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바람; 겨울의 문턱에서

by leolee

겨울의 칭다오는 차갑고, 공기는 날카로웠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햇빛이 아파트 거실에 머물렀지만, 방 안은 여전히 쓸쓸했다. 나는 트렁크를 열어 두꺼운 옷들을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세라가 말했던 우루무치의 겨울은 혹독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리가 끝난 뒤에도 마음속 어딘가가 텅 비어 있는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가볍게 한 잔 하려다 만 소주병과 반쯤 비어 있는 물잔이 있었다. 나는 소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세라와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노트북 화면 속 세라는 여전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짧은 숏컷 머리, 상하이의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그녀의 모습은 화려하고 자신감 넘쳐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눈에 비친 미묘한 흔들림을 읽을 수 있었다.


“칭다오 날씨는 어때? 거기 많이 춥지?”


그녀가 먼저 물었다.


“여기도 춥긴 한데, 너 말대로 우루무치보단 덜하겠지. 근데... 너 괜찮아? 상하이에서 바로 가야 한다고 해서 좀 걱정되네.”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괜찮아. 부모님도 너를 기다리고 계셔. 나도 네가 와준다는 게 고맙고.”


세라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너머로 어딘가 흔들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그래도...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 우리가 우루무치에 가는 게 정말 괜찮은 선택일까? 혹시 부모님이... 반대하시진 않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라는 잠시 화면 너머로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으로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걱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 둘이 진심이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단호함을 믿고 싶었다.


“그럼, 너 상하이에서 출발하면 우루무치에서 바로 만나는 거다?”


“응. 우리 부모님도 공항에 나올 거야.”


“좋아. 그럼 거기서 만나.”


통화를 끊은 뒤에도, 나는 노트북 화면에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을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니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밝게 보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TJ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단골 카페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익숙한 특유의 커피 향이 반겨줬다. TJ는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잔 옆에 놓인 노트북과 노트는 그가 방금까지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줬다.


“얼굴이 왜 이래? 완전 퀭하잖아. 무슨 일 있어?” TJ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말없이 있었다. TJ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라랑 문제 있냐? 네 표정 보면 다 보인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루무치에 가기로 했어. 세라 부모님도 만나고, 우리 관계에 대해 좀 더 확실히 얘기하려고.”


TJ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짜? 너 완전 결혼 준비 단계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나는 말을 멈췄다. TJ는 고개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솔직히 아직 확신이 없어. 세라가 나한테 완전히 솔직한 건지, 아니면 뭔가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TJ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말했다. “너, 벨라 때도 그랬잖아.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꼈지? 근데 지금도 같은 거라면... 너 스스로 문제를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닐까?”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벨라와의 이별. 그때도 나는 그녀를 충분히 믿지 못했고, 결국 그 관계는 깨져버렸다.

TJ는 잠시 나를 지켜보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나도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어.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도 항상 뭔가 숨기려 했지. 나중에 알았는데,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실망할까 봐 숨긴 거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내가 물었다.


“처음엔 나도 너처럼 의심만 했어. 그녀가 왜 나한테 솔직하지 않은지 이해가 안 됐거든. 그런데 나중에야 알았지. 내가 그녀에게 믿음을 줄 준비가 안 돼 있었더라고.”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배운 건,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완전히 믿어야 한다는 거야. 설령 상대가 뭘 숨긴다 해도,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먼저라는 거지.”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TJ의 경험은 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나는 세라를 믿고 싶은데, 그녀의 태도는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그녀가 뭘 숨기든, 너는 네 진심을 보여줄 준비가 돼 있어? 네가 충분히 노력했으면 된 거잖아.”


이윽고 출발일이 되었다. 공항은 언제나처럼 분주했다. 출발 게이트까지 이어진 길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나는 그들 틈에서 한 손에 가방을 든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세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세라: “비행기 타기 전에 연락해 줘. 안전하게 와야 해.”


나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짧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답장을 보냈다.


> 나: “곧 탑승할 거야. 너도 잘 와.”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나는 가방을 챙겨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발걸음은 묵직했지만, 그 끝에 내가 진심을 보여줄 무대가 있다는 걸 알았다.


비행기가 이륙하며 창밖으로 칭다오의 도시 불빛이 멀어졌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해야 한다. 벨라와의 기억에서 벗어나, 세라와 진짜 관계를 만들어야 해. 내게 부족한 게 있다면 그것부터 바로잡아야겠지. 그녀를 믿고, 내가 진심임을 보여주는 것.’


나는 창밖에 어른거리는 구름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우루무치가 어떤 답을 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최선을 다할 거야.’


비행기가 구름 위로 올라가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에서 세라가 준 작은 사진을 꺼내 보았다. 사진 속 그녀의 미소는 밝았지만, 그 미소 너머에 숨겨진 진실은 내가 찾아내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5월의 바람'은 여기서 마무리가 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팔대관의 여름'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아직 '황포강의 밤'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저의 중국에 발을 딛으면서 생기는 일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으니 책 이외의 에피소드를 읽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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