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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현 Nov 11. 2024

출근길 단상

소설/절망

전화기 너머로 숨 소리만 들려오고, 불길한 공백이 길어지고 있었다. 현선은 어떤 대답이 돌아올 지 예감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시선을 돌리면 마치 시간이 멈출 거라는 듯이.


“헤어지자.”


윤기의 말에 현선은 어렵게 입을 뗴었다.


“그게 최선이야?”


전화기 너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냐고, 현선이 알아들으라는 듯이 음절마다 끊어서 대답했고, 현선은 네가 그 정도의 남자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를 원망해야겠지, 라고 대꾸하고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사랑은 알기 쉽고, 편리하게 끝나 버렸다. 어떤 여운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현선의 배 속에 아이를 제외하고는.


현선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임신 삼 개월에 접어 들었다. 현선은 자주 생리불순을 겪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입덧이 시작되어 임신테스트를 했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선은 임신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윤기와의 관계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기 때문에, 평소와 다름없이 섹스 후에 윤기에게 임신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윤기는 갑자기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어울리지 않게 욕을 내뱉고는 자신도 당황했는지 뭐라 대꾸할 사이도 없이 옷을 입고는 갈게, 한 마디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현선은 윤기의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선은 자신의 자취방에 벌거벗은 채 홀로 남아서 쌀쌀맞은 윤기의 태도에 울었다. 임신 호르몬 탓에 감정 기복이 심했다. 현선은 보호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곧 바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윤기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두 사람은 현선이 일하는 서점에서 만났다. 작은 동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현선은 윤기가 대입 문제집을 살 때부터 보아 온 사이였다. 근처 학원을 다니던 윤기는 학원에서 쓰는 교재 외에도 다른 문제집을 살 때도 일부러 이 서점을 이용하곤 했다. 현선은 큰 키에 하얀 얼굴, 커다랗고 선량한 눈을 가진 단아한 사람으로 윤기가 평소에 알던 여자애들과 달랐다. 화장도 전혀 하지 않는지 소박한 그녀는 언제나 책만 읽고 있어서 학원가에서 떠도는 소문 같은 데 관심이 없는 부류로 보였지만, 이미 동네 첫 사랑 누나로 유명했다. 좀 나대는 아이들조차도 현선에게 말을 걸 땐 조신하게 굴었는데, 왠지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남자애들은 세상 물정 모르게 지켜주고 싶은 여자라며 학원가의 더러운 물이 들지 않도록 그녀 주변에 어정거리는 애들을 서로서로 단속했는데, 윤기는 혼자 조용히 학원을 다니는 부류라서 그런 분위기에 끼어들진 않았다. 원래 남자애들이 그러면 여자애들이 좀 아니꼬워하기 마련이지만 현선은 여자애들에게도 사랑받았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애들조차도 어릴 때 보던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그녀를 작은 아씨들의 큰 언니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면 마치 막내 동생처럼 귀여워해준다며 황홀해했다. 애정에 목마른 학원가의 공부 벌레들에게 현선은 산소 같은 존재였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정을 일깨운다는 것 만으로도 현선은 소중한 존재였다. 대학가기 전에는 노는 것도, 꿈꾸는 것도, 심지어 어리광도 금지된 아이들에게 나긋나긋하고, 상냥하고, 뭐든지 괜찮다고 말해줄 것 같은 선한 인상의 현선은 남자애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아름답다’는 단어를 쓰게 만들었다.


