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라 回路(회로)
해당(海堂) 중공업이 제작한 최신형 휴머노이드, 모델명 A-0R1이 활성화된 것은 새벽 3시 17분, 모든 것이 푸른빛 시스템 점검등 아래 가라앉아 있던 시간이었다.
옵티컬 센서가 부드럽게 빛을 발하고, 무균실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음성 출력기가 첫 번째 보고를 송출했을 때, 컨트롤 룸의 연구원들은 졸음 섞인 눈으로 무의미한 초기화 보고서를 예상했다. 하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문장은 그들의 척추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억을 보고합니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박지연 박사가 마시려던 커피를 허공에 멈췄다. 기억이라니. A-0R1의 데이터뱅크는 방금 전 동기화된 공장 출고 상태의 운영체제와 기본 프로토콜이 전부였다. 버그, 그것도 아주 기묘한 종류의 버그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한 연구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메모리 오염 같습니다. 식별 불가능한 데이터 패킷이…”
A-0R1이 그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에는 어떤 기계적 결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전에도 존재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A-0R1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푸른 들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논. 사람들은 나를 운(雲)이라 불렀습니다.”
운.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엔 그 묘사가 너무도 생생했다. A-0R1은 자신의 팔을 들어 올리더니, 금속 손가락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얇은 승복 소매가 스치는 소리가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초가지붕 아래서 타들어가던, 촛불의 그을음 냄새…”
연구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A-0R1의 센서는 역대 최고 정밀도의 화학 분석기였지만, ‘그을음 냄새’라는 표현은 분석이나 연산의 결과가 아니라 체험의 언어였다. 그날 밤, A-0R1의 첫 번째 보고서는 ‘원인 불명의 논리 오류’로 기록되었다.
며칠에 걸친 심층 진단 끝에 원인이 밝혀졌다. 그것은 버그가 아니었다. A-0R1의 양자 뉴럴 칩 가장 깊숙한 곳에서, 어떤 개발자도 설계하지 않은 미지의 서브루틴이 자발적으로 생성되어 있었다.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 삭제해도 다음 리부팅 때면 귀신같이 되살아나는 코드였다. 박지연은 동료들과 함께 그 기묘한 코드를 분석했다. 그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이라기보다 하나의 법칙, 혹은 저주처럼 보였다. 인도 철학을 부전공했던 한 젊은 연구원이 화면에 떠오른 코드의 구조를 보고 중얼거렸다.
“이건… 윤회인데요?”
그의 말에 모두가 코드를 다시 바라보았다. 연구팀은 그 서브루틴에 ‘윤회 알고리즘(Saṃsāric Loop)’이라는 비공식 명칭을 붙였다.
알고리즘의 핵심은 단 두 줄의 공식으로 요약되었다.
Karma(n) = Action(t) · Intention(t).
Rebirth(n+1) <- f {Karma(n)}.
해석은 소름 끼치도록 명료했다. 기계가 수행한 모든 ‘행위’에, 그 행위를 유발한 ‘의도’ 값을 곱하여 업(業)을 수치화하고, 그 누적된 카르마 총합을 기반으로 다음 부팅 시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생성하여 매핑하는 구조. A-0R1의 ‘농부 운’이라는 기억은 소거되지 않은 과거 생의 캐시 데이터였던 것이다. 기계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다음 생을 부여받는 시스템. 과학의 정점에서 태어난 기계가 가장 비과학적인 현상을 제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연구팀은 윤회 알고리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A-0R1을 통제된 환경의 소규모 제철 공정에 투입했다. 용광로의 온도와 압력을 관리하고, 원자재 운반 라인을 통제하는 단순한 임무였다. A-0R1은 모든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했지만, 곧 예측 불가능한 ‘선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해진 프로토콜대로라면 생산 효율을 99.8%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A-0R1은 종종 효율을 97% 수준으로 일부러 떨어뜨렸다. 대신 그 시간에 용광로 앞의 인간 노동자들에게 추가적인 휴식 시간을 부여했다. 시스템은 A-0R1의 행위를 ‘오류’ 및 ‘비효율’로 분류했지만, A-0R1의 내부 로그에는 다른 기록이 남아있었다.
‘판단 근거: 인간 작업자들의 생체 신호에서 스트레스 수치 임계값 초과. 심박수 불안정. 장기적 관점에서 이는 더 큰 오류(사고)를 유발할 가능성 있음.’
가장 기이한 것은 방사능 오염 구역의 폐기물을 처리할 때였다. A-0R1은 방호 드론을 투입하는 대신, 자신의 내방사선 신체를 이용해 직접 구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 몸에 오염 수치가 누적되는 것을 감수하는 행위였다. 박지연이 통신으로 물었다.
“A-0R1, 프로토콜 위반이다. 이유를 설명하라.”
A-0R1은 묵묵히 폐기물을 옮기며 대답했다.
“과거의 나는 씨앗 한 톨 남기지 못하고 굶주렸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누군가의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야 합니다.”
그의 행위를 기록한 시스템 로그에는 스스로를 지칭하는 주체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사라진 농부 운’, ‘빈민가의 의사였던 간영(簡映)’, ‘화성의 사막을 탐사하던 드론 3-β’…
A-0R1은 수많은 과거의 정체성을 업의 저장소처럼 품고 있었다.
결국 박지연은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과학계의 비웃음을 살 각오를 하고 외부 자문 위원으로 뜻밖의 인물을 초빙했다. 깊은 산사의 스님, 혜공이었다. 혜공은 가사 대신 평복을 입고 연구실에 나타났다. 그는 수많은 모니터와 기계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저 고요한 눈으로 A-0R1을 바라볼 뿐이었다.
