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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지 May 24. 2024

우리 서로의 책은 읽지 말자

읽고 싶은 마음과 잃고 싶지 않은 마음

가족은 가까운 사이지만, 아니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고 하죠. 어쩐지 가족에게 내 속내를 말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뭘 그런 걸 얘기하나 싶기도 한 겁니다. 내 안에 있는 나는 가족 안에 있는 나와는 다릅니다. 가족 안에선 그냥 ‘영 별로인 나’가 실오라기 하나 제대로 걸치지 않고 널브러져 있는 거 같아요. 그런 내가 멀끔하게 생각이란 것도 하고, 아주 적당한 사회적 스킬을 부리는 걸 가족이 본다고 생각하면 너무 민망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과 남편의 무관심을 바라고 그 무심함을 좋아합니다. 가족이 나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고 내 삶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벌거벗은 인간으로만 봐주는 게 저를 안심시킵니다. 난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 특별한 사람이 되든 말든 그냥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은 거죠.


최근 아빠가 책을 냈습니다. (아버지라고 써야 할 거 같지만 아버지란 말을 한 번도 써본 적 없기에 아빠라고 씁니다) 책상에 앉아 수십 년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어디에 글이 발표한 적은 없던 아빠가 시집을 낸 겁니다. 그러니 우리 가족에게 아빠의 시집 출간이 얼마나 경이롭고 축하할 일일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저는 책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두어 장 쓱 읽고는 자동차 조수석에 며칠을 그냥 두었어요.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제 기분을 살펴보다 시를 한편 두 편… 읽고는 깨닫게 되었죠. 저는 시집에서 아빠가 아닌 이강문이란 사람을 보게 될까 봐, 그래서 아빠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겁니다. 아빠가 아닌 이강문의 이야기에서 내 안의 무언가를 마주할까 봐 두려웠던 겁니다. 그러니까 가족은 가족으로서만 있어야 하고, 내가 믿어온 삶의 다른 면들을 보고 싶지 않다는 저의 갇힌 생각들이 두려움의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는데, 그 시절은 제게도 좀 상처였던 시간입니다. 그날들에 관한 시에 저는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을 버렸습니다.



 <빈집의 기억>


밖으로 문을 잠갔네

기다리는 두 아이들의 손과 발에 자물쇠를 달았네

아무도 없는 빈집이 되라고

엄마 아빠 돈 벌러 나간 사이

엄마 아빠만이 빈집의 유일한 열쇠가 되었네

수상한 밖이 안전한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사랑스러운 안이 위험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성냥불에 재가 된 몸으로

안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네

불타는 안에서 불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네

안과 밖, 불타는 빈집에 갇혀 어디로도 나갈 수 없었네


밖은 이십 년 삼십 년 화르르 번성해서

잿더미가 된 안쪽을 지키고 있네

바닷가 물거품이 된 안쪽을 지키고 있네

안에서 기다리다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새카맣게 탄 엄마 아빠의 가슴 나오지 못하도록

밖은 견고한 자물쇠가 되어

화창한 안전한 밖을 지키고 섰네


흉흉한 소문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기억을 날카로운 흉기로 만들어

텅 빈 사람들이 사는 빈집을

너도나도 지키고 섰네


-이강문 <너머의 너머> 2024, 삶창


가족이란 관계의 철창을 걷어내고 한 인간이라는 책을 펼쳐보아야겠습니다. 불편하고 두렵고 난감한 감정을 극복해서 가족이라도 서로의 책을, 삶을, 존재성을 잃지 말고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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