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저녁,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깔리고, 아파트 안에는 선풍기가 조용히 돌아가며 공간을 식히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켰지만, 화면 속 커서는 한참 동안 깜빡이기만 했다. 문득 커피 테이블 위에 놓인 마른 커피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방치된 커피잔이 어쩐지 내 마음 같았다. 비워졌지만 씻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감정, 그것이 바로 나였다.
상하이에서의 화해가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있던 순간은 분명 좋았는데, 이상하게도 돌아온 후에도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 신용카드 빚 이야기와 태도.’
‘왜 나에게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지 않았을까? 왜 혼자서만 해결하려고 했던 걸까?’
다음 날, 나는 더운 공기를 뚫고 TJ와 만나기 위해 단골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피와 디저트 향이 코를 찔렀고, TJ는 이미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이스 라떼가 들려 있었다.
“요즘 너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여. 무슨 일 있냐?”
그의 말에 나는 간신히 웃어 보였지만, 마음속 짐은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라랑 상하이에서 화해하긴 했어.”
“그래? 그럼 됐네. 왜 아직 그렇게 우울해 보여?”
나는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화해는 했는데, 뭔가 불편해. 그녀가 신용카드 빚 이야기를 했을 때, 제대로 대답 안 했던 거 기억나? 또 상하이에 간 이유도 그렇고… 내가 진짜 다 믿어도 되는 걸까?”
TJ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너 솔직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랑하면 믿는 거야.”
나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 말은 쉽지. 근데 왜 그 말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 자꾸 의심이 생겨.”
TJ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사랑하더라도 의심할 때가 있어. 근데 그게 그녀 때문인지, 아니면 네 스스로가 불안한 건지 잘 생각해 봐. 의심은 네 마음에서 시작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 햇살이 카페 창문을 통해 비치며 사람들의 그림자를 늘렸다. TJ의 말은 맞았다. 문제는 내 안에 있는 걸지도 몰랐다.
카페를 나와 걷는 길. 거리는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도 활기가 넘쳤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 바람에 흩날리는 가로수 잎들. 하지만 그 활기는 나와 무관한 세상 같았다.
갑자기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빛났던 세라의 얼굴. 클럽에서 자신감 있게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그녀의 모습. 그날 그녀와 함께했던 MD가 농담처럼 했던 귓속말이 머리속에 맴돌았다.
“이 여자랑 결혼은 안 할 겁니다. 나 같으면요.”
그때는 장난으로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냥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날 밤의 세라를 떠올렸다. 당당했던 모습, 그리고 나를 사로잡았던 매력. 그러나 지금은 그런 그녀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열자, 선풍기가 여전히 같은 자리를 돌고 있었다. 마치 나의 정체된 감정처럼 느껴졌다. 핸드폰 알림음이 울렸고,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떴다. 통화를 누르자마자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지내? 상하이는 어때?” 내가 물었다.
화면 속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바쁘지만 나름 재밌게 지내고 있어.”
그녀는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찍은 사진을 내게 보냈다. 고층 빌딩이 보이는 화려한 창가 뷰. 하지만 나는 그 사진보다 화면 너머 그녀의 얼굴이 더 궁금했다.
“그래? 다행이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세라, 요즘 힘든 거 없어?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으면 말해줘.”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래?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분명 달랐다.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화면 속 그녀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창밖으로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바라봤다. 세라가 보여준 화려한 상하이의 야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진짜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랑은 믿음으로 완성된다는데, 나는 그녀를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믿고 싶어 하는 걸까?’
그 의문은 점점 더 커졌고,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믿음과 의심,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를 느끼며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