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저녁 무렵이 되자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의 사이클에 들었다.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면 이성을 꽁꽁 묶어 버리고 차갑고 깊은 심해처럼 가라앉는다. 그럴 때면 좋아하는 영화도 보기 싫고 좋아하는 음악도 듣기 싫고 걷는 것도 싫고 잠을 자는 것도 싫고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감정이 완전히 이성을 지배해 버리는데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빨리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생각해 본다.
이 우울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원인을 분석해 본다.
현재 나를 가장 우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생각하면 나의 꿈을 잃었고 본의 아니게 소속 집단에서 밀려났다는 것이 가장 우울하다. 면접에서 나를 두 번이나 떨어뜨린 학술교수와 학술교수보다 우위에 있어 얼마든지 합격과 탈락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정교수님이 원망스럽다. 거짓으로 중상모략을 하여 나를 밀어낸 이들도 용서가 안된다. 묵직한 돌에 맞아 가슴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평생 못 잊을 가장 괴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 가족중에서 역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한명이 원하는 대로 이룬 바가 아직 없다는 것이 나를 매우 슬프게 한다.
속상하고 슬프고 우울하다. 술도 잘 못 마시고 마실 수 있는 술이라고는 달달한 샴페인이나 맥주밖에 없어서 샴페인은 혼자 먹기도 그렇고 비싸고 만만한 캔맥주 350ml 한 캔을 집에 들어오다가 마트에 들러서 사 왔다. 안주는 만두에 매운 치킨너겟에 라면에 푸짐했지만 하이트 캔맥주 350ml 한 캔을 비우기에도 버거웠다. 처음에는 마실만하다가도 밑으로 갈수록 너무 써서 삼분의 이를 마신 후 나머지는 싱크대에 버렸다. 독한 소주나 양주는 다들 어떻게 마시는 걸까...
그것도 알코올이라고 알코올이 조금 들어가니까 기분이 더 가라앉고 몸까지 힘들었다. 그래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셨다. 커피는 이미 중독에 가까워서 밤에 커피를 마셔도 카페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잠을 잘 잘 수 있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다행히 따뜻한 커피의 기운이 차가운 냉도의 우울한 감정을 중화시켜 깨진 이성의 열도를 조금씩 살아나게 한다. 그래서 이 우울한 감정을 주절주절 종알종알 아무 말 언어로 브런치에 담아 두고 있다. 글이라도 쓰니까 좀 낫다.
'압력이 거셀지라도 화력을 견디어내는 그릇은 훌륭한 요리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의 비바람과 거센 압력은 견디어내고 나면 훌륭한 요리를 가능하게도 하지만, 요리하고 싶지도 않게 의욕 상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너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몇 번의 도전을 하다가 그마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우울하고 의지박약이 일어난다.
개인의 정서와 자유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확고한 주관적 진리(직관적 통찰, 상상력, 인간다움, 예술) 그리고 사회적 성공이나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객관적 진리(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려면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킬 객관적 과학적 진리와 함께 합리성, 공평성, 엄밀성, 공정성)를 근거로 둔다.
두 영역은 공존하지만 서로 다른 영역을 갖는다. 개개인에게는 객관적인 것이 적절한 삶의 영역이 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적인 것이 적절한 삶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서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인 진리가 충돌할 때 가장 지배되는 영역의 비율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개인의 정서는 공동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개인의 경제적 파산이나 사회적 실패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돌아간다. 사회의 구조에 의해 그렇다 치더라도,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노력 부족과 같은 개인의 정서적 측면으로 더 부각하기도 한다.
대신 문화와 예술은 개인에게 상상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우리에게 일상의 세계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사회와 문화와 일상의 세계에서 층층이 쌓인 집단의 권력과 위상 안의 체계는 문화와 예술이라는 그 상상적 대안으로 인해 개인의 역경 너머를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한다.
또 한편, 개인의 문화와 예술마저 거대한 타자의 세계 안에서 개인의 정서는 내적 일관성을 잃고 우리는 가끔 텅 빈 사람들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의 경우 소설이나 시를 쓰는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다 못해 브런치 안에서도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정말 소심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내가 마음에 드는 글을 발견하고 좋아요와 라이킷을 누르고 ‘구독’을 눌렀을 때 수많은 구독자를 확보한 작가가 차라리 관심구독자수를 0으로 두는 작가의 경우에는 맞구독을 하지 않아도 흔쾌히 구독을 누르거나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관심작가를 두면서도 나의 브런치에 맞구독을 해주지 않을 경우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을 잠시 잃기도 한다.
또 다른면으로 수많은 공모전에 작품을 응모해 보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을 때 매우 침울해지며 무력감에 빠진다.
무엇보다 개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권력이나 힘의 구조에 의해 지배받고 불이익을 당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은 텅 빈 마음과 텅 빈 생활을 감당해야 한다. 공동체나 집단 또는 사회나 국가 세계에 뿌리 박혀 층층이 쌓인 권력과 위상 안의 체계에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개인의 역경을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할 때 우울하다.
현재 저처럼 삶 자체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고 텅 빈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영적인 항해 중임을 잊지 말자고, 더 나은 세계로 비상하기 위해서는 두 발을 모아 잠시 내려앉은 것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