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빠르고 쾌적하며, 정시 운행한다. 그래서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개인적으로 버스보다 지하철을 선호한다.
지하철로 출퇴근 하면서 급하게 약이 필요할 때도 있다. 병원 처방으로 약을 짓는 것 말고, 가벼운 감기나 소화제 또는 상처 났을 때 등등..
이럴 때 내가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 역사에 약국이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따로 약국을 찾아가기보다 출퇴근 길에 약국에 들러서 필요한 약을 구매한다면 상당히 편하지 않을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생각은 실생활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하철 역사에 약국을 개설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직접적으로는 서울시 보건당국(서울시 및 자치구 보건소)이 불허했고, 아마도 그 뒤에서는 우리가 겉으로는 알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지상에는 약국, 의원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는 기득권층이 당연히 있다. 신규로 진입한 의사 약사가 시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한 지하철 역사에 약국, 의원을 개설하려고 신청했을 때, 기득권층이 반대했다. 자기들 영업에 지장을 줄까봐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약국 개설이 안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은 지하철 역사에 약국도, 의원도 개설이 자유롭게 가능하다. 하지만 이 역시 상당히 어려운 진통과 싸움의 산물이다. 내가 직접 겪은 이야기이니 함 들어보자.
내가 2019년부터 서울시 감사과장으로 있을 때, 감사원 및 중앙정부의 주도로 사전컨설팅이라는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서울시도 전국 어느 시·도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사전컨설팅 제도를 활용했다.
「사전컨설팅」이란 공무원이 행정행위를 함에 있어서 법과 현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에, 해당 공무원 또는 부서에서 사전컨설팅을 신청하면, 관련 위원회에서 현실에 적합한 해결방안을 모색하여 컨설팅해준다. 그대로 진행하면 결과가 설령 잘못되더라도 그 해당 공무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적극행정의 일종이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쌓아놓거나 방치하거나 무조건 안되는 방향으로 해서 국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생겨난 아주 좋은 제도이다.
실제 행정을 하다 보면 이러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공무원은 해주자니 법에 저촉될 수 있고, 안 해주자니 현실적으로 문제가 지속되고, 해당 민원인은 애가 타고, 정말 진퇴양난이다. 이럴 때 사전컨설팅을 신청하여 해결방안을 구하는 제도이다.
실제로 서울시에서는 건축물 이설로 인한 지장 전주를 누가 정비할 것인가? 구청이 해라, 코로나 19로 인한 급식 용역 관련 불가피한 경우이니 용역금액을 변경해줘도 된다, 코로나19로 급하니 소상공인 자금지원 절차를 꼭 필요한 것만 간소화해서 진행해도 된다, 오래전 철거된 주차건물을 구청이 직접 행정처리 해줘서 해당 상인들에게 과태료를 부과 안 해도 된다, 등등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사전컨설팅으로 말끔하게 해결해준 사례가 있다. 해당 공무원과 민원인 양쪽으로부터 정말 고맙다는 찬사를 들었다.
이렇게 사전컨설팅이 전가의 보도처럼 기능을 할 때, 문제의 그 건이 실체를 드러낸다. 서울교통공사로부터 지하철 역사에 약국 개설이 계속 안 되고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사전컨설팅 신청이 접수(2019.12.20.)된 것이다.
당시 과장인 나와 담당 변호사 그리고 경험이 많은 감사과 팀장님들의 검토 결과, 이것은 약국 개설을 안 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약국 개설은 등록제로 각 자치구 보건소장의 신고수리로 가능한데도, 당시에는 서울시 해당 자치구 보건소장들이 하나 같이 약국 개설 신고수리를 안 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에도 2곳에서 거의 동시에 약사들이 지하철 역사내 매장을 계약하고, 약국 개설을 소관 자치구에 등록신고를 하였는데, 보건소장이 계속 신고수리를 안 해주거나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그 전에 서울시내 지하철 역사에 6곳의 약국이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었음에도 신규는 안된다는 거였다.
참고로 약국 개설은 허가도 인가도 아닌 등록제이다. 약사법에서는 합법적인 건축물에 위치해 있으며, 병원과 같은 출입문을 쓰거나 병원 내이거나 병원과 직접 연결되지 않으면서, 조제실 등 필요한 시설을 갖추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조건만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이면 보건소는 응당 등록신고를 수리해줘야 하는 게 합리고 상식이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사항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해당 보건소에서는 지하철 역사가 건축물대장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법적인 건축물이라고 볼 수 없다. 건축물 대장을 떼어 오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건소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는 당시 우리시 보건당국(시민건강국, 당시 민간출신 의사선생님이 임기제 공무원으로 대빵임)에서 각 자치구에 내려준 공문이 근거였다. 합법적인 건축물인지를 면밀히 살펴서 등록수리 하라는 요지이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왜냐하면 건축법에 이미 지하철 역사는 합법적인 건축물로 인정되어 있다. 다만 거대한 복합적 건축물이므로 단일 건축물로 등재할 수 없으니, ‘지하철 역사 그 자체를 건축물로 의제한다’라고 규정상 명문화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물 대장은 존재하지가 않는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뗄 수가 없다. 지상의 단일 건축물과는 사정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각 보건소를 비롯한 우리시 보건당국이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당시 감사과장인 나는 이 문제는 우리시 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상위기관인 감사원에 사전컨설팅을 의뢰해서 전국 단위로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우리시 차원에서는 이렇게 판단한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감사원으로 사전컨설팅을 의뢰했다.
