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당신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우리는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상실을 겪는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죽음으로 인한 관계절단은 어떻게 해서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건 자연의 섭리가 꽤 잔인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됩니다. 수많은 인간찬가를 통해서도 ‘부활’만큼은 노력으로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죽음’을 남은 사람이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쉬이 하는 말 중에 ‘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재밌게도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지만 그 표현은 죽음을 ‘부정’. 즉 다른 형태로 ‘살아있음’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만큼 모순되는 문장도 없겠다 싶은 생각을 조금 해봅니다.
자신의 죽은 아들을 ‘신’의 힘을 빌어 살리고자 하는 ‘명선’의 생활을 그리는 영화였어요.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 ‘신’이란 존재의 그림자는 상당히 옅게 깔려있다는 점이었어요. 소위 종교나, 비현실적인 무언가를 다루는 장르를 ‘오컬트’라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지점보단 ‘종교를 믿는 자’의 처절한 삶에 관한 ‘드라마’ 장르로 받아들여집니다.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 이 문장 자체는 허황될 수도 있지만. 좀 더 넓게 개념을 확장하자면 ‘끊어진 인연을 다시 잇고자 한다’라는 식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고, 그렇게 본다면 그리 생소한 바람은 아닐 것이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바람을 위해 노력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대부분은 자신이 쏟아낼 수 있을 만큼의 모든 걸 시도하겠지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역시 그 상실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바람’… ‘기도’는 그 모든 노력은 무용한 것이 되곤 합니다.
‘네 마음속에 살아간다 ‘는 말을 다시 재인해 봅니다. 완전한 단절을 받아들이지만, 다른 심상에선 여전히 존재한다. 모순되지만 꽤나 위로가 되는 이 예시. 어쩌면 무용한 것이 될 ’ 기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믿음’의 마지막 발악일지도 모릅니다. 상실의 섭리를 역전하기 때문에 모순되는 말이 되는 것. 하나 ‘믿음’의 가치를, ‘노력’의 가치를 무색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것.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최후에 명선은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듯합니다.
그녀가 교주의 뒤를 이어 똑같이 눈을 잃고. 그 시야를 우리는 똑같이 체험합니다. 그 엔딩의 검은 화면에서 엄마를 나지막이 부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명선은 과연 아이를 만난 걸까요?
누군가는 명선이 믿음의 배신과, 삶의 고통에 의해서 광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군가는 참선과 삶의 고됨을 통해 깨달음을, 진리를 계몽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군가는 지극한 기도와 바람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겁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는…
‘신’은 믿음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기적 역시 바라는 사람이 있어야 ‘기적’이 되는 일이고요. 신도는 깨달음이든 구복이든 원하는 걸 이루어 준다는 바람이 있어야 무언갈 믿습니다. 신이든 진리든.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의 해답과 통찰을 주어야 하는 게 종교이며, 그 종교가 존재하기 위해 그 뜻을 따르며 귀의하는 게 신도의 삶입니다. 소위 ‘신뢰’ 관계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신뢰란, 서로의 책임을 위탁하고 필요에 따라 그 위탁된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인간의 그 ‘의’에 맞는 신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느 쪽이든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에서 아주 옅게 흘러나온 신의 광휘가 그녀에게 닿길 바랍니다. 이럴 때만큼은 ‘신이 하는 일을, 그 뜻을 인간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같은 문장이 적용되지 않길 바랍니다. 적어도 평범한 우리 같은 범인은 이해하지 못해도, 그 감겨버린 눈으로 아름다운 새로운 신세계를 보게 되었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