책을 읽기 편하도록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연필로 고정하고, 안경을 추어 올리며 현선은 소설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 주변으로 흘러내려서 간지러웠고, 8시간째 서 있느라 노곤한 상태라서 자신이 얼마나 추레할 지 생각하면 손님들을 마주보기도 부끄러웠지만, 손님이라곤 어린애들뿐이라서 기껏해야 자기 관리 못해서 결혼 못한 노처녀 이모 정도로만 생각할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비혼이 대세인 요즘, 그런 이모나 누나가 집안마다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아이들도 익숙할 거라고, 자기가 최소한 미친 여자처럼 보일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한 남자애 때문이다. 여럿이 몰려 다니며 친근하게 누나 누나 하는 남자애들과는 달리 혼자 문제집을 사러 오면서 무뚝뚝하게 돈만 건네는 애인데, 올 때마다 자신을 노려보았다. 현선은 괜찮은 척하려고 애썼지만, 한참 예민한 사춘기 남자애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게 보여서 대처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 애가 어느날 어떤 식으로 컴플레인을 걸 지,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수능을 본 직후였고, 학원가는 재수를 결심하고, 풀이 죽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오는 일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어디론가 자유롭게 놀러나가서 한산했다. 그 남자애가 들어왔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곧장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몇 시에 끝나세요?”


“네?”

현선은 이런 류의 질문을 숱하게 받아봤지만, 이 남자애의 의도만큼을 알 수 없어서 평소처럼 거절하지 못하고, 두 시간 후에 끝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때 같이 밥을 먹자는 제안을 어물쩡 받아들이고 말았다. 남자애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때 오겠다고만 말하고 나갔고, 그제서야 현선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가 나쁘진 않게 느껴졌다. 그 날은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남자애는 다른 애들과 다르게 어른스럽고, 사람을 쌀쌀맞게 쳐다보는 표정에 내심 서운함이 들만큼 호감이 가던 애였다. 자신이 25살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텅 빈 방에 누워서 현선은 윤기를 생각했다. 25살의 작가 지망생인 가난한 자신을 그 애가 진심으로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윤기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원 원장의 아들이고, 미대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실을 알았던 날 현선은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고, 순수 미술을 선택한 윤기가 자신도 그렇게 선택했다고만 생각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하고, 윤기네 집에서 몇 번 밥을 먹었을 때, 자신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거부하지도 않았던 윤기네 부모님이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윤기에게 몸을 허락했을 때, 쭈뼛거리던 태도에서 자신이 첫 여자인 걸 알았을 때, 윤기가 귓속말로 네가 첫 사랑이라고 했던 말을 운명처럼 믿었다. 윤기는 엄마 다음으로 누나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현재의 의붓 어머니가 아닌, 돌아가신 친어머니는 윤기에게 신앙 같은 사람이었으므로 현선은 윤기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덜컥 믿어버렸다.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의 예감과 기대와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나니, 자신의 처지에 윤기를 붙잡는다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사랑만을 믿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진심으로 믿었던 세계가 무너져 버리면서 현선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자신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로 계속 울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현선은 마음 속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울기만 했다. 뱃 속에 있는 아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랑의 결실이 아니면 이 아이의 존재는 무엇일까.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주제에 덜컥 아이를 낳아서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면 서점에도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일자리도 찾아야 한다. 그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누군가 돌봐주어야 한다. 현선은 이 모든 고민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느꼈던 행복이 돌연 착각이었고, 불행해지기 위한 위험한 전조였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모든 불행이 자신에게 쏟아질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자일 땐, 가난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꿈을 키워가는 예술가로 자부심을 느꼈는데, 아이로 인해 삶에 대한 통제감이 무너지고 여기에 남은 것은 섹스의 흔적이 남은 여자의 몸뚱이뿐이었다. 이제 자신의 꿈은 끝났다. 열정의 대가는 그녀를 살인자와 미혼모 사이의 기로에 놓았다. 이제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고, 윤기가 아빠가 되어줄 거라고 믿고, 설렜던 감정이 공포와 불안, 질식할 것 같은 슬픔으로 울렁거리며 북받쳐 올라왔다. 그리고 윤기는 여전히 윤기일 뿐인데, 이제 자신은 두 번 다시 현선으로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윤기를 만나기 전엔, 돈을 충분히 모으면 일본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몇 년 정도는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이색적인 문화와 사람들을 경험하고, 이방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일본은 한국과 가깝고, 그렇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정신 병원에 있는 엄마를 두고, 너무 멀리 갈 순 없었다. 현선의 엄마는 조현병 환자였다.



