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김치
얼마 전, '폭싹 속았수다'를 보던 큰 아이는
금명이가 엄마에게 날을 세우는 장면을 보다가
"나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내게는 아주 자알생긴 외삼촌이 계셨다.
경상도 사투리를 시원시원 쓰시던 상남자.
어른들 말로는 '신성일도 울고 갈' 미남. 배우를 하자고 감독이 따라다니던 멋쟁이.
젊은시절 사진을 보면
훤칠한 키에 라이방을 쓰고
멋드러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가득인데,
아들 둘에 이어 막내 고명딸이 태어나던 때부터는
샤쓰깃을 착 올리고 포즈를 잡는 대신,
포대기를 두르고 집 안팎을 다니셨다. .
그 막내 고명딸은
유독이나 언니 언니- 하며 나를 따르던 동생인데다 집도 지척이어서
우리는 이집 저집 오가며 가까이 지냈는데,
나의 어린 눈에도 입이 떡 벌어지도록
외삼촌의 딸사랑은 유별났다. 샘이 나다가도 손이 오그라지기도,
이내 외삼촌이 원래 저런 사람이었던가 헷갈리기도 했다.
사실 그 유별난 사랑은 외삼촌 탓만은 아니었다. 내가 봐도 그 여동생은
어여쁘고, 따스하고, 총명한 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이 지극하고, 아이가 남달라도
아이는 자라고 어른이 되어간다.
포대기 안에만 있던 아가는 걸음마를 시작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느라,
부모가 만들어줬던 세계와 부딪히고 싸워가며 균열을 만들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듯
사촌동생도 그랬다.
동생에게 종종
보수적이고 강한 외삼촌에 대한 불만을 듣기도 했고
간간히 엄마와 외숙모가 전화통화를 하는 것을 듣기도 하면서,
걔나 나나 비슷하게 부모 속썩이는구나. 짐작은 하였다.
외숙모 말에 대한 엄마의 추임새가 심상찮았고,
그들만의 공감대가 제법 견고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절, 부모님의 뒤집히는 속이 우리에게 대수랴.
"다 그래. 내 친구들도 다 그래!" 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우리의 잘못을 퉁치며
동생도 나도 어른이 되어갔다.
사촌동생 또한 외삼촌이 만만찮았을 것이다.
나에겐 작은 일에도 껄껄껄 눈주름을 잡으며 호탕하게 웃는 분이셨지만,
"느이 아빠가 암만 호랭이어도, 느이 외삼촌에 비하면 저리가라다!"
하는 엄마의 말을 짐작해보건대
외삼촌은 보통 쌘 분이 아님에는 분명했다.
듣기에도 목소리가 우렁우렁 장부 같고
보기에도 돌산처런 크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외삼촌이
사촌동생이 여문 어른이 채 되기도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인지할 틈도 없이 밀려온 급성간염은
포크레인 수십 대보다도 광폭한 놈이었다.
우리가 알던 그 돌산은
하루아침에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이렇다하게 인사할 틈도 없이
어느날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외삼촌을 입관하던 날,
나의 사촌 여동생은 내 옆에 서서
왁왁, 울었다. 저 여리한 몸에서 어떻게 저토록 큰 울음을 뽑아내는지
유리창 너머 누워있는 아빠를 보며 무섭도록 악을 썼다.
"아빠, 나땜에 죽었지! 내가 속썩여서 죽었지!"
사촌동생 곁에서 실신하듯 주저앉았던 외숙모가
벌떡 일어나 동생의 입을 틀어막으시며 더 크게 악을 쓰셨다.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런 말 하지마!!"
나는
외숙모 손가락 사이로 기어이 악을 새어내보내는 동생을 보며 울었고
엄마는
사촌동생보다 더 크게 소리지르는 외숙모를 보며 흐느꼈다.
맘껏 울게 좀 두지 않고 왜 그리 화를 내고 틀어막는지
외숙모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내게
"남편 앞세운 것보다, 자식 한맺히는게 더 힘든 일."
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철없는 내게 이해되지 않는 영역의 감정이었다.
그저, 사촌동생이 가엽고 애닲을 뿐이었다.
그 때부터였을까.
나는 문득문득 그 날의 사촌동생의 모습 위로, 내가 오버랩 되어 떠오르곤 했다.
