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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규 Oct 21. 2024

사건의 지평선

언젠가 작가 박권일이 '탈선자'의 정의로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탈선자들은 글자 그대로 선을 넘어가는 존재다. 그래서 '끝까지' 간다. 그리고 한 인간의 존재 의미를 갱신하게 된다." 매력적인 문장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돈 많이 벌어서 서울 시내 아파트 장만하고 산다, 같은 것보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실제로 그런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생계의 문제는 늘 괴롭다. 선을 넘을 정도의 글을 쓴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러나 그런 글을 쓴다는 것은 늘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느 것이 어느 것을 달성하고 야기하는 건지는 잘 모르게 되었다. 나의 글쓰기는 작품이라는 결과물을 남기지 않고 있는 상태지만, 지금의 삶을 형성시켰다. (현재로서는) 결과물이 없기에, 사회로부터의 인정은 얻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나, 나 자신을 다르게 '써'버린 것이 아닐까? 

대단한 것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동시에 그것만을 기대하며 글을 쓰는 건 아주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쓸 수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중요하니까. 지금으로서는 어떤 무엇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의미를 애써 찾아보지도 못하겠고, 그저 무상하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외부적인 기준보다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상황들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선을 넘음으로써 경계는 흐릿해지고, 그래서 고요하고, 알려지지 않는다.  내가 보고 있는 그들의 끝은 이미 탈선자들의 시간에서는 과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탈선자들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이라고 본다. 

물론 생계는 삶의 의미 달성을 위한 물질적 근간이고- 생계를 위한 돈벌이는 긴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무관한 무언가를 행한다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건 자기 파악이 가능한 가운데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한은 최대한 해보는 것일 뿐이다. 기준은 없다. 바깥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일상의 시간도, 지금의 시간도- 오로지 나로부터 주어지기에 막막하고 믿을 수 없고 답답하다. 그렇지만 그러면서 계속 가보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에게 조금 더 이완되어 있었으면, 좀더 '오래' 평온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이를 일컬어 '성숙'이라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계기로든 선을 넘은 사람의 '마지막' 모습은 평생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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