현선이 천안을 떠나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며 공부하는 동안에 엄마에 대한 아빠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엄마는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간신히 탈출해서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순대국밥 집에서 밥을 먹는데, 현선에게 연락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핸드폰을 켰다가 경찰에 신고한 아버지에게 걸리고 말았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엄마가 조현병 환자이고, 자살 위험이 있다는 말에 위치 추적을 해줬고, 곧이어 사설 구급대원이 와서 엄마를 병원으로 보냈다. 현선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이다. 아빠가 부담스러워서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던 현선은 아빠의 갑작스런 부고를 듣고서야 집에 가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엄마가 계속 정신 병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엄마를 찾아갔을 땐, 우울증과 잦은 탈출과 자살 시도로 중증 환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미 정신과 희망을 놓아버렸다. 현선이 찾아갔을 때, 엄마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 이제 들려. 네 아빠가 늘 하던 말처럼. 나 진짜로 미쳤어.”


엄마가 몸이 약하고, 정신질환자라며 사람들로부터 감춰 온 아버지는 엄마가 자기 자신으로 살려고 할 때마다 정신 병원에 가뒀다. 하지만 엄마는 몇 달 후엔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번엔 그럴 수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현선이 없어서 외로웠다고 말했다. 현선이 없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너무 무서웠다고 말하며 이상하게 계속 웃었다.


“나 살면서 웃는 게 소원이었어. 그런데 이제 항상 웃음만 나와. 머릿 속 소리가 늘 날 웃게 해. 그래서 듣지 말라고 하는데도 안 들을 수가 없어. 계속 웃는다고 간호사 선생님에게 혼나는 데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내 머릿 속 세계는 내가 늘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모험이 가득하고, 즐겁고, 아름다워.”


엄마는 넋이 나간 현선을 가만히 보더니 빙긋 웃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나 사실 이 소리가 현실이 아닌 걸 알아.”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현선은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엄마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전한 후 돌아서서 나오는데, 이 말 밖엔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이제 자유야. 언제라도 정신 병원에서 나오고 싶으면 나에게 말해. 그동안 엄마를 찾아오지 않아서 잘못했어. 미안해.”


엄마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사람의 쓸쓸한 모습이었다. 현선은 자신도 믿을 수 없도록 엄마를 방치한 게 너무 미안했지만, 자신도 살아남고 싶었고,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어서 엄마를 모른 척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선이 뭐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가 남긴 빚을 정리하고 나니 아파트에 들어간 전세금만 남았다. 현선은 그 돈을 한 푼도 쓸 수가 없었다. 엄마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든지 병원에 있을 수 있도록 돈을 좀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돈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현선은 엄마의 자식이었다. 아버지는 현선의 대학 학비도 한 번도 대준 적이 없었다. 사실 그래서 더더욱 집에 올 수가 없었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일해야 했다. 하지만 2학년 때 휴학을 한 후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먹고 사는 것 만으로도 힘들었던 현선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믿는 척할 수 밖엔 없었다. 그런 현선에게 아버지가 남긴 전세금은 큰 유혹이었다. 대학은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선은 꿈을 작게 가지기로 했다. 엄마를 더 이상 희생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넣은 사설 정신 병원의 폐쇄 병동에서 대학병원의 개방 병동으로 옮겨야 마음 편안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 쭉 학원가의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서점은 대학 동창의 언니 부부가 제테크로 운영하는 곳으로 부부가 다 맞벌이를 하고 있어서 대신 운영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현선은 최저시급을 받았을 뿐이지만 자기 가게처럼 운영했고, 아이들에게 잘해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기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사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책을 읽고 언젠가 일본에 다녀오고 운이 좋다면 작가가 되는 평범한 인생. 그 모든 것이 이제 끝나버렸다.



