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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지 Jun 17. 2024

이건 근원에 관한 질문

나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략 15년 전 20대 초반에 들었던 놀라운 소식.

동창에게 동성의 애인이 생겼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친구는 이성에게 인기도 많고 이성과 연애를 활발히 하던 친구였기에 무척 놀랐었죠. 당시 저는  대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탈주의 철학, 사디즘 뭐 그런 걸 배우면서 내가 굳게 믿어온 틀에 반기를 들고 하나하나 부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성애만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죠. 그렇지만 저 자신을 아주 당연히 여자로 인식하고 남자와 연애 감정을 갖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자만을 에로스적으로 사랑하는가?


긴가민가했습니다. 동성애를 1도, 이성애를 2라고 했을 때, 1도와 2도 사이의 셀 수 없이 많은 온도 중 1.5도를 조금 넘은 수준일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성애자다라고 말하기엔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죠. 성별과 관계없이 어떠한 인간을 지성적으로 또 성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느껴졌습니다. 물론 저는 어떤 동화적, 신성적 사랑을 믿지 않고 인간은 필요에 의해 사랑을 배분한다고 믿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그게 어떤 사이든 한발 떨어져 나와 관계를 바라보는 편이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성정체성’이나 ‘성지향성’ 같은 개념을 떠올리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성을 지향하든 어떤 성으로 자기를 인식하든, 그런 관념의 기반은 나를 나의 신체로 자각하는 것인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몸’인가?
내가 몸이라면, 나의 몸 어디까지가 나인 걸까?


어느 날 칼질을 하다 손가락을 베어 살점이 떨어져 나간 적이 있습니다. 나의 일부가 잘려나갔지만 그때까진 그럼에도 나는 나입니다. 그럼 어디까지 잘라져 나가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걸까요? 상상 실험을 합니다. 손발 말단부위에서 시작해 팔다리까지 자르고, 허벅지 넘어 생식부위까지 자릅니다. 이런저런 의료 장치를 달고 엉덩이 위의 상체만 남겨둡시다. 그래도 나는 나입니다.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머리만 살려놓는다 칩시다. 그래도 나는 나입니다. 뇌에서 발생하는 내가 나라는 인식은 ‘기억’에 기반을 둡니다. 기억이 몽땅 지워진 기억상실자가 돼도, 매 순간 기억을 잃는 치매 환자가 돼도 나는 나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일까요? 몸도 뇌의 전기신호도 아닌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동양철학자 한자경 교수는 그의 저서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인은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 안에 갇혀, ‘알려진 것’은 알지만 ‘아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기모순을 안고 산다. 우주 만물을 모두 알되 그것을 아는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20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에셔의 <그림 그리는 손>을 보여줍니다. 화가는 자기 자신을 그려놓고, 자신을 그리고 또 그려지면서 그걸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화가 자신은 그림 밖에 있는데도요.

에셔 <그림 그리는 손>

아, 이해하기 난해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보죠. 한자경 교수는 불교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세상을 대상화하면서 나와 너, 이것과 저것, 옳은 것과 그른 것 등,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을 지적하는데요. 우리 자신 역시 우리가 그려내고 인식하는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짚으면서, 그려지고 인식되고 분별된 ‘알려진 것’들을 넘어서 나라는 ‘아는 자’를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같은 책에서 나온 다른 구절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표층에만 머무르는 의식은 옷은 보되 옷 입은 사람은 보지 못하고, 말은 듣되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의식이다. 사람 없는 옷, 화자 없는 말, 얼굴 없는 가면, 영혼 없는 몸이 거리를 배회하며 발신자도 수신자도 알 수 없는 무수한 정보가 세상을 떠돈다.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다> 한자경


성소수자, 퀴어, 성지향성, 성정체성 이런 용어들엔 정치적, 종교적 함의가 들어 있죠.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런 분별과 판단을 넘어서서, 몸, 성, 지향, 정체성 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개념, 관념, 분별, 용어들은 뭘까, 아니 그걸 넘어선 나라는 것은 뭘까?


얼마 전 출간한 책 <주머니 인간>에 수록된 ‘새 인간’이 이런 사유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일부는 이렇습니다.


새인간들은 본래 날개였다. 날개들은 무언가의 날개로서가 아니라 몸 없이 스스로 오롯하게 존재했다. 날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인 그들은 그저 날 뿐이었다. 살아 있음이 아니라 날고 있음으로 존재하는 ‘낢’ 그 자체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살아 있지 않았던 날개들이 형상을 쫓기 시작했다. 날개들은 스스로 몸을 만들 수 없었으므로 몸이 되어줄 형상을 찾았다. 그리하여 날개들은 자신만의 새장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 (중략)

죽음 이후 새인간들은 새장을 버리고 몸 없이 날았다. 날개들은 그제야 새장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스스로 삶이라는 감옥에 들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이 한낱 새장이 아니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새인간들은 날개가 되어 낢 그 자체가 되었고, 모든 금기와 경계, 한계, 차별과 처벌은 낢의 세계로 흩어졌다.

<주머니 인간> 이현지, 2024, 달아실출판사

<주머니 인간> ‘새인간’ 이현지


사실 나는 무언가의 날개가 아니라 ‘낢’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낢’을 버리고 스스로 새장에 들어가 자신을 가두어 ‘삶’을 얻고선 무수한 차별과 금지를 만들어내 그 짜릿한 맛을 즐기는, 그런 존재인 거죠.


화가가 그려진 자기를, 자기를 그리는 자기를 자신으로 인식하듯, 그림 안에 갇혀서 말입니다.


아무튼 다시 다시 묻고 싶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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