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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지 Mar 19. 2024

피 쏟기 전, 글쓰기 마음가짐

삐질 것인가, 글 쓸 것인가

저는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쩐지 자꾸만 섭섭하고 서운하고 그러다 완전히 삐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 내가 왜 이러지, 싶어 생리 어플을 열면 어김없이 생리 시작을 며칠 앞두고 있다고 나옵니다. 그럼 그렇지. 그간의 이상한 망상과 그릇된 판단이 이해가 가지만,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삐지고 싶은 이 마음을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는 거지요.  


30대가 되어서야 생리 며칠 전부터 생리를 시작할 때까지 내가 아닌 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 사실을 모를 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을 어찌할 바 몰랐습니다. 감히(?) 호르몬 따위가 나라는 인간을 좌지우지한다니,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더랬죠.

 

여성이라면 많이들 느끼실 생리전증후군은 사람마다 다른데, 저의 경우 이렇습니다. 생리 시작하기 5~7일 전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한 느낌이 자욱하게 깔립니다. 바닥에서부터 조금씩 차오르다 마침내 외로움이 살갗으로 느껴집니다. 현실과 다른 기압이 통하는 세계에 홀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랄까요. 발 딛는 물질세계와 가슴과 머리로 이어진 정신세계의 연결이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랍니다. 실제 세계는 별다를 일 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머릿속은 너무 가벼이 휙휙 또는 지독히 묵직하게 느그적느그적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희망차게 열심히 해왔던 일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피를 쏟아내기 전, 폭풍전야의 불안과 고독, 그 춥고 스산한 기분을 옆에 끼고 책상에 앉을 수 있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진 누군가에게 삐지고야 말고 엄한 소리를 할까봐 스스로를 감시하는 데 애를 썼죠. 일단 걸쩍찌근하고 뜨끈한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곧바로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곤 했으니까요. 그렇게 생리에 시달리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생리 전 기분을 활용하는 경지 아닌 경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충 이렇게 자기 암시를 하는 겁니다.


이 멜랑꼴리한 기분은 내 마음을 다른 세상으로 끌고 가는 마법의 흔적이다.

불안해하다 삐지거나 삐질까봐 불안해하지 말고,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이 순간에 빠져 있어 보자.


불안과 고독, 그리고 괴로움은 창작의 재료가 됩니다. 삶과 죽음의 아득함 속에서 허우적대며 나란 존재의 유일성을 다시금 떠올려야 뭔가가 나옵니다. 너무 예민해서 살짝만 툭 쳐도, 왈칵 넘쳐흐르는 것을 넘어서 폭풍과 파도가 휘몰아쳐 온갖 잔해물이 뒤엉켜버릴 거 같은 바로 그때 써야, 어떤 창작의 정수가 흘러나올 것 같다는 겁니다.


by leehyunju


맞습니다. 제가 지금 그래요. 어플에 이틀 뒤 생리예정이라고 뜹니다.

아랫배가 싸르르 아픈 거 보니 이제 시작할 거 같은데 안 하는 이 짜증 나는 며칠, 엄한 사람에게 삐지지 않고 글 쓰는 데 이용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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