아빠에게 별 것도 아닌걸로 신경질을 내거나,
엄마에게 해묵은 이야기를 들먹이며 시비를 건 날이면
내가 어느날 그렇게 악을 쓰며 울고 있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엄마아빠를 떠나보내는 그 상황에서조차 내가 제일 걱정이 되었다. 내가 너무 아플까봐 무서웠다.
그리고 엄마가 된 후,
비로소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내 딸이 그 오열만은 하지 말기를. 어느 날이 오거든 애틋한 기억만 떠올리기를.
큰 아이가 내게 모진 말을 하면
쟤가 나중에 어쩌려고, 무슨 상처를 담고 살려고 싶어
내게 박힌 가시들을 빼낼 겨를도 없이
잊어라, 잊어라. 너가 오늘 내게 한 말들을 부디 기억하지 말아라.
바라고 또 바랐다.
작은 아이가 철없이 엄마 미워, 엄마 싫어, 짜증을 낼 때에도
잊어라, 잊어라. 철없이 한 말인거 엄마 다 알고 있어.
내 마음은 간절해졌다.
나도 못난 사람이라
그러면서도 종종
나쁜 기집애, 너 엄마한테 이랬고 저랬고.
그간 서운했던 말들을 굳이 끄집어내가며 아이에게 각인시키기도 하지만
그래놓고 또 후회하는 것이다.
잊어라, 잊어라. 엄마 그냥 투정한거야. 너한테 다 털어냈으니 이제 퉁쳐.
드라마를 보며, 나네... 되뇌이는 큰 아이에게
"아니야. 너만 그런게 아니라 자식들은 다 그래. 엄마도 그래."
화들짝 힘을 주어 이야기 하면서
나는 그 날의 외숙모가 떠올랐다.
아이가 내 말에 엇나갈 때보다 걱정이 되었고
내가 떠난 후에도 그리 생각할까 안달이 났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이들이 알게 되면,
흘려버릴 수 있었던 본인의 철없는 행동들에
스스로 방점을 찍으며 살게 될까봐.
내가 그 날의 사촌동생을 본 이후로
부모님께 철없는 언행을 할 때마다
아차, 아차, 기억에 박으며 살게된 것처럼,
아이들도 말실수,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내 말을 떠올리며
아차, 아차, 하게 될끼봐.
세차게 도리질 치는 엄마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큰 아이에게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저
아니야. 그게 당연한거야. 라며
아이의 그런 마음을 덮어버리도록
자꾸만 아니라는 말을 쌓아올렸다.
며칠 전, 오랜만에 사촌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안 그래도 요며칠 입관날이 자꾸 생각 났다는 내 말에
사촌동생은 기억이 없다 했다.
어떻게 치루어졌는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그저 기억에서 밀어내버렸다고 했다.
그 때의 마음이 힘들어서 사는내내 아프다는 말보다
기억에 없다는 말이 더 아프게 들려서,
왜 그 날이 그리 생각났냐고 묻기에
나는 그냥. 나도 모르겠네. 라고만 했다.
동생에게 차마 이야기해줄 수 없었다.
나의 두 딸들에게 하듯
동생에게도 잊어라, 잊어라. 바랐기 때문이다.
동생은 너무 어려, 혹은 너무 당연하여 잊었을 순간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 예쁜 딸래미를 바라보던
외삼촌의 눈빛을, 미소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걸음마를 했을 때, 입을 뗐을 때,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동생의 모든 순간이 자랑스러워 어찌할바 몰라하던 외삼촌을,
집에서는 호랭이 아빠를 하느라 딸래미에게 호통을 쳤을지는 모르나
사실 그런 딸래미 때문에 인생의 매 순간을 기꺼이 버텨내셨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또한,
당신은 너무 엄하다는 외숙모 타박에
외삼촌의 단단한 표정 위로 스치던 흔들림을,
좀 과한 면이 있지! 호기롭게 껄껄 인정하시면서도
표정은 그렇지 못했던,
동생이 알지 못했던 외삼촌의 마음을
우리 모두는 기억한다.
사랑이 부모만의 것이 아니듯
후회도 동생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것이었다.
아직 아이가 없어 부모의 맘을 잘 알지 못할 동생에게
나는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외삼촌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제 그만 속 끓이라고.
상처를 주는 것은 자식만의 일은 아니고
부모도 자식에게 숱한 후회와 실수를 하며 키워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드라마 속 애순이도 알고보면
금명이를 키우며 타박도 하고, 신경질도 내고,
상처주었던 일들이 많았을 거라고.
