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찻잎을 우려서 마시다

by 후드 입은 코끼리

집에서 먼지에 소복이 싸여있던 플라스틱 껍질들을 발견했다. 예전에 한참 마시던 티백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내로라하는 비싼 찻잎부터 티백까지 묶음으로 사다 놓았던 것들이다. 마시기 위해 한참을 고군분투하면서 나의 취향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나는 현대인들과 달리 차를 천천히 우려 마시는, 영국 신사 같은 사람이야 — 즉, 너희와 달라 — 를 항상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모양새가 오늘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잠재된 무언가가 터지고 말았다. 오늘 포트에 물을 부글부글 끓였다. 절반만 넣어도 될 일을 가득 채웠다. 마치 흑심의 욕망을 물과 동일시라도 한 것처럼. 물이 끓는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래도 틀지 않고, 그냥 한참을 물만 바라보았다. 아직 인간은 물을 보면 환장하는 습성이 있던지라…… 그래서였을까. 나의 욕망의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나를 깨워줘서 고마워. 앞으로 나랑 함께하는 생활을 즐기도록 하자. 마치 주말에도 텀블러를 끼고 나가 물을 마시는, 합리적인 여성처럼 보이도록 하자.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은연중에 남들에게 내비치는 거야. 그렇게 너는 아름답고, 환경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물건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거지. 어때?


물이 끓어 넘쳤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욕망이 넘치다니. 속상하지만, 결국 행주를 가져와 닦으면서 '나는 결국 건강을 위해 건강하지 않은 모습이구나' 하고 피식 비웃었다.


오늘 나는 루이보스티 같은, 각성 없는 아이를 택하지 않았다. 영국 신사마냥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를 꺼냈다. 심지어 티백 두 개를 꺼내 놓고서는 만족스럽게 우려냈다. 투명했던 물이 갠지스강처럼 흙탕물로 변했다. 온갖 빨래와 시신이 떠내려가는 갠지스강을 한 모금 마셨다. 뭔가 부족했다.


두 번째, 먼지로 덮인 플라스틱 껍질 — 트루 레몬 패킷을 발견하곤 미소를 띠었다. 휘휘 풀어 넣었더니, 런던 시내의 향이 코앞에 아른거렸다.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영국은 신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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