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홀로 사는 즐거움』, 샘터, 2004, p61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레들이 아니었다면 수도관이 터진 줄도 모르고, 물줄기가 약해진 것을 가뭄 탓으로만 돌릴 뻔했다. 득실거리던 벌레들에게 기특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연유도 모르고 귀찮게 여기면서 쓸어내버린 일이 미안하게 여겨졌다.
망가진 수도관을 잘라내고 이어 놓으니 물줄기가 다시 살아났다. 벌레들도 이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벌레들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가뭄 탓만 하면서 찔찔거리는 물로 불편하게 지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벌레들이지만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고 있는 인연으로 내게 말 없는 가르침을 보인 것이다. 이래서 꿈틀거리는 미물들에게도 다 불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