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의 시대에, 평가받지 않을 권리에 대하여
요즘은 누구나 평가자가 된다.
유튜브의 댓글창에서, SNS의 타임라인에서,
그리고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타인을 재단한다.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용기를 단 몇 초 만에 판단하고 지나간다.
밤이 깊을수록 유튜브의 불빛은 더 선명해진다.
누군가의 일상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작은 화면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먹고, 하루의 피로를 털어놓듯 조용히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화면 아래에는 언제나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목소리 너무 듣기 싫다.”
“이런 외모로 방송을 하겠다고?”
“돈 벌려고 별 짓 다 하네.”
익명성은 원래 자유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말할 수 없던 이야기를 하게 해 주고,
보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익명은 가면이 되었다.
책임을 가려주는 가면, 공격을 합리화하는 가면.
그 가면 뒤에서 사람들은 가장 잔인한 말을 가장 가벼운 손끝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악의적인 존재일까?
아니면 단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안도감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말의 윤리’를 잃어버린 걸까?
요즘의 세상은 ‘평가의 구조’로 굴러간다.
유튜브의 좋아요, 브런치의 구독 수, 인스타그램의 하트,
심지어 내 글의 조회 수도 숫자로 환산된다.
그리고 그 숫자가 곧 ‘가치’가 된다.
누군가의 진심, 노력이, 시간의 깊이가
단 한 줄의 댓글과 몇 개의 하트로 계산된다.
그건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처음엔 단순한 기록이었다.
내가 만든 음식, 중국 칭다오에서의 생활과 수업에서의 일화, 지금 이런 식의 마음에 남는 대화들.
그런 것들을 한 편씩 정리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반응’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번 글엔 리플이 달릴까?’
‘오늘은 구독자가 늘었을까?’
‘조회수가 너무 적은데, 주제가 잘못됐나?’
처음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글을 올리고 며칠이 지나도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는 날이 계속되면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천천히 식어갔다.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아무도 읽지 않으면
이건 그냥 공허한 독백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손끝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썼다.
못해도 3일에 한 번씩은,
‘꾸준함이 언젠가 닿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리플은 거의 없고,
그조차도 한 에피소드에 대한 공감 댓글 하나로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교류’라는 단어가 얼마나 낯선 것인지.
나는 소통을 원했지만, 세상은 침묵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누군가의 평가에 상처받기 싫어서 글을 썼는데,
정작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 침묵’이 더 아팠다.
인정받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그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평가가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형태의 인정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이 ‘건전한 소통’ 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즘의 인터넷은 너무 빠르고, 너무 단정적이다.
‘좋다’ 아니면 ‘싫다’.
그 사이의 미묘한 감정, 공감, 여운은 설 자리가 없다.
하루는 글을 쓰다 문득 멈췄다.
돌이켜보면, 나도 어느새 타인의 반응을 평가하는 관객이 되어 있었다.
유튜브를 보면서도 그랬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억양으로 말하지?”
“이건 좀 유치한 콘텐츠네.”
나도 모르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비판받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도 그 아픔을 만드는 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내 글의 의미가 달라졌다.
댓글 하나, 말 한 줄이 얼마나 무거운지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그리고 그 무게를 견디는 건 언제나 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침묵의 무게는 그보다 더 무겁다.
세상은 말이 너무 많지만, 진심은 너무 적다.
비난은 가볍게 떠다니고, 위로는 좀처럼 입에 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시끄러워지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외롭다.
유튜브의 라이브를 볼 때면 가끔 두려워진다.
화면 속의 그들이 마치 투명한 유리벽 뒤에서
대중에게 심문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은 무슨 이유로 욕을 먹을까.’
‘이 말 한마디가 또 논란이 되진 않을까.’
그 긴장감 속에서 웃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차마 웃을 수가 없다.
그들도 결국 ‘사람’이다.
우리처럼 외롭고, 인정받고 싶고,
때로는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가끔 나도 마음이 흔들린다.
너무 심한 비난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을 써버릴 때가 있다.
그 순간엔 억울함과 분노가 손을 이긴다.
누군가를 향한 잔인한 말이 화면에 떠 있을 때,
내 정의감은 종종 방향을 잃는다.
하지만 그 후 찾아오는 부끄러움은 길다.
나는 댓글을 지우고, 채팅창을 닫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느리지만, 돌아서는 법을.
그렇게 오늘도 수많은 ‘익명의 돌멩이’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조용히 부서뜨린다.
그리고 돌을 던진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 영상을 클릭한다.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다.
판단하지 않는 용기,
비난 대신 침묵을 택하는 용기,
그리고 침묵 속에서도 따뜻함을 전하는 용기.
요즘은 누군가의 라이브를 볼 때면
실시간 채팅창을 닫는다.
대신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당신의 하루가 오늘은 조금 덜 외롭기를.”
“그 웃음 뒤의 피로를 누가 좀 알아주기를.”
그 말이 전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나는, 내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니까.
결국 세상이 바뀌려면
평가가 아닌 ‘이해’로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완벽히 알 수 없지만,
이해하려는 시도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따뜻해진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결국 그거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것도, 감동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말하고 싶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너는 어떤 하루를 살고 있니?”
그 단순한 대화의 가능성,
그게 내가 브런치를 계속하는 이유이자,
이 세상에서 아직 글을 믿는 이유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평가하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조롱 대신 이해를,
비난 대신 공감을,
침묵 대신 따뜻한 말 한 줄을 택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조금만 덜 냉정해진다면,
세상은 생각보다 빨리 변할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
흔히 말하는 '관심을 갈망하는 사람'인 내 느낌으론
아마 이번에도 리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잠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평가가 아닌 이해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쓰는 일,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우리가 다시 사람으로 남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