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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현 Nov 16. 2024

출근길 단상

소설/사랑이 모두 끝난 세상 

세희는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암막 커튼으로 여태 가리고 있던 하늘과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열기가 먼지처럼 여기저기 달라붙는다. 세희의 얼굴과 몸도 노란 빛으로 물들며 따뜻하다는 느낌은 점점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목덜미로 땀이 흐르고, 곧 속옷이 살에 달라붙어 축축할 정도로 젖어 버렸다. 세희는 옷을 벗었다.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고,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마저 벗어버리고 몸에 악세서리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벗은 몸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자 집 조차도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희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쇼파와 TV 밖에 없는 단조로운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처럼 적막이 흘렀다. 거실창을 가리고 있는 암막 커튼 때문에 방에서 밀려나온 빛은 점점 사그라들고, 숨 막히는 더위만이 거침없이 흘러나와 세희를 따라나섰다. 방 안에 있을 때보다도 더 갑갑해진 세희는 현관문으로 달려가서 집 밖으로 나갔다. 


집 안에서부터 따라나와 뭉쳐진 암 덩어리처럼 몸을 꾹 누르던 더위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훅 하고 빠져나가며 다시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뜨거운 열기는 여전하지만 갇히고, 닫히고, 막힌 느낌이 전혀 없이 자유롭게 내리쬐는 햇빛은 더 이상 세희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앞으로 나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느낌이어서 걷기 시작했다. 길거리에는 세희처럼 탈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문명의 흔적을 모두 벗어버리고, 햇빛 아래에 알몸으로 서서 자신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 양 오감을 활짝 열고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누구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문명의 저주는 깨져 버렸고,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성욕을 느끼거나, 자기 변명을 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없었다. 침묵과 자연스러운 한숨, 그리고 과거조차 태워버릴 듯한 열기뿐이었다. 이브를 창조하기 이전의 아담들처럼 모두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모두 끝나버리고 난 후의 일이다.



십 년 전, 세희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인연은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술관에서 그 남자와 마주쳤을 때, 앞으로 두 사람의 인생이 긴밀하게 엮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감했다. 처음부터 남이 아니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복잡한 과정은 서로를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함께 걸으면서 그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똑 같은 영혼에서 흘러나온 말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내막과 뉘앙스, 앞으로의 전개까지 이미 알 수 있었다.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라면 하지 않을 개인적인 농담도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잘 통했다. 페르소나는 있으나 마나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꿰뚫어볼 수 있었고, 서로가 아직 전하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짐작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미술관을 나선 두 사람은 남자의 집으로 갔고, 처음 성을 경험한 어린 아이들처럼 서로를 탐닉했다. 섹스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자신의 일부를 탐색하듯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알아나갔다. 세희는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춘 듯이 말하고, 웃고, 움직이는 남자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남자의 집을 나설 때, 세희는 자신의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않았고, 깊이 잠든 척하는 남자도 굳이 세희를 붙잡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청소를 하는 세희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기 위해서 노량진 학원가 근처로 막 올라와 자취를 시작한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세희의 머릿 속에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광경이 그려졌다. 남자는 세희를 보기 위해서 미술관으로 찾아오고, 청소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남자는 세희가 지고 있는 고단한 삶의 무게에 뒷걸음질 치게 될 것이 뻔했다. 세희는 미술관을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남자는 세희와 미술관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세희는 다시 남자의 집으로 오겠지만, 어느 날엔가는 남자가 보고 있는 수험서들이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테고, 자신이 지고 있는 불안한 삶의 무게에 뒷걸음질 치게 될 것이 뻔했다. 남자는 다신 미술관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남자와 헤어진 후 항상 절반이 무너진 조각상처럼 살아오다가 세월이 흘러서 그 자체로 완전해지고,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 것처럼 벅찬 기분으로 세희는 걷고, 또 걸었다. 길 위에서 세희는 점점 더 완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그 남자가 유일한 남자는 아니었다. 세희는 여태까지 세 명의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을 했고, 이 세상의 사랑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그 남자는 법적으로 세희의 남자였다. 처음엔 그 사람을 사랑했다. 남편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랑의 크기는 달랐고, 세희의 사랑은 점점 쪼그라들어서 남편의 사랑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때 깨달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사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일이라는 것을. 어느 날,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채로 잠에서 깬 세희는 자신이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잠에서 깬 남편이 자신을 타고 오르자 겁탈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법적으로 두 사람은 부부이기 때문에 세희는 남편을 거부할 수가 없었고, 마치 팔려 온 여자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 때, 자유를 잃었다.



지금쯤 남편도 직장이든, 어디서든 사랑이 모두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사랑이 종식되었으니 더 이상 세희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이젠 이해할 것이다. 세희의 남편은 여자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남자였다. 세희를 안는 것은 사랑을 하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혼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에 두 번 반드시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침, 저녁 출퇴근할 때마다 앵무새처럼 반복되었고, 세희가 아기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변함없었다.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이 남편의 믿음이었다. 어느 날, 밥을 먹다가 강요당한 행복과 거짓 웃음에 지쳐서 세희가 단 한 번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사랑은 노력이 아니야.”


남편은 그 말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그 날 세희를 세 번 안았고, 거칠게 대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세희가 우울한 기색만 보여도 무조건 안았다. 그런 남자였다. 영혼 없는 삶이 이어졌고, 사랑이 이렇게 힘들고, 슬픈 거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세희는 헤어지길 바란 게 아니었다. 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서로의 삶을 보듬으며, 서로를 다시 알아가길 바랬던 건데, 남편에게 세희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 걷는 동안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고 기대가 은근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사랑이 완전히 종식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다수가 이겼다. 아직 집 안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모두 끝났음을 말이다. 그 때, 세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세희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땀에 흠뻑 젖은 채 자신 앞에 서 있는 남편을 마주 보았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니었다. 또 다른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술관에서 만났던 그 남자라는 것을. 그 남자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땀에 흠뻑 젖은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세희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부끄럽다는 듯이 자신의 옷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두 남자를 멀거니 쳐다만 보았다. 오래전, 자신을 붙잡지 않았던 남자와 평생 자신을 소유했던 남자가 지키고 있는 유산이 사랑이었던 걸까? 그래서 지금 사랑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걸까? 하지만 두 사람은 감히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며 세희를 강제로 붙잡을 순 없었다. 세희는 새로운 물결에 힘입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은 모두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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