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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찬 Nov 01. 2024

문화충격 다음 인간충격

맥스웰몰츠식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문화충격 다음 인간충격 

 미국 이주 자체가 나에겐 충격이었다.   심하게 또 어떤 이는 약하게  겪는다던데 미국에 들어서자마자 남들도 겪는  다른 문화에 대한 문화충격( Cultural Shock) 쇼크현상이 있었지만 나에게 하나 더 큰 충격이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만나는 게 몹시 두려웠다. 일주일간 방 안에서 응신을 안 했다. 방안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네플렉스 나 유튜브조차 없던 그 당시엔 그 흔하던 한국말  라디오도 TV도 신문도 없어서 가만히 누어서 천장만 뚜러져라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나에겐 칠흑 같은 절벽에 맞다 있는 멘붕상태였는데, 그렇게 한 주 그리고 두 번째 주가 흘러갔다.  계속 이렇게만은 살 수없을 걸 알았기에 간신히 셋째 주에  몸을 추슬러서 뉴욕 맨해튼에서 장인의 비즈니스를 나가 보았다. 이 건  보는 건만으로도 충분한 멘붕이 왔다. 내가 보낸 돈으론 장모님이 집을 세 채나 사셨다. 그 당시 미국에서도 한국식 부동산 투기를 기대하셨던 모양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한국식 투기는 먹히지 않았다.  미국은 워낙 땅이 넓어서 부동산이 오르지 않았다. 한국식 부동투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낸 모든 자금이 완전히 거덜이 났다. 결국 한 푼도 건질 수가 없었고, 더욱더 기막힌 건 내 이름, 장모님 이름, 사춘이란 사람의 이름 – 여기 와서 장모님 쪽으로 사춘이란 사람을 처음 봤다.  -  모게지 불체 냅자로 신용불량자 명단에 올라갔다. 그리고 체납한 법적인 문제까지 생겼다. 지금수납된 모든 금액과 계약할 때 지불한  계약금 전액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 주고 나서야 법적인 문제만큼 겨우 풀려 날 수가 있었다. 생활비로 사용해도 시원치 않은데 그 피 같은 돈을 부동산 사기꾼에게 모두 뜯겼다. 미국에 한인 부동산 사기꾼이 미국말 한마디도 못하시는 장모님을 꼬드기였던 것이다. 결국 뉴욕은 약삭빠른 한인이 덜 약삭빠른 한인을 등쳐 먹는 곳이었다. 참 한심한 미국 생활이 이렇게 시작을 했다. 나는 시작도 전에 이미 거덜 나 있었다.  며칠을 싸 누워있었지만 이게 해결책은 아니지 싶었다. 결국 며칠이 지나서야 맘을 다잡고 장인의 비즈니스를 돕는 생활로 마음가닥을 잡았다. 한참 나가서 돕다가 하늘을 보면 참 앞길이 암담했다. 3개월 있다가 개강을 하는데 돈도 다 달아가고 참담했었다.  그때 뉴욕에서 전철로 한 시간 떨어진 뉴저지 해리슨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뉴저지 해리슨역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기차를 장모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한 참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장모님이 나를 살뜰하게 부르신다.

        "여보게 박서방" 

        "네" 

        "그 어려운 공부 말고 지금 하는 것에 투자해서, 가게를 크게 하는 게 어때? 돈 버는 게 최고지!  공부는 무슨~ " 

난 이때 쾅! 하고 하늘 무너지는 소리가 들었다. 그리고 그땐  누군가 손바닥으로 두통수를 소리 나게 딱! 하고 때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앞길 창창한 직장 버리고, 집 팔고 땅 팔아서 노후하신 처가 어르신들을 돕겠다는 의리로 여기까지 왔다. 이게 내가 생각했던 의리의 결과물인가? 싶어서였다. 그리고 더욱이 비록 부동사 투기에 돈을 잃었다 할지라도…… 그놈의  포기각서를 쓰려고 가는 그 아침도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다녀왔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내색하면 불편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참고 있었다. 아니 내가 어려운 상황을 간신히 견디고 있던 그 시간조차   이렇게 장살 돕고 있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 나랑 함께 살자는 게 아닌 거였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내 머릿속에선 따라오는 질문? 하나가 있었다. 그게…….

“내 친엄마라면 이리 했을까?” 

였다. 나한테 묻고 또 물었다. 이건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류 하던 친형에게서나 그저 눈물 흘리며 헤어지는 던 내 친누이에게서 조차도 물어볼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그 당시 내 느낌으로 내렸던 결정이었기 때문에 이건 오로지 나한테 되물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그럼 나는 누군데?"

였다.  애당초 난 처갓집의 땜질용이었나? 처갓집에 바라고 결혼한 적도 없었고, 결혼 후 한 푼도 구결 한 적도 없었다.  지금은 안정적으로 살 기회도 돈도 잃었고, 더 창창하게 진급할 기회도 박차 버리고 온 나이였는데 ……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게 콱 막아버린 이 상황을 말로 다 표현 안 하고…… 그래도 어찌  참고 견딜 수 있었는데 …… 그것도 내가 믿었던 아니  자신들이 가족이라 하던 사람이 날 이렇게 1만 킬로를 불러와서,  이렇게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말 한마디를 나에게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에겐 아주 깊은  아픔이었다. 아픔은 어찌 견딘다 하더라도……  이 상황이 정말 뭔가?  휘발된 돈이나 한참나이에 잃어버린 기회보다  가족이 가족을 대하는 …… 아니 난 원래, 내가 생각했던 그들의 가족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오지랖으로 의리니 뭐니 했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내 잘못이 더 컸었다.  나는 한 다리 건너의 사람인 걸 내가 몰랐던 것일까? 알았으면 어찌했을까? 아마 알았더라도 내결정은 동일했을 거였다. 의리나 사랑이나 은혜는 주는 것이지 바라고 하는 일들이 아니걸 알기 때문이였다. 어찌 되었든 장모님의 이런 대면 대면한 성정이 나에게  뼈를 깎아내는 아픈 고통을 주웠고, 그날의 말, 한마디가  날 무척 서럽고 그리고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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