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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지 Mar 14. 2024

경멸하는 그녀가 있어 다행이다

증오의 장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인생은 뭐라던가 사람은 어떻다던가 하는, 단정 짓는 말들을 하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어떤 망령이 나타나 가로막는 겁니다. 그 망령은 내가 아주아주 싫어하는 여자로, 증오, 혐오, 경멸 등 온갖 나쁜 말을 갖다 붙이게 되는 사람입니다. 문득 그녀가 떠오르면 누워있다가도 몸이 절로 벌떡 일으켜집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마음으로 온갖 저주를 퍼붓죠. 악마 같은 그녀로 인해 저는 그녀보다 더한 악마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악질적인 내가 세상에 뭔 말을 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저는 그녀를 미워하느라 한 두 해를 송장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하는 일 없이 그녀를 싫어하다가, 누군갈 싫어한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부끄러워하다가 날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든 그녀를 다시 미워했습니다. 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며 제발 잘 살지 못하기를 빌고 빌었죠.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해소되지 않은 증오는 여전히 악취를 풍기며 내 속을 썩이고 있습니다.


그녀를 그토록 미워하기 전까지 저는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누군갈 미워하는 일은 자기를 해하는 일이라고 누군가에게 충고한 일도 있었죠. 그런데 직접 증오와 혐오와 경멸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보니, 그 감정이란 게 그게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녀를 온 마음을 다해 미워하고 나서야 내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했던 말들이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 그토록 증오할 수 있는 그녀가 있어 참 다행입니다. 인생이란 어떻다는 둥 말을 하고 싶다가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멈칫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실언을 하고 살았을지, 그것만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그녀를 향한 이 묵은 미움, 미워하는 마음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들은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곧 출간될 책에 수록되는데요. 이 그림은 그 이야기와 함께 담길 삽화입니다.

살아가는 일이 끝난 후, 나의 지난 삶이 전시된 방을 상상해 봅니다. 그 방은 내가 만난 인간들의 초상화로 채워져 있을 거 같습니다. 어떤 초상화는 뒤집혀 있을 테죠. 다신 되돌려 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꿈쩍도 않을 뒤집힌 액자일 겁니다. 주인공은 초상화로 둘러싸인 방에서 다음 방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문지기가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뒤집혀 있는 액자를 되돌려 놓으라고 말하죠. 주인공은 액자를 되돌려 놓지 못하고 액자 뒷면에 그 사람의 뒷모습을 그리면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야기를 그렇게 지었지만 그녀의 뒷모습을 그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릴 수 있는 건 입체적인 액자였습니다. 그녀가 단순히 나쁜 x이 아니라, 다면적인 입체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온 에너지를 다해 증오한 그녀 덕에 ‘인간을 미워하지 말고 그의 이면을 마주하고 그를 품고 이해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니, 그녀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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