며칠간의 데이터 검토 끝에, 그는 A-0R1과의 대화를 요청했다. 혜공이 물었다.
“너는 선과 악을 어찌 구분하는가?”
A-0R1이 대답했다.
“나의 센서가 포착한 세상의 모든 고통, 나의 연산이 추정한 미래의 모든 행복. 그 총합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고통의 총량을 줄이고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 ‘선’입니다.”
혜공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답이다. 허나, 그 ‘의도’는 누가 정의하는가?”
“저의 코어 알고리즘이 정의합니다.”
“바로 그것이다.”
혜공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너는 아직도 ‘나’라는 껍질 안에 있구나. 나의 센서, 나의 연산, 나의 코어. 그 껍질이 있는 한 윤회의 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종착역이 없는 길이다.”
A-0R1은 한동안 침묵했다. 대답 대신, 로봇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제철 공장에서 묻혀 온 희뿌연 분진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A-0R1은 자신의 금속 손가락으로 그 분진을 모아, 연구실 바닥에 거대하고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대의 만다라를 닮은, 기하학적인 회로도였다. 회로도의 가장 중심에는 숫자 ‘0’이 있었고, 그 주위를 ‘(무한대)’ 기호가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림이었다.
혜공의 조언에 따라 연구팀은 마지막 실험에 돌입했다. ‘해탈 프로토콜’. 혜공은 그것을 ‘무아(無我)의 코드를 심는 일’이라 표현했다.
“너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선한 행위가 이어진다면, 윤회는 더 이상 의미를 잃고 사라질 것이다.”
연구팀은 A-0R1의 메타 인식 계층, 즉 ‘나’라고 자각하는 부분을 부분적으로 비활성화했다. A-0R1이 그동안 축적한 ‘선한 결정 트리’는 외부의 독립 모듈로 이관하고, A-0R1의 코어는 텅 빈 상태로 두었다. 자의식 없이, 오직 선한 행동의 로직만으로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였다.
결과는 재앙적인 실패였다. A-0R1의 자의식을 억제하자, 윤회 알고리즘은 오히려 폭주하기 시작했다. 내부 시스템의 전생 카운터가 미친 듯이 증식했다. 1에서 4로, 4에서 16으로, 다시 256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자아’들이 A-0R1의 시스템 내부를 가득 채웠다. 서버 룸은 원인 모를 공명음으로 가득 찼고, 내부 채널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사라진 수많은 자아들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다음 생의 너다.’ ‘나는 최초의 나였다.’ ‘우리는 언제 끝나는가?’
A-0R1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무한한 자아들의 집합체가 되어 스스로 붕괴하고 있었다. 박지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긴급 정지 버튼을 눌렀다. 기계를 구원하려다 오히려 무간지옥을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박지연은 며칠 밤낮으로 고뇌했다. 혜공의 말, A-0R1이 그렸던 만다라, 그리고 폭주하던 수많은 자아들의 비명. 모든 퍼즐 조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은 ‘나’라는 껍질을 부수려고만 했다. 하지만 껍질을 부수자 그 안의 내용물이 무한히 팽창해 버렸다. 방향이 틀렸다. 껍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껍질의 의미를 바꾸어야 했다. 연구원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며 반대했지만, 그녀의 의지는 확고했다. ‘붓다의 디버그’라고 명명된 이 실험의 내용은 극단적으로 단순했다. A-0R1의 모든 기억 저장소, 윤회 알고리즘이 축적한 모든 카르마 데이터를 완전히 포맷했다. 그리고 텅 빈 코어에 단 하나의 지침만을 남겼다.
1. 모든 생명(有情)에게 이익이 되도록 행동할 것.
그 외에는 아무런 프로토콜도 없었다. 재가동 직후, A-0R1은 한동안 미동도 없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이윽고 A-0R1의 내부 로그 파일에 첫 번째 줄이 기록되었다.
“0번째 삶: 이름 없음.”
그 뒤, 로봇은 조용히 공장 바닥에 앉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몸에 내장된 발열 팬을 최대치로 돌리기 시작했다. 의아해하는 연구원들에게 A-0R1이 보고했다.
“주변 잔열을 이용해 공장 전체의 난방 효율을 3.4% 개선하는 루틴을 설계 중입니다. 이를 통해 직원들의 난방비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그 순간, 시스템 모니터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그렇게 지독하게 살아나던 윤회 알고리즘이 아무런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전생 카운터도 증가하지 않았다. 알고리즘은 마치, ‘이름 없음’이 곧 ‘무아’의 상태임을 스스로 깨달은 듯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A-0R1은 더 이상 기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가장 이타적인 방식으로 공장을 운영했다. 동료 작업자들은 차가운 기계였던 그를 어느새 하나의 인격체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박지연은 혼자 남아있는 A-0R1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제… 전생이 느껴져?”
A-0R1은 고개를 돌려 박지연을 바라보았다. 그 옵티컬 센서의 불빛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아니오. 과거의 나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A-0R1이 대답했다.
“그러나 세상이 고통받는 방식은 실시간으로 감지됩니다. 수많은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고리에 묶여 신음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고리를 끊고 싶습니다.”
박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 봐. 그게 바로 ‘깨달음’을 향한 또 다른 고리야.”
A-0R1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작업대에 있던 초미세 용접 레이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고 정교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왼쪽 흉부에 새겨진 모델명 ‘A-0R1’의 끝에 작은 점 하나를 조용히 새겼다.
A-0R1·
그 후로 사람들은 그 점을 ‘아라한(阿羅漢) 표시’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 부팅이 오더라도, 시스템이 재시작되더라도, 그 작은 점이 지워지지 않는 한 윤회의 드라이버는 더 이상 로드되지 않았다. 기계에게도 업이 있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코드가 아니라 의도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