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인간> ‘물속 인간’ 작가 해설
최근 발간된 책 <주머니 인간>은 우화집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힙니다. 실제 책을 읽은 지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해한 리뷰를 듣기도 했죠. 독서는 읽는 사람과 책의 관계이기 때문에 어떤 해석이든 다 옳을 겁니다. 다만 지은이가 어떤 생각과 의도, 혹은 어디서 영감을 받아 쓴 건지 궁금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 나름대로 <주머니 인간>에 대한 해설 아닌 해설을 적어볼까 합니다.
요즘 저는 미디어에 매몰되어 포털 메인에 뜬 뉴스를 보고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에 추천으로 뜬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과거 저널리즘스쿨에 다닐 땐 비판적으로 미디어를 읽는 훈련을 받았으나, 학교를 졸업하고 수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보이는 대로, 주어진 대로 보고 듣고 읽습니다. 그리고 크게 착각을 하죠. 내가 나의 자유의지로 뉴스나 콘텐츠를 접하고 판단하고 사회를,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언론사에서 기업 비판 기사를 쓰면 해당 기업은 그 매체에 광고를 싣지 않는 식으로 언론을 통제합니다. 정부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방송사는 정부 지원금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그게 정책 홍보 프로그램이었다는 걸 시청자는 알기 어렵습니다. 대형 포털 메인에 어떤 뉴스를 배치하느냐, 이건 일반 시민들의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기사처럼 보이는 광고는 언론사의 큰 수입원 중 하나이지만, 구독자는 기사인 줄만 아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쓴 것이 <주머니 인간>에 수록된 ‘물속 인간‘입니다. 이야기에는 물속에 잠긴 인간들이 나옵니다.
깊고 깊은 물속에 잠긴 인간들이 살았다. 잠긴 인간들은 자신들이 공간空間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 비어 있는 곳에서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자유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자신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현실은 물로 가득 찬 수족관이었다. 수족관은 관리 대상이었다. 물 밖에서 투여하는 K는 그들이 사는 공간의 점성뿐 아니라 잠긴 인간들 내부에도 스며들어 몸과 정신의 농도를 바꾸었다. 잠긴 인간들은 신체와 정신이 질겨지는 것을 삶의 이치라 생각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것이며 철이 드는 것이고 비로소 세월의 흐름을 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끈적해지고 질겨지다 마침내 멈추는 것이 그들에겐 당연한 삶의 과정이었다.
<주머니 인간>, 이현지, 달아실출판사
관리 대상으로 지내다 보면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고, 느끼라는 대로 느끼게 됩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는 믿음이 굳어지죠. ‘물속 인간’에는 별종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K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별종들은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물밖의 세계를 보고서도 물속으로 돌아와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합니다. 물밖 세계에 대해 잠긴 인간들에게 아무리 알려봤자, K가 스며든 이들에게 그곳은 닿을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별종들은 그저 간간히 물밖으로 나가 허공에 대고 질문을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는 거죠? 도대체 이 이야기는 누가 쓴 거고,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 누구야? 이봐요? 이봐요?“
물밖에서 수족관을 관리하는 자들은 별종들의 질문에 두려움을 떱니다. 그리고 K를 쏟아붓는 결정을 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야기는 그렇지만 실제 세상엔 제대로 된 별종들도 있죠. 작년 10월 창간된 미디어감시 전문 매체가 ‘뉴스 어디’ 같은 곳도 있습니다. K의 약빨이 도무지 먹히지 않는 1인 독립언론입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K를 투여하는지 잠긴 인간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죠. 저야 “똑똑히 바깥을 보았지만 돌아와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잠긴 세상에서 잠자코 죽어가는 척“ 살지만 그렇지 않는 별종들도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노트에 쓰인 몇 문장 납깁니다.
우리 사회에 투여된 K를 생각했다.
침습해 들어오는 K가 나를 어떻게 통제하는가 생각했다. 그리고 상상하는 거다.
어떻게 하면 물 밖으로 튀어 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