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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근상 Oct 12. 2024

농사일

나는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까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교를 다녔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면서기 하셨단다. 면장 선거에서 낙선한 후 농사를 지으셨다. 면사무소에 다니셨기에 농사일을 못하신 편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쟁기질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쟁기질을 품삯을 들여 다른 사람에게 맞기셨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항상 머슴이 같이 살고 있었다. 내 기억에 일 잘하는 청년이 우리집에서 쇠경으로 나락 20가마니를 받고 일했다. 물론 숙식 제공했다. 어느 때부터 머슴이 없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자식들이 그 일을 하기 시작했다. 농사일이 힘들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체험을 통해서 알았다.     


고등학교 때 도회지로 나와 공부했다. 토요일 일요일에 농사일을 하지않아도 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 토요일 일요일에 농사일 안하며 놀거나 공부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학 때면 시골에서 지내야 했기에 또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학이 되면 부모님과 만나는 것은 좋았는데 일하기가 너무 싫었다. 그렇지만 안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농사일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농사일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루종일 뙈약볕에서 일을 하다보면 허리는 왜 그렇게 아픈지  정말 힘이 많이 들었다. 부모님들은 농사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자식들에게는 농업을 직업으로서 시키려고는 아니하셨다.      


지게질을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했다. 지금이야 농로가 넓어 경운기, 트랙터 등 농기계가 모든 일을 해주지만은 그 때는 모든 짐을 여자는 머리에 이고 남자는 지게로 나르곤 했다. 겨울방학 때는 지게지고 산에 올라가 소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솔잎을 긁는 일을 했다. 산의 좁은 길을 지게로 한 짐의  나무를 지고 오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때로는 음지에 눈이 쌓인 길을 걸어야 했기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고무신과 발에 새끼를 묶었었다.     

지금 고향에 가면 농사를 농기계가 다 한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모든 일을 사람이 직접했다. 사람 손으로 모든 일을 해야 했기에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렇다고 소득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없는 소득에도 자식들 대학까지 보내셨던 부모님이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존경스럽다. (202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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