과 활동이 ‘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행사 하나, 정보 전달 하나, 제도 개선을 위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재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동안의 나는 너무 순진했다. 돌봄, 복지, 정책, 그리고 ‘돈’은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라 같은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은 바로 그때쯤 만난 책이다.


저자 김현철 교수의 이력은 독특하다. 의사로서 진료실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더 많이 아프고, 더 쉽게 무너지는 현실을 목격한 뒤, 그 원인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 구조에 있음을 깨닫고 경제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의사와 경제학자라는 두 정체성이 겹친 시선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삶 전반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본문이 더욱 설득력 있게 읽혔다.


의료인의 관점으로 읽으며 떠오른 장면들이 있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치료비 부담이 커지자 가족들이 고령의 환자를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여러 번 보았다. 희귀질환을 앓던 소아 환자가 고가의 비급여 치료를 몇 차례 받다가, 결국 보호자가 치료를 중단하기로 선택했던 기억도 있다. 몇 달간 의식이 회복되지 않던 아이의 병실에, 감정적으로 무너진 보호자가 찾아오던 장면 역시 잊히지 않는다. 윤리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선택 뒤에 놓인 절망과 무력감을 아주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반대로 의료원 병동에서 근무할 때는 기초생활수급자 환자들이 제도 안에서 보장받는 의료 서비스를 너무나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이 상반된 경험들은, 의료 현장에서 돈은 단순한 조건이 아니라, 치료의 지속 여부와 선택의 범위를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희귀질환 환아 보호자의 관점으로 읽었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주원이, 주호가 앓고 있는 희귀질환인 당원병은 아직 치료제나 수술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식이요법을 통해 아이들의 삶을 가능한 한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뿐이다. 국내 환자 수는 약 200명 남짓으로 매우 적고, 이 질환을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의사는 사실상 한 명뿐이다. 개인의 헌신만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다른 의료진의 관심도, 제약회사의 투자도, 정부의 관심도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치료제를 개발해도 환자 수가 적어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시장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일지 모르지만, 보호자의 자리에서는 너무도 잔인하다. 아이의 삶의 가능성이 질병의 중증도가 아니라 ‘시장 규모’로 판단되는 현실 앞에서, 나는 돈이 개인의 치료 선택을 넘어 연구와 희망의 범위까지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지난 정부까지만 해도 희귀질환 분야에 무척 냉정했는데, 감사하게도 이번 정부에서는 희귀질환 분야에 관심을 두니 조금은 희망을 품어본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들은 임신과 출산, 영·유아기의 환경, 부모의 육아 참여, 학창 시절의 또래 관계, 직장 생활과 실직, 황혼 육아와 노인 요양,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제도, 기초생활 보장제도, 안심 소득과 기본 소득, 의료비 보장성 강화 정책, 공공 의대 논의, 노동 인센티브, 주 4일제, 양성평등 정책, 코로나19 정책의 피해까지, 삶의 전체를 가로지른다. 인상적인 점은 이 모든 이야기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책과 선택이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가?”


저자는 돌봄을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바라본다. 초기 생애에 대한 개입, 부모의 돌봄 시간을 보장하는 제도, 실직과 질병 같은 위기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단기적으로는 부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건강과 생산성, 그리고 존엄을 지키는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라는 그의 주장은 의료 현장에서 느껴온 직관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 책이 위로에만 머물지 않고, 효과 없었던 정책은 효과 없었다고 분명히 말하는 점 역시 인상 깊었다. 그래서 어떤 장면에서는 무겁게 읽히지만, 방향성을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오히려 조심스러운 희망이 느껴진다. 이 책은 경제학이 차갑고 숫자 중심의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이 책에서의 경제학은 누가 가장 취약해지는지, 언제 개입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삶을 지탱하는지를 묻는 언어다. 의료가 질병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보아야 하듯, 경제 역시 인간의 생애와 돌봄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책을 덮으며 돌봄은 개인의 희생으로 버텨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설계해야 할 영역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돈은 무섭다. 그러나 그 무서움을 외면하지 않고 구조의 언어로 마주할 때, 비로소 바꿀 가능성도 함께 보인다는 사실을 이 책은 조용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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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저렴한 비용으로 돌봄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129p


파격적인 정책을 도입하려면 먼저 우리 실정에 맞게 각론을 세심하게 설계하고, 사회 실험을 통해 그 효과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내놓고 판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책은 의료 시술처럼 이루어져야 합니다. 엄밀한 연구로 정확하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사가 질병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의학적 근거에 따라 처방 및 치료하는 과정 같은 정책이 사람을 살리는 진짜 정책입니다. 161p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경증 질환 치료를 저렴하게 하는 정책은 필요성이 낮지만 선거 기간 표심에 영향을 줍니다. 반면 소수의 사람이 혜택을 보고 목돈이 드는, 중증 질환 치료비를 줄여주는 정책은 꼭 필요하지만, 득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죠. 그 탓에 건강보험이 가장 아픈 사람을 충분히 보호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정책 입안자와 국민의 분별력 있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184p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