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고마우신 어머님
“아가, 쌀뜨물 좀 받아라.” 저녁 식사 준비하면서 어머님이 나에게 미션을 주셨다. 쌀바가지를 들고 멀뚱멀뚱 서 있던 나에게 “안 해 봤구나” 라시며 시범을 보여 주셨다. 쌀뜨물이 뭔지 또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던 나는 몹시 당황했다. “아가, 저기 통에 보쌈 삶은 거 있으니 썰어서 내오너라.” “네.” 그거쯤이야 하고 당당히 팔을 걷어붙이고 어머니가 해오신 음식 보따리 속에서 찾아 먹음직스럽게 한 접시 썰어서 내갔다. 식탁 앞에 둘러앉아 내가 가져다 놓은 접시 위의 보쌈을 보고 식구들은 모두 대굴대굴 굴렀다. 기름 덩어리를 다 잘라 내고 퍽퍽한 살코기로만 한 접시였던 것. 시어머니의 빠른 대처로 식구들은 살코기와 기름을 붙여 성형한 보쌈을 먹으면서도 누구도 뭐라 안 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날 이후였을까 아니면 더 크고 작은 실수 이후였을까, 나는 온갖 종류의 음식 재료를 받기 시작했다. 냄비에 넣고 불만 켜면 되는 요즘의 밀키트 방식이다. 얼려서도 오고 실온으로도 오고, 시대를 앞질러 갔다. 손맛이 좋은 어머니는 김치도 매번 보내셨는데 아버님 돌아가시던 2009년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나에게는 시누이 둘과 시동생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 깍듯이 대하고 매우 친하게 지낸다. 큰 시누이는 나랑 동갑이라 말도 잘 통하고 술자리도 더 자주 한다. 그들 부부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여 내가 결혼할 당시 그들은 이미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결혼 선배티를 안 냈다. 한 번은 새로 들어온 올케 험담을 하려고 하니 시어머님이 ‘그런 소리 하려면 친정 오지 마라 ‘라며 입막음을 하여 뒷수다도 못 했다며 시누이는 나에게 귀여운 투정을 버렸다. 그리고 시어머니께서는 장남 내외는 부모 대신이라며 집안의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주셨다. 그래서인지 동생들은 우리에게 무조건적 지지를 보냈고 나는 옆에서 덩달아 그 권한을 누리게 되었다. 시아버님은 심지어 나를 살짝 부르시더니 ’ 너는 네가 원하는 종교 생활해도 괜찮다 ‘라고 말하셨다. 당시 원불교 여수교당도 앞장서서 세우셨고 교인으로 최고 위치까지 오르셨는데 이타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시어머니가 우리 부부에게 포교를 매우 열심히 하셨다는 것도, 나의 친정이 대대로 천주교 집안인 것도 시아버님은 익히 알고 계셨다.
시어머니와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다. 시이모부와 친정아버지의 친분으로 마련한 거절할 수 없었던 맞선 자리, 시어머님과 시이모님, 친정엄마 그리고 남자와 나, 총 5명이 모인 식사 자리였다. 별로 상쾌하지 않은 거북한 자리에서 시이모님이 주로 말씀하셨고 그날의 ’ 호스트‘를 자청하여 어색하고 딱딱했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 가주셨다. 초면 이어서 서로 덕담만 오고 갔고 말수가 적은 친정엄마와 나는 여러 마디 안 했다. 그 만남 이후 서로 코드가 잘 맞아 시어머님과 나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내가 앉을 때 방석을 밟지 않고 얌전히 앉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하시는데 첫 만남부터 허투루 보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들 하나 보다. 시어머니는 자타공인 미인이시다. 영화배우 최은희를 많이 닮으셨다. 미인이신 데다 치장하기를 좋아하셔서 늘 멋스럽고 아름답고 우아했다. 말씀도 품위 있게 하시고 교양도 있으시고 한마디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날부터 시어머니는 나에게 따뜻하게 대하셨다. 시어머니의 친정이 소시지 사업을 해서 특히 어렵지 않게 자라셨는데 전남 광주의 명망 있는 유지댁에 시집을 갔지만 시집살이를 지독히 하셨다며 넋두리를 자주 하셨다. 시집살이는 대물림한다고들 하던데 나한테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결혼 준비할 때도 시어머니와 같이 다녔는데 불편함보다 오히려 즐겁고 재미있었다. 판매원들이 모두 딸인 줄로 착각했었다. 대부분은 친정엄마랑 같이 다니며 준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이제 곧 며느리를 본다. 난 ’ 아가‘ 대신 이름을 부른다 ’ 이랑아‘라고. 우리의 첫 만남은 카페나 음식점이 아닌 집 앞 주차장이었다. ’ 엄마, 나 접촉 사고 났어 ‘. 깜짝 놀라 뛰어 내려갔다. 아파트 앞에 주차하려는데 어두운 코너에서 사람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단다. 경찰서에 가서 사고 처리를 하고 나서야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아들의 여자 친구가 보였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어색한 가벼운 인사를 나눴고 정식 인사는 다음에 천천히 하자, 얼마나 놀랐겠냐며 다 잘 끝났으니 어서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라고 둘을 보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 그 후 가끔 만나 그날의 의도치 않았던 깜짝 만남을 추억 삼아 이야기한다. 첫 만남이 중요한데 허둥지둥하던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보내주신 음식들을 생각하면 며느리에게 그 어떤 음식도 보낼 자신이 없다. 밥상에서 정 난다고 하는데 보내줄 음식도 없고 요즘은 다들 맞벌이 시대에 서로 바쁘다 보니 한 번 모여 밥 한 끼 먹기도 힘들다. 게다가 다이어트들을 어찌나 심하게 하는지 밥 한번 먹자고 하기도 미안하다. 예전 우리 때는 부모님과 같이 결혼 준비도 했고 살림 준비도 했는데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모든 게 인터넷으로 가능해서인지 요즘 신랑 신부가 알아서 잘한다. 결혼식도 간소화되어 주례도 폐백도 생략한다. 6년 전 딸 결혼식에서는 주례사 대신 친정엄마의 축하 인사가 있었다. 당혹스러웠지만 요구하니 시키는 대로 했다. 이번 결혼식에는 또 어떤 이벤트가 숨어 있을지.
