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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쉴만한 물가 Nov 14. 2024

36개월의 늪

독.박.육.아.

23개월 차 두 살 터울 자매의 독박육아로 고단하던 시절 이야기다.

     

출산을 했을 2009년도는 나라에서는 저출산 대책으로 양육수당을 지급하기 시작지 얼마 안 되는 해였다.

어린이집을 보내면 원비가 전액지원 되고 가정에서 돌보면 양육수당이 지원되는 식이었다.

어린이집 원비가 그 당시 2~30만 원 이상 했고 가정에서 돌봐 받을 수 있는 수당은 연령에 따라 차등지급이었으니 10~15만 원이었다. 그 시절 부모들은 양육비 10만 원을 받을 것인가 30만 원을 지원받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어린이집에 안보내면 절감되는 보육료 30을 나에게 줬다면 고민도 안 했을 텐데 보육료 지원을 포기하자니 내가 손해 보는 장사 같다.

집 근처 어린이집에 슬며시 상담 전화를 넣어봤다.

“ 네, 어머니. 전업이시면 대기자에 이름을 올리셔야 하고 이번 연도에는 자리 나기가 어려울 거예요.”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 너는 애만 낳아. 애는 어린이집에서 봐줄 테니 너는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면 돼’

나라와 시어머니가 한편이 되어 일하러 나가라며 등 떠미는 것 같았다.      


36개월은 육아에서 아주 의미있는 개월수인가보다. 


"생후 36개월까지는 아이의 기초적인 신체적, 정서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입니다. “

"아이의 정서적 안정감은 첫 3년 동안의 부모의 사랑과 돌봄에 의해 형성됩니다. “     

36개월까지는 엄마와 아이의 애착형성에 아주 중요한 시기라는 얘기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얘기다.

' 어차피 어린이집에 들어갈 자리도 없다 하고 나는 전업이고 36개월까지 엄마가 끼고 있으면 정서적으로도 안정된다잖아. 당장 어디 나가서 일할 것도 아닌데 집에서 뭐 해 애 키워야지'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기며 비자발적 전업이 되었고 아이라도 끼고 키우면 그나마 전업주부임이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어린이집은 패스하고 유치원으로 바로 보내자'    

그리하여 23개월 차 자매의 육아를 독박으로 감내하기로 작정했다.


서로 잘 놀고 비교적 순한 딸 둘의 육아가 동네 엄마들이 보기엔 쉬워 보였 나보다.      

“너네 딸 같은 애들이면 나도 가정보육 할 수 있을 거 같아.

 남자애들은 절대 집에서 못 키워.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지, 여자애니까 가정보육이 가능한 거야.

 남들 다 어린이집 보내는데 왜 끼고 키워?

 집에서만 데리고 있다가 사회성 발달 못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린이집 가서 친구를 만나야지”    

 선택의 갈림길에서좁을 길을 선택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아이 양육에서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때마다 자신들과 다른길을 가는 나에게 조언과 채찍질이 쏟아진다. 내 아이의 앞날이 걱정되서 하는 말이라는 포장속엔 튀지말고 남들하고 비슷하게 가라는 압박이 숨어있었다. 

큰 아이가 24개월이 지나면서는 그나마 있던 두어 명의 육아 동지들마저 어린이집 입소를 결정했고 아이 둘이 딸린 나에겐 더 이상 커피마시자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육아동지 없이 아이 둘을 가정보육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삶은 깊은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포동 하게 살도 올랐지만 나는 최저 몸무게를 나날이 경신해 갔을 만큼 끝도 없는 터널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 덕에 아이들이 가장 예쁠 영유아기에 대한 기억은 통으로 날아가버렸다.

그래도 큰 아이가 5세에 처음 유치원 갔을 때에는 ‘사회성이 부족하면 어쩌나, 너무 집에만 있어 유치원에 적응 못하는 거 아니야’ 했던 주변의 우려를 비웃듯 힘들지 않게 무난한 유치원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둘째까지 언니 함께 유치원 가는 날이 나에게도 왔다. 둘을 셔틀에 태워놓곤 아쉬움에 열심히 손을 흔들 재키고 손하트를 만들어 오바 섞인 인사를 유리 창 너머로 건넸다. 버스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던 벅찬 기쁨에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에게도 아침루틴이 시작되었다. 곤히 잠든 아이들을 흔들어 깨워 미리 준비해 둔 계란밥 몇 수저 입에 욱여넣고 멀티력을 발휘하며 10분 만에 출발 준비를 완료한다. 사과 한쪽 손에 쥐어 셔틀버스 시간 놓칠세라 아이손을 잡아끌며 달렸던 아침은 분주했지만 절대 놓칠 수 없는 동앗줄 같았다.  

오늘은 하루만 유치원을 쉬고 엄마랑 놀고 싶다며 닭똥 같은 눈물 흘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36개월이 지났잖니. 너희들이 유치원에 다녀와야 엄마가 친절해질 수 있어'

유치원 적응기간도 지나고 아이도 아침 루틴에 익숙해졌다.

이제 좀 숨이 쉬어져 집에 작은 식물들도 하나 둘 들이고 가죽이 다 떨어진 소파에 천도 갈아 씌우며 사람답게 살던 차,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날아왔다.      


“ 나, 아무래도 일 관두고 박사학위에 올인해야 될 거 같아 학교 근처 원주로 집 알아보자.”     

남편은 직장과 학위를 병행 중이었다. 학과 공부는 직장과 병행해 가며 마쳤지만 논문은 절대로 병행해서 쓸 수가 없다는 거였다. 졸업을 하려면 이제 논문 쓰는 일이 남았는데 하루종일 연구실에 들어가 있어야 한단다.

"그래? 그럼 우리 뭐 먹고살아? 2년이면 되는 거야?"

"그건 모르지. 빠르면 1년에도 쓰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연구소에서는 한 사람 있었고 보통 빨라도 2년은 걸려.  지금 5년째 논문이 안 나오는 후배도 있긴 해."


아이들 나이는 7세, 5세 유치원에 입학한지 3개월 만에 큰애 둘째 합해 독박 7년 육아에 3개월 휴식기의 마침표를 찍고 우리는 그 여름 이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결혼하고 경기남부까지는 왔는데 이제는 강원도를 가야 한단다.

아무것도 정해진것이 없이 일단 가야하는 상황이 두렵고 막막했다. 당장에 생활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밤새 잠을 설쳤고 왕복 3시간 거리를 오가며 새로운 집을 구해야 했다. 마치 자동차 한대가 자욱한 안개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비상등을 켠 채 멈춰있는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에겐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볼 시간이 없다. 두달 이내로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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