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쩌자고 아이가 둘

조기찌개

by 이정

이정아,

뭘 살 시에는 한 데서만 사면 안된대이.

감자를 여서 사면, 양파는 저서 사는거래이.

다 같이 먹고 살아야지, 누구 하나 힘들어서야 되겠노.


나의 외할머니는

동네마다 아파트가 즐비해지고, 집집마다 컴퓨터가 들어오던 시절에도

쪽진 머리에 한복차림으로 서울 한복판을 다니시던 분.

배움이 짧아 글도 못 쓰셨으나

입을 떼시는 족족, 시가 되고 수필이 되는 분이셨다.


어린 손녀가 놀러오는 날이면

손녀에게 코끼리코를 먹이러(나는 어릴때 순대를 그리 불렀다.) 재래시장으로 데리고 가셔서,

이 집 저 집 골고루 돌아다니셨다. 한 곳에서 하나씩, 굳이 한적한 구석가게를 찾아 다니셨다.

외할머니의 손은 오밀조밀 비닐봉지들이 번거로이 넘쳐나

돌아올 때에 나는

외할머니 손 대신 치맛자락을 붙들고 와야 했다.


그런 분이셔서일까.

그녀의 다섯 남매는

원체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이 유별났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모두가 눈물을 훔치며

자신은 유독 사랑받은 자식이었다고 고백했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빈데없이 너도나도

외할머니에게 받은 은밀한 사랑이 넘쳐났다.


어른들이 모여앉아 그 사랑을 털어놓는 동안

감히 끼어들진 못했지만, 나름 할 말이 많던 손주들도

옆 방에 옹기종기 ‘나는 특별한 손주였다.' 며 모여들었다.

그들이 내어놓는 애틋한 기억들은

어린 내 눈엔 배틀처럼 이어졌는데,

하다하다 사촌오빠 중 하나는 본인의 엄지손톱이 외할머니 것과 꼭 닮았다며,

가족중에 자신만이 유일한 엄지손톱 상속자여서, 외할머니가 더 특별히 여겨주셨다면서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보여주었고,

우리는 다들 우와-하며 모여들어 그 손톱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코 예쁘다 할 수 없는 그 엄지손톱이

그 당시 내 눈에 어찌나 부럽던지

나는 내 엄지손가락을 얼른 주먹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짬밥이 부족하여 쉽사리 끼어들지는 못했으나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내가 가장 사랑받던 손주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들어봐도 나같은 추억은 없었다.

외갓집을 들를 때마다 외할머니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던 손주도 없었고,

둘이서만 이곳 저곳 시장을 돌아다녔던 사촌도 없었다.

사촌오빠의 손톱처럼, 모두의 눈 앞에 들이댈만한 증거가 없는 것은 다소 분했으나,

누가 뭐래도 나는 외할머니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이였다. 그것은 분명했다.


손주 열 셋을 물리치고

내놓지는 못해도 은근한 승리감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생각도 못한 복병을 만나야 했는데

"장모님이 나를 특별히 아끼셨지.

내가 가면, 조기를 잔뜩 사다가 조기찌개를 따로 끓여주셨다니까.

막내사위가 좋아하는 거라고 살을 잔뜩 발라주시면서 말이야.

다른 음식들이 많아도 꼭 조기찌개를 그렇게 끓여주셨어."

아뿔싸! 아빠도

외할머니의 특별한 사위었던 것이다.

아빠가 저렇다면, 아마 이모부도 지금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테고,

외숙모 셋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외할머니의 다섯남매는 프리패스, 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생각도 못한 어른 다섯이라니...

왠지 자신이 없어져서 마음이 새초롬해졌다.




안타깝게도

나는 엄지손톱뿐 아니라, 외할머니의 마음도 닮지 못한 것인지

마음을 요령껏 갈라세우는 사람이 못 되었다.

홍콩영화에 빠져 있을 땐 공부를 접었고,

일에 미쳐 살았을 땐 취미 하나 갖지를 못했다.

대학 때, (지금 말로)썸을 타던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어쩌다보니 미리 잡혀있던 소개팅을 했다가 덜컥,

마음이 갈팡질팡해진 적이 있었다.

고민하는 나에게 친구는

마음 정해질 때까지만 둘 다 만나보라고 했으나

나의 야심찬 결심은 이틀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둘로 쪼개지는 마음은 내 인생에 없다는 걸 그 때 나는 알았다.