이러한 와중에, 1차로 당시 서울시의원 어떤 분이 나를 부르셨다. 전 서울시 어느 자치구 약사회장 출신이시다. ”그거 그렇게 처리해 주면 안 되니 다시 처리하라“ 하신다. 지하철 역사는 공기질이 좋지 않으므로 시민 건강을 위해 지하공간에서 약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럼 지하철 역사에 있는 그 수많은 식당, 빵집, 안경점 등은 어떻게 있다는 말인가? 그건 팔아도 되고? 더구나 당시는 우리시에서 지하철 역사의 공기질 개선을 위해 무단히 노력하여 지상보다도 더 깨끗한 공기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단호히 시의원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그건 절대 이유가 안 되니, 정말로 시민을 위하시고 형평성 있고 합리적인 의정을 하시려면, 오히려 시의원님께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방을 나왔다.
문제가 커지자 우리시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1,2부시장님 주재 하에 서울지하철공사, 시민건강국, 주택실, 교통실, 감사위원회 등 관련 기관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를 진행했다. 결론은 지금으로서는 불가하니, 향후 제도를 바꾸든지 건축물 대장에 등재할 수 있도록 보완하고, 지금 당장은 유보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서울시 약사회의 부탁이랄까? 민원이랄까? 혹시나 그러한 힘이 작용하여 이처럼 어이없는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했었다.
직급상 과장밖에 안 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그러한 논의의 부당함을 외쳤다. 법적으로 이미 안 해줄 근거가 전혀 없는데 유보쪽으로 결론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시민건강국을 감사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놓으면서... 행정1부시장님은 나에게 “강과장은 그만 이야기해”라고 호통치셨다. 결국 결론은 나지 않았고, 다시 검토해서 회의하기로 했다. 다시 회의가 열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감사원으로부터 사전컨설팅 결과(2020.7.15.)가 나왔다. 현재로서 아무런 제약이 없으므로, 건축물대장 미등재를 사유로 약국 개설 등록 신고수리를 안 해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이었다. 이어서 국토교통부는 이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 「도시철도 역사내 편의시설 설치 및 운영규정」을 제정(2020.12.15.)하여 확실히 못을 박는다.
서울시에 사전컨설팅을 의뢰하기 전부터 이 문제가 불거졌으므로, 5년여에 걸친 지난한 싸움이었다. 결국 정의(?)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 문제를 실무적으로 진행한 서울교통공사는 후에 적극행정 우수사례로 서울시장 표창과 국무총리 표창을 연이어 받는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그때 서울교통공사에서 실무를 총괄했던 분께서 나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하신다. “그때 너무 고맙고, 이런 공무원도 있구나, 감동 먹었었다고”.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쑥스럽게도...
2024년 8월 기준 서울시내 지하철 역사에 의원 9개, 약국 49개가 개설되어 시민이 언제든 자유롭게 이용함으로써 시민편의를 증진시키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 의원·약국들은 시민들의 퇴근시간을 고려하여 저녁에 연장 영업을 함으로써, 시민들이 늦은 시간까지 진료 및 처방을 받고 약국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당연히 시민들은 대 환영이다.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는 의사·약사에게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의원·약국을 개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서울지하철공사 입장에서도 기존 단순 판매 위주의 상가공간을 시민편익 공간으로 변화시켜, 상가의 가치가 제고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하나의 변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와 기회를 제공하는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 지하철 역사에 개설된 약국 모습 》
《 지하철 역사에 개설된 의원 모습 》
이 글을 쓰는 중에 최근(2024.8월) 서울교통공사에서 보도자료를 추가로 냈다. 지하철 역사에 의원·약국 등이 동시에 입점하는 「메디컬 존」을 여러 곳 더 만들겠다는 발표다. 병원과 약국이 함께 있고, 더구나 평일 저녁까지 그리고 주말에도 운영한다고 하니 시민 입장에서는 얼마나 이용하기 편리하겠는가?
어쩌면 약국 개설 문제만이 아니다. 환경은 빠르게 급변하고 있는데, 우리 법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변화로 행정처리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법이 있고, 감사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공무원이 하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 또는 민원인 편에서 일을 과감하게 해줄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내가 만약 그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냥 법이 그러니 안 된다고 할 것인가? 해주는 쪽이 합리적인데 법이 안 된다고 하고 있는데, 그것에 어떤 허점은 없는가? 달리 대안은 없는가? 혹시 다수의 힘으로 소수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등
공무원은 힘이 없다. 그러나 현실을 바꾸는 것은, 결국 공정하고 합리적인 공무원의 힘이다. 마침 사전컨설팅, 적극 행정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다. 나만의 힘으로 안 되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