현선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열린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밤 공기가 쌀쌀했다. 재개발 지역의 텅 빈 집들 한 가운데 버티고 있는 이 건물은 인터넷에서 고른 가장 싼 매물이었다. 일층엔 집 주인 아들내외가 살고 있고, 삼층엔 주인 내외, 이 층을 통째로 자신이 쓰고 있었다. 재개발 공사가 지연되어 몇 년은 살 수 있을 거라며 집주인은 이 돈으로, 이렇게 좋은 집을 구한 것은 아가씨 복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허허 웃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 삼백만원 밖에 수중에 없었던 현선은 모든 게 그저 다 좋았다. 20평 짜리 큰 집을 채울 가구도 없었지만, 곧 부술 집이니 마음대로 쓰라는 말에 벽화도 그리고, 강아지도 키우고, 집 안에서 담배도 마음껏 피웠다. 가진 것은 자유뿐인 현선에게 정말 어울리는 집이었다. 처음 윤기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가 생각난다. 윤기는 이런데서 살아서 좋겠다고 말했다. 진심처럼 들렸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윤기는 현선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기서 첫 담배를 배울 거고, 첫 경험을 가질 거라고 말이다.


윤기는 현선의 몸을 좋아했다. 현선의 집에는 윤기가 자신을 그린 드로잉이 가득하다. 윤기는 자신의 그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돈을 위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며, 자신의 머릿 속에는 어릴 때부터 어떤 위대함의 느낌이 있었는데, 그걸 재연하는 게 꿈이라고, 조금도 도달하지 못한 지금의 그림은 쓰레기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현선은 윤기가 가고 나면 그의 드로잉을 차곡차곡 모아서 정리해 두었다. 현선도 윤기가 대단한 화가가 될 거라고 여겨서 제테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에 관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현선은 작품들을 자식처럼 여겼다. 창작을 잉태에 비유하곤 했다. 네가 낳았다고 네 껀 아니야. 자신의 생명력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가늠할 순 없지만 죽은 아기를 낳은 것처럼 쓰레기 취급하기엔 그 생명이 너무 귀중해. 난 윤기 널 사랑하듯이 네 작품들을 사랑해. 왜냐하면 그건 살아있으니까. 윤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곤 했지만 현선은 사실 그럴 땐 좀 윤기가 어린애 같아서 일부러 더 가르치듯이 말했다. 현선은 자기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싫었다.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물로 여기며 함부로 망가뜨리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윤기가 자신을 그렇게 대하게 될까봐 싫었다. 자신의 몸을 그리고, 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버려졌다, 마치, 자신을 그린 그림들처럼. 그 때 예감했어야 했다.



현선은 일어나서 거울 앞으로 갔다. 추워서 소름이 돋은 자신의 새파란 알몸은 낯설었다. 사랑받았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배로 향했다. 현선은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너의 생명력으로 자라고 있는 거니? 내가 널 키우고 있는 게 아니라? 나도 널 내 소유라고 말해선 안 되는 거니? 네가 스스로 네 운명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거니? 내가 널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나는 예술가가 될 자격이 없는 거니? 내가 해온 말들은 위선이 될까? 대답해봐. 살아있다면 말이야.”


현선은 자신의 억지가 우스워서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뱃 속에 아기에게 살아있다고 증명하라니, 아버지만큼이나 자신이 이기적이고,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율성은 당연히 빼앗을 수 있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다행히 아버지는 현선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의 관심을 오로지 아름다운 엄마에게 향해있을 뿐이었다. 엄마는 나이답지 않게 곱고, 어린애 같았다. 아버지와 스무살 차이가 나는 엄마는 아주 어릴 때 결혼하셨고, 한 번도 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린애 같은 여자를 원했다. 여자는 생각할 필요도, 뭔가를 이룰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그리고 자식조차 원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길 바랬을 뿐이다. 그런데 원치 않는 내가 들어섰고, 엄마는 처음으로 아버지에 맞서 완강하게 버텼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날 낳고 엄마는 산후조리원이 아니라 정신 병원에 갇혔다. 산후 우울증이라는 그럴 듯한 이유로 병원에 들어간 후, 삼 개월 만에 돌아온 엄마는 낳자마자 날 혼자 둔 게 미안해서 더 이상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했다. 내 옆에 있기 위해서. 엄마는 나를 갖자마자 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그랬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연결된 느낌을 받았고, 운명을 느꼈다고 했다. 뱃 속의 아이가 얼마나 연약한지 온몸으로 깨달았던 엄마는 자기 자신이 이 아이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이 아이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을 직감했고, 처음으로 책임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엄마는 결국 나를 낳았고, 백일 동안 정신 병원에 갇혀 있어야 해서 나와 함께 있을 순 없었지만 온몸으로 나를 지켜주었다. 아버지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분이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나 때문에 아버지에게 맞서서 정신 병원을 들락날락 해야했다. 하지만 돌아올 때마다 엄마는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엄마, 돌아왔어. 걱정하지마. 엄마 건강해.”