원래 부모자식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
퉁치며 살아가는 사이인데
다만, 자식이 남겨진 사람인지라
떠난 이보다 후회를 더 길게 하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를 누구보다
외삼촌이 원하고 바라실거라고,
그 어느 날, 내 딸들에게 해주고픈 말을
동생에게 나는 해주고팠다.
사촌동생은 그 날 이후,
홀로 남은 외숙모에게 온 맘을 쏟는다.
어른들은 그런 동생을 보며
기특하다, 장하다, 칭찬을 하지만
나는 슬펐다.
무슨 마음으로 하나 남은 부모를 대하고 있는지,
입관날의 그 오열이 떠올라
늘 안아주고 싶었다.
조심스레 말을 삼키며
"언니 집에 한 번 와. 파김치가 딱 너 좋아할만큼 포옥 익었어."
라고만 했다.
"언니, 진짜 갈게! 더 익기 전에 조만간 갈게!"
사촌동생의 목소리가 한껏 신을 낸다.
해주고픈 말들이 이토록 많고, 안아주고 싶은 순간들이 이만큼 쌓였는데
전할 수 있는 것이 고작 파김치라니...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파김치를 담글 줄 알아서, 동생 입맛에 맞아서,
이거라도 해줄 수 있어서.
통화 끝자락,
얼마전부터 외숙모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는 중이라는 동생의 말에
"넌 진짜 더할나위 없는 딸이다!"
라고 얼른 이야기했다.
"정말이야. 너같은 딸이 어딨니. 넌 어릴때부터 그랬어. 진짜야!"
라며 자꾸자꾸 이야기했다.
외삼촌이 말해주듯, 전해주었다.
나의 두 아이에게 말해주듯, 반복하였다.
우리모두는 사실,
상상도 못할 벅참을 부모에게 주었던
더할나위 없는 자식이라고.
훌훌 아픈 마음을
떨쳐내어도 좋다고.
조만간 파김치를 가지러 동생이 오면
안아줘야겠다.
반가운 인사인척 그러나 길게,
손끝까지 힘을주어
포옥 안아주고 싶다.
파김치
사촌동생과 가족은 물론, 주변 지인들도 좋아해서 자주 담궈놓고 나눠주는 김치에요.
김치는 인식상 어려운 음식이라고 여겨져서 처음엔 엄두가 안나기도 하지만, 사실 양념만 알고나면 재료만 바꿔가며 모든 김치를 만들 수 있어요.(김치만큼 집집마다의 맛이 다른 음식도 없죠. 누군가의 레서피 비율을 따르는 것보다, 좋아하는 김치의 양념을 먹어보고 짠 기운이나 단 맛의 정도를 가감하며 흉내내는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저는 김치양념을 넉넉히 만들어두고, 그때그때 버무려 필요한 김치를 담궈내곤 한답니다.
1. 믹서기에 찬밥 조금, 양파, 마늘, 생강 조금, 무우, 홍고추, 매실액 조금을 넣고 갈아주세요.(홍고추는 없어도 되지만, 고춧가루만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시원한 맛을 냅니다. 매실액도 갈리는 것을 도울 정도로만 넣어주세요.)
2. 갈아놓은 재료에 고춧가루, 새우젓, 설탕 조금(뉴슈가라면 더욱 조금)을 넣어 버무리시면 됩니다.
3. 액젓에 파뿌리부터 절이세요. 전체적으로 쪽파가 숨이 죽을 정도만 절이면 됩니다.(액젓의 종류는 집집마다 다르니 입맛에 맞는 걸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저희집은 멸치액젓을 써요.)
4. 액젓에 파의 향과 맛이 배어나왔기 때문에, 절인 액젓은 버리지 말고 만들어둔 양념에 적당히 넣어가며, 다른 양념들도 함께 가감하며 전체적인 간을 맞춥니다.(김치담그는 것이 익숙해진 후에 깨달은 건, 생각보다 양념이 짜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단맛도 은은한 정도여야 하구요.)
5. 쪽파를 쓸어내리듯 양념을 사이사이 잘 버무립니다.
6. 저희집처럼 폭 익은 파김치를 좋아한다면, 상온에 하루이틀 놔두었다 양념이 조금 보글보글 올라올 때에 김치냉장고로 옮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