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길이라는 것은 물리학적으로는 엔트로피의 증가 (모든 물질은 시간이 흐르면 무질서한 형태로 바뀌어간다. 망가지고, 부패하고, 어지러워진다)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기계적 시간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참고하여,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추상의 개념이다. 시간을 지킨다는 것도 절대적인 시간을 지키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사회의 동의 하에 만들어 논 기계적 시간을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계가 없던 수백 년 전에도사람들은 기계적 시간없이도 만날 약속을 잡았다. 시간은 사회의 약속일 뿐이고, 시간의 길이라는 것은 그저 생각 속에 있을 뿐이다.
얼마 전 은퇴를 맞이한 나는 30년이라는 시간의 덩어리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 크기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닌데도, 대하드라마도 될 법한 시간의 길이인데, 그럴듯한 서사조차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몇 장면이 떠오를 뿐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은, 지나간 시간을 한꺼번에 기억 못 하는 인간의 뇌의 저장능력 때문인 거 같다. 아마도, 사건이나 장면의 흐름을 좀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면, 시간은 길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충격적인 장면과 사건을 경험하면, 그때의 장면 하나하나, 사건의 과정 하나하나가모두기억되고, 결코 짧지 않은 과정으로 느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이 될만한하루를, 일주일을 만들어야 한다. 사건 사고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일상의 기억에 매일 다른 색을 입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만나지 않던 친구를 만나보고, 가보지 않았던 마트에 가보고, 읽지 않았던 책을 사보고, 입지 않았던 옷을 입어보고, 먹어보지 않았던 음식을 먹고.. 우리의 뇌는색다른 경험을 통해서, 기억을 늘리고, 과거의 시간의길이를 길게 늘인다.
우리의 망가진 기억력 때문에, 오랜 과거의 시간을 짧게 느끼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면,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는 내가 조정해 볼 수 있다. 오늘 하루가 길어지려면, 무언가를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리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길고 지루하다. 거기에서 지루한 것만 빼면, 우리는 온전히 시간을 길게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저녁때 만날 술친구들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정신없이 일만 하며 보내는 하루보다 길고 덜 지루할 것이다. 주말 로또 당첨을 기다리고 있다면, 허황되지만, 행복한 기대감으로 조금은 밝은 일주일이 될 것이다. 지루함을 걷어낸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시간을 의미 있고 흥미 있는 무엇으로 바꿀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너무 바쁘거나, 너무 재미있으면 안 된다. 적당한 기다림이 주는 시간 연장 기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담담히기다리는 하루하루의 삶".. 이것이 내가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는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