나는, 딱히 뭘 해본 것도 없이

얘를 먼저 만나나, 쟤를 먼저 만나나, 고민만 하다가

둘 중 누구든 상관없는 지경으로 지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내 성격을 알고 있었던지라

회사를 들어간 후,

결혼도 안할거야, 아이도 안 낳을거야. 라고

여기저기 선언했으나

결심이 무색하게스리 둘 다 해버렸으니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내게 불가항력적인 선택이었다.


이토록 뭐든 적당히 나눠 살 수 없었던 나인데

나에게

아이가

둘이다.




‘마음을 둘로 못 나누는 성격' 이라는 걱정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스스로 발목을 잡게 했다.

내 기억 최초의 난감함은

엄마는 누굴 제일 사랑해? 라는 아이들의 질문이었는데

그런 단순한 질문에도 내 마음은 지진이었다. 지체없이 “너.”라고 말해줘야함을 알면서도

자꾸만 말 끝에 “너.랑 동생...?” 혹은 “너.랑 언니...?” 라는 주책맞은 꼬리가 붙어달렸다.

나름대로 열심히

마음을 쪼개고 나누느라

쓸데없는 공평함을 휘둘렀다.


그 난감함은 아이들이 커가자 갈수록 태산이었다.

아이들 질문엔 질책이 묻어나고, 난이도가 높아지며, 구체적인 솔루션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쟤가 먼저 했는데 왜 맨날 엄마는 나한테 뭐라고 해?”

“저번에 언니가 먹자는거 먹었는데 왜 이번에도 엄마는 나더러 양보하라 해?”

“내 스케줄이 이렇다는데 왜 쟤한테 맞춰주라고 하는거야?”

“이거 나랑 하기로 해놓고 왜 엄마는 언니꺼만 신경써?”


두 녀석 다, 성향도 주장도 어찌나 강한지

각자 반대로 달려가는 경우에 부딪히면

허둥지둥 대하느라 자꾸 삑사리를 내었다.

나의 서툰 마음에

혹여 누구하나 서운할까,

크기를 따져보고 횟수를 세어가며

쓸데없이 속을 끓이기 일쑤였다.


아이들의 원망섞인 눈빛 앞에

“너네 둘 다 엄마가 편을 안 들어준다고 성화인걸 보니,

엄마는 지인짜 공평한 사람인거네!“ 라고 항변하면서도

외할머니라면 이런 식의 공평함은 아니었을텐데.

그녀의 다섯 남매는 자라면서도, '역시 우리엄마.’ 라고 생각했겠지, 떠올리며

자꾸만 외할머니를 닮지 못한 엄지손톱을 애꿎게 째려보기도 하였다.




외할머니표 조기찌개는 우리집 식탁에 종종 올라오는 메뉴였는데,

아빠가 들려주는 외할머니 추억은

늘 곁들여지는 단골반찬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왠일인지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외할머니가 느네 아빠를 진짜 예뻐했잖니. 아빠가 온다고 하면 부엌에 먹을게 넘쳐나도

뛰어나가 조기를 사다 꼭 조기찌개를 해주셨었잖아.

막둥이딸 남편이라고 어찌나 예뻐하셨던지.“


반전이었다. 엄마의 갑작스런 승리였다.

아빠의 조기찌개는, 알고보면 외할머니의 막둥이 사랑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엎어치기는 그 후로 나도 피해갈 수 없었다.

내가 외할머니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때마다 엄마는 늘

"맞아. 막내가 시집살이 하면서 낳은 딸이라 외할머니가 널 진짜 애틋해 하셨지."

라며 촉촉한 눈빛으로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뜨악했으나, 서서히 엄마의 추임새가 쌓여가며 나도 자랐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것이라고 믿었던 외할머니 사랑을

엄마와 기꺼이 나눠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조기찌개를 앞에 두고 읊조렸던 엄마의 마지막 문장에도

끄덕끄덕 미소짓던 아빠처럼,

그 모든 시작이 막내딸을 향한 애틋함이었다 해도

내가 받은 사랑이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조기찌개는 아빠의 것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달려나가던 외할머니의 버선바람은,

살을 발라 올려주는 숟가락은,

그 모든 것에 곁들여지던 사랑해마지 않는 눈빛은,

누가 뭐래도 아빠의 것이었다. 아빠를 향해 있었다.

나 또한

코끼리코도, 시장구경도, 외할머니의 무릎팍도

나의 것이었다. 엄마는 겪어보지 못한 나만의 기억이었다.

시작은 막둥이딸 사랑이었을지 몰라도

오롯이 받아낸 것은 나였다.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을 부족함 없이 사랑하셨을까.