나는 엄마가 건강하길 절실하게 빌었다. 엄마가 없으면 내가 어른이 될 수 없을 거라고, 공부는커녕 이 집에서 말라 죽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살기 위해서 엄마를 사랑했다. 그리고 대학을 가자마자 엄마를 버렸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구도 지킬 수가 없었다.



현선은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라면, 엄마는 어땠을까? 아버지가 감금한 게 아니라 엄마를 버렸다면 엄마라면 어땠을까? 현선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엄마는 말했다.


“나는 이런 원피스보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싶어. 그리고 시장에서 가서 과일을 팔 거야. 시장에 가면 할머니들이 날 부르며 ‘예쁜 아가, 이거 하나 먹어볼래?’하고 귤을 쥐어 주시던 게 생각나. 나도 그럴 거야. 그리고 옆구리에 널 끼고 앉아서 과일을 팔 거야. 사람들이 너보고 너무 예쁘다고 하면 귤 하나 더 줘야지. 그리고 저녁이 되면 너와 함께 조그만 집으로 돌아갈 거야. 방은 한 칸만 있어도 돼. 엄마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아. 어릴 땐 네 장난감, 조금 크면 네 책으로만 채워도 돼. 어른이 될 때까지 네 방에 엄마가 조금만 얹혀 살게. 엄마는 잠시라도 널 보지 않으면 숨이 막혀. 그러니까 방이 두 개인 건 싫어. 대신에 네 친구들이 놀러오면 엄마가 찜질방에 가서 잘게.”


이건 엄마의 절실한 꿈이었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항상 내 손을 잡고 울었다. 엄마가 이렇게 살아서 미안해. 아가, 엄마가 네 엄마라서 미안해.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내가 어떻게 할 지도 알 것 같았다. 윤기를 만날 때 입었던 원피스 대신 청바지와 티셔츠를 옷장에서 꺼내 입었다. 그리고 부엌에 가서 전기밥솥을 열어 보았다. 밥이 조금 남아 있었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그리고 먹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꼭 꼭 씹어서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나서 화장실로 가서 양치질을 했다. 그 다음에는 할 일이 더 이상 없어서 전화기를 들고 엄마가 있는 정신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핸드폰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핸드폰은 정말 나쁜 거라고 그랬다. 어디에 있든지 아버지가 전화를 하고, 감시하는 도구였을 뿐이니, 엄마에겐 정말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걸 보면서 큰 나도 핸드폰을 보면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순대국집에서 나에게 전화를 했을 때, 내가 집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나는 핸드폰을 사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다. 엄마를 책임지기 싫었던 걸. 엄마의 슬픔을 듣는 것이 지겨웠고, 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었다. 나는 부덕했다.


부덕한 나는 전화기 버튼을 꼭 꼭 눌렀다. 간호사 선생님에게 사정을 해서 간신히 엄마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엄마를 붙잡고 있을 순 없다는 걸 알았지만, 말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입을 열었을 때 엄마는 전화기 너머에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마 하고 대답을 했고 나는 전화가 앞에서 오열을 했다.


“엄마, 우리 과일 장사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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