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지 Mar 18. 2024

해서 뭐 해. 쓰는 일 말고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너무 익숙해서 별 다르게 의식되지도 않았는 생각의 습관.

‘해서 뭐 해.’


예고 다닐 때부터 조소를 전공했고 대학에서 조소와 함께 철학, 미술사를 복수전공으로 이수했습니다. 누군가는 취업 안 되고 돈 안 되는 것들만 공부하냐고 했지만 당시엔 그에 관해선 아무런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냥 나 하고픈대로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 그리고 만들고 생각하고 쓰는 일들을 하며 삶의 뿌리를 다졌지요. 가장 편협하면서도 순수했던 그 시절 예술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뭔가를 표현하려 하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그런 생각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구상하고 창작하는 ’작업‘만이 내 인생의 의미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종교처럼 말이죠.


종교가 된 이 생각은 제 삶에 뿌리 박혀 빼내려 해도 잘 빠지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일이 다 하기 싫고 시간 낭비 같고 귀찮은 겁니다. 백만 원짜리 상품권이 있어서 아웃렛에 쇼핑을 갈 수 있다 한들 그게 왜 그렇게 짐처럼 느껴지는지,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휴양지로 해외여행을 갈까 싶다가도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시간적 체력적으로 소모가 심할 거 같다 싶은 건 왠지 꺼려지는 거죠. 체력이 떨어져서 슬슬 운동을 해야 하나 싶지만 그 마저도 시간이 아까워요. 하물며 쇼핑과 여행, 운동이 그러한데 요리해 먹고 치우고 하는 등 집안일들에 대해선 그런 감정이 얼마나 더 심하게 올라올지 예상이 되시겠죠.


작업에 도움이 되는 경험들 외에 모든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일상을 갉아먹습니다. 충분히 소소하게 행복할 수 있는 순간에도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하거든요.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선 안 될 거 같다는 강박에 뭘 쓰거나 그리거나 혹은 기획을 하면 좋을지 스스로를 다그치곤 합니다. 정신은 저 너머에 가 있는 거죠. 매 순간 그러니 곁에 있는 가족들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겁니다. 자신의 모습이 맺히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를 마주할 테니까요.


생필품을 채우고, 고장 난 물건들을 고치고, 먹고 치우고, 이불을 빨고, 먼지를 털고, 사람을 만나 해야 할 이야기들을 나누며 살아가는 그 순간들을 오롯이 살아야겠다고 다시금 생각한 건 아이의 걱정 어린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으며 묻는 말에 대답도 해주고 있는데 아이가 제게 무슨 고민이 있냐고, 슬픈 일이 있냐고 묻는 겁니다. 그 순간 아이가 다 알고 있었구나, 깨달았습니다. 사실 나의 가족들, 나의 살림들, 나의 물건들, 나의 여행들, 아니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모를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너무 익숙해서 의식하지도 못했던 생각의 습관을 돌아봅니다. 저는 어떤 연유로 작업 외에 모든 걸 무의미하게 여기며 창작하는 일 만을 중요성의 꼭대기 위에 올려놓은 걸까요?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대단한 작업물을 내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생각해 보면 자아실현을 시켜주는 작업마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만든 창작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고, 그게 대대로 이어질 업적이 된다 한들 내가 죽고 나면 그걸로 끝일 테니까요.



이 글에 뚜렷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냥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왜 모든 걸 허무하게 느끼며 책상에 앉아 내 정신 속에서 부유하며 살고 싶어 하는가.

사실 이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닌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