늘 부럽고 궁금하던 외할머니의 사랑은

결코 내 기준의 공평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식은 야채가게가 아니고, 사랑은 감자나 양파가 아니기에

자로 재며 똑같이 나누어주거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갯수를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모두를 놓치지 않고 품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날은 조기살을 사위에게 얹어주고,

때로는 무릎팍을 손주에게 내어줘도,

막내딸을 대하는 눈빛은 변함없이 따스했을테다.

어느때 누구에게 무엇을 해주건간에

외할머니의 마음 속에는

나의 자리가 굳건히 있을 것이라는 것,

그 곳은 크고 여유로워서

나 또한 언제든 필요로 하면 대大자로 드러누워 쉴 수 있도록

외할머니는 얼른 그 자리를 넓혀주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두 자매도 좀 더 크고 나면

알게될 것이다.

어릴 적, 제일 큰 사랑인걸 확인하려고

손주 열 셋, 어른 다섯, 부족한 손가락를 꿰어본 시기를 지나

내리사랑엔 더하고 덜한 것이 없다는걸 알게 된 나처럼,

엄마사랑은 등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생 편을 들었으나 엄마 마음에는 늘 첫째가 있었고

언니와 시간을 보내더라도 엄마는 둘째를 항상 품었다는 걸

아이들도 세월이 흐르며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도

어리석은 공평함에서 벗어나

훌훌 가벼운 자세로 아이들을 대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똑같은 크기로 나눠 살아가는 아파트가 아니라

누구든 필요한만큼 넓게도 좁게도 쓸 수 있는

운동장같은 엄마가 되어보자 맘먹어본다.


그리고,

두 녀석 중 누구라도

필요한 때에

아쉬움 없이 넓은 숨을 쉴 수 있도록

나는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돌이켜보면 이 나이가 되는동안

마음을 넓힐 수 있는 기회들은 많았다.

상황을 유연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를 길렀어야 했고,

벅차더라도 쳐내지 않고 소화해내는 넉넉함을 익혔어야 했다.

인생은 꼭 하나만 선택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세상사가 더하기 빼기처럼 똑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마음을 채우는 것만큼 때로는 비워낼 공간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열심히 배웠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일찌감치

내 마음의 크기를 정해놓고

나이가 들어도, 어른이 되어도

그 크기에 꼭 맞는만큼만 담아내고 산지라

두녀석이 들어오자 너무 빼곡해져 버렸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점점 촘촘해지는 중이다.


외할머니를 영영 따라갈 수는 없을지 몰라도,

늦은만큼 열심을 낸다면

언젠가 비스무리 정도는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크지 않은 마음을 애써

두 아이에게 쪼개고 나누느라 진빼는 대신,

애써 버려내었던 것들을

마음 가장자리에 둘러가며

차곡차곡 꽂아봐야겠다.

그러다보면

조금씩 넓게 일궈질지도 모를 일이다.

첫째가 속상한 어느 날에, 둘째가 지친 어느 때에,

그것들을 잠깐씩 비켜주면

아이들이 넉넉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지내기에 편안할 것이다.


사실,

이 브런치 연재도 내게

그런 의미의 연습이다.

매주,

조금씩 나를 넓혀가는 중이다.

오늘도 마음 한 켠에

깃발 하나를 꽂아본다.







조기찌개

경상도식 찌개라고 해요. 대중적인 음식인줄 알고 자랐는데, 남편은 처음 먹는 음식이라고 하더라구요.

무우나, 고추장을 넣고 끓이는 레서피들도 있지만, 외할머니식 경상도 조기찌개는 오롯이 조기와 고춧가루만 넣고 (쑥갓이나 두부 정도) 끓여내는, 조림과 찌개 사이의 음식이었답니다. 자반고등어나 보리굴비처럼 짭짤한 묵직함이 일품이라, 슥슥 비벼먹으면 금새 밥한공기 뚝딱이랍니다. 처음 먹어보는 남편도 한 술 뜨자마자 반한 음식이기도 해요.


1. 지느러미와 비늘을 다듬은 조기를 넣고, 물과 멸치액젓, 고춧가루를 자작하게 부어 끓입니다. (외할머니표에는 고사리가 들어가지 않는데, 레서피들을 보면 고사리를 넣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마침 데친 고사리가 있어서 좀 넣어봤습니다. 육수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더 구수해져서 좋았어요.)

2. 조기에 맛이 스며들만큼 졸여졌을 때, 물을 더 넣고 다진마늘과 파를 넣어 끓여냅니다.(간이나 물의 양은 찌개와 조림 사이, 짭짤하게 맞춰주세요.)

3. 쑥갓과 고추를 넣고 한소끔 끓여냅니다. (두부가 있으면 넣어도 좋아요.)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아이의 말은 어른의 것보다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