시어머니와 유일한 언쟁이 있었다. 이야기 끝에 ’ 장남 술버릇 좀 고쳐주세요. 어머니 말씀은 다 잘 듣는 효자 아들이잖아요 ‘ 했더니 ’ 니들 일은 니들이 알아서 해라 ‘라고 단호히 말씀하셔서 몹시 서운했고 언쟁을 좀 했다. 아마 어머님도 여러 번 잔소리를 하셨어도 소용없어지자 포기하신 것은 아닌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의 지나친 투정은 아니었을까 싶다. “어머님, 그날 제가 좀 무례하게 말씀드린 것 용서 바랍니다.”
시어머님은 30대부터 앓아 오시던 당뇨로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는 청력도 시력도 급격히 나빠지셔서 자력으로 외출이 불편하고 어려웠지만 잘 견디며 생활하셨다. 주변 친구분들을 하나둘 떠나보내시곤 그나마 하시던 나들이가 줄어들었다. 나와 나들이하며 식사하는 것이 무척 즐겁다며 고마워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못 한 것이 목이 메게 죄송스럽다. 나와는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다. 그냥 말씀을 들어 들이기만 하면 될 것을,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걸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카페에 가서 색다른 커피나 처음 나온 디저트를 사드리면 ’네 덕에 이런 것도 맛보는구나 참 맛있다 고맙다 ‘. 내비게이션을 켜고 따라 처음 가는 길도 한 번에 알아서 가니까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도 시어머님은 무조건 ’ 너는 어찌 길도 잘 알아서 그리 척척 가니 ‘ 라며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추켜세우셨다.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했다. 원망하지도 않는 했다. 그저 묵묵히 격려할 뿐이라 했다. 어머님, 이제 와서 생각하니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합니다.
무조건 내 편 이셨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50대 초반이었고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만 60세였다.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어머님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단 며칠 만의 일이라 아무런 준비도 끝맺음도 없이 훌쩍 가버리셔서 잘 못 한 것들만 생각나고 죄송한 마음만 남는다. 마지막 가시는 염하는 모습도 두려움이 앞서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뒤늦게 이럴걸 저럴걸 하는 것은 하나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모두가 똑같이 하는 말 아닌가, 있을 때 잘하라고. 왜 이같이 매번 후회만 하고 있는 것인지.
’ 넌 집에만 있기엔 아깝다’,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만 낳고 네 삶을 즐기며 살거라’, ‘너는 남편한테 인정받아 참 좋겠다’ 라시며 기를 살려 주셨는데 나는 고마움에 부응도 못 하고 지금 후회와 속죄와 아쉬움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내가 시어머님에게 받은 배려와 은혜에 비하면 해드린 것이 너무 없기에 죄송스럽기만 하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말이다. 부모는 열 자식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친정아버지 떠나시고는 원형 탈모로 몇 년을 고생했다. 이번에는 일시적인 불면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나이도 나이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은 지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49재도 지나고 나는 시어머님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누이가 둘이 있지만 자청해서 내가 했다. 사어머니도 원하셨다고 믿었다. 좋아라 하고 고마워하셨으리라 생각하며 하나둘 정리해 나갔다. 트렁크 하나를 열었다. 어머님이 귀하게 여겼던 물건들 인지 보자기에 곱게 쌓여 있었다. 내가 오래전에 선물해 드린 곱고 귀한 스카프와 머플러 등이 들어 있었다. 한 번도 하신 것을 보지 못했기에 선물했던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뼛속 깊이부터 끓어 올라 눈가에 머물렀다. 별것도 아닌데 그리 귀하게 고이고이 간직하셨단 말인가. 더 많이 더 자주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주변에서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낸 친구들이 가끔 자기들은 ‘천애 고아’라고 했을 때, 다 큰 어른이 무슨 천애 고아야 라며 웃어넘겼었다. 그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천애 고아는 아니다. 아직도 친정엄마가 97세로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독립심이 강해서 혼자 병원도 다니시고 식사도 스스로 해결하신다.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도 보시고 문자와 카톡도 잘하신다. 나중에 또 후회할 일은 남기지 말아야 할 텐데 또 후회할지도 모른다. 매번 그랬으니까.
친정아버지 임종 때 나는 스스로 다짐을 했다. ‘아버지, 엄마 걱정 마시고 편히 쉬셔요. 내가 보살펴 드릴게요’. 지금 그 약속 나름 잘 지키고 있다. ‘시어머님 영정 앞에선 못했지만 지금 약속드립니다. 천애 고아가 된 아드님, 귀한 장남, 제가 잘 보살펴 어머님 옆에 고이 모셔 드릴게요’. 이번에도 뒤늦게 다짐했다. 매번 하지 못한 말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아낌없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구김 없이 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머님, 한없이 고마우신 어머니, 고이 잠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