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비호
울프 늪지섬과 베개나라 사이 넓은 태평양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곳 한가운데서 이른바 레이비탄 호 라는 어딘가 독특한 이름을 자랑스럽게 달고는 항해를 하는 배가 있었다.
레이비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레이비탄 그는 어린 딸을 데리고 6살이 될 무렵인 지금까지 함께 항해를 하고 있었다.
대게 딸아이가 왜 바다를 항해하냐고 물으면 어물쩍 넘어간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오늘 비탄올라는 쉬이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빠, 우리는 왜 바다를 항해하는 거야?"
어린 비탄올라의 질문에 회의감을 느낀 레이비탄은 자신이 있는 배 안을 조용히 눈으로 훑으며 그간 여정의 기억을 회상했다.
안에는 각종 시설들이 자리라고 있었지만, 딱 2인용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좁은 시설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비탄올라는 그 배가 좋았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했던 배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따끈따끈하게 나온 해조류 음식들을 음미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먼저 가 누워있으면, 곧 아버지의 따뜻한 품 안에서 잠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저녁엔 마침 비탄올라의 생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생일 케이크를 챙겨주지 못해 무척이나 미안해하셨지만, 바다에서 5년의 항해를 시작한 비탄올라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여생을 함께 할 든든한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단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내내 외면해 왔던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아버지의 입에서 답변이 들려왔을 때, 몹시도 뜻밖의 이야기에 비탄올라는 잠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래."
"찾을 사람?"
쾅!!!
문이 거칠게 떨어져 나갔다. 낯선 해적들이 갑판 위를 들이닥쳤다. 레이비탄은 어린 딸을 보호하는 것에 신경 쓰느라, 탁자에 풀어놓은 검집을 집어드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 덕분에 무기를 들고 들이닥친 해적 앞에서 저항도 못하고 죽었다. 레이비탄의 5년간의 항해가 무색하리만큼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해적들의 입장에서 레이비탄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장도로 무방비한 데다가 병력도 없었다. 때마침 겁에 질려 도망치던 비탄올라는 그들의 손아귀 안 이었다. 이쯤 되니 비탄올라가 어떻게 해적들에게 붙잡혔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해적들에 붙잡혀 밧줄로 몸이 포박된 비탄올라는, 만명도 거뜬해 보이는 거대한 배에, 여든 번째 포로로 들어오게 되었다.
앞선 일흔아홉 명의 포로들은 하나같이 갑판대 위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구걸하거나, 포기하고는 망망대해로 뛰어들었다. 이제 비탄올라의 차례였다.
저항하지 못하도록 묶은 밧줄은 두 팔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고, 눈앞에 놓인 칼날은 갑판 위로 몰아붙히기 일쑤였다.
그때였다. 푹풍의 잔해가 휩쓸린 것만 같은 거대한 굉음 뒤로, 큼지막한 나무로 된 반듯한 문이 반토막 나 있었다. 그곳은 원래 위협적인 포로들을 가둬놓는 감옥이라고 들었다. 어지간한 흉악범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이다.
반토막 난 문 앞으로, 어깨에 흘러내리는 피를 아랑곳하지 않은 남자가 소리쳤다.
"그 얜 건드리지 마."
순간 칼날이 번쩍하고 날아갔다. 선원의 손에 위협하던 칼이 튕겨져 나간 것이었다. 이 소동의 원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과연 해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다소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건드리지 마. 걘 내 밥줄이니까."
남자의 경고를 무시한 선원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너도 쟤랑 같이 떨어지지 그래?"
웃음소리가 배안을 뒤집혔다.
마침 발을 헛디딘 비탄 올라는 자신의 몸이, 거대한 배 옆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배가 우뚝 솓아있는 바다에 순식간에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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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잘 들어. 이다음부터는 혼자 가야 할 거다."
그 말에 정신이 몽롱하던 비탄올라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갑판 위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자였다. 무심한 표정에서 설핏 힘듯 기색이 비쳤다
아무래도 밤새 비탄올라를 둘러업고 헤엄쳐 왔던 모양이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어린 비탄올라는 내려주었다. 빽빽한 나무들로 뒤덮인 육지가 코앞이었다. 무심코 지상에 발을 내딛으려던 때였다.
"이 앞은 매우 혹독할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해. 그리고.. 밤에는 불 피우는 법을 알아두는 게 좋을 거다."
두려움이 앞서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리자 육지를 향해 등을 돌리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비탄올라는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부둥켜안았다. 그래봐야 6살 남짓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른쪽 다리를 못 움직이게 만드는 것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자 남자가 다리를 굽혔다. 눈높이를 비탄 올라에게 맞추곤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늘진 미소였고, 다정함을 머금은 두 눈동자는 까맣게 죽어있어서, 비탄올라는 왠지 모르게 숨이 탁 막히고, 가슴이 저릿해졌다.
"가야 해."
죽은 사람. 그래 저 눈 빛은 죽은 사람의 눈빛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포에 사로 집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탄올라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의 등 뒤에는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선명히 드리웠기에, 비탄올라는 힘껏 붙든 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갈 때마다,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나 말이야. 눈앞에서 아버지가 돌이 가는 장면을 보았어. 그러니까 가지 마. 안 그러면 나 진찌 혼자야."
심각할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심장이 따끔하다 못해 산산이 부서지고 온몸이 아스러질 정도의 충격.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쏟구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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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두 사람은 함께 밤을 지샛으며 따스힌 모닥불 아래에서 비틴올라는 졸린 눈을 비볐다. 다음날 아침이 오고, 햇살이 비탄 올라의 두 눈을 깨울 때 즈음에,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가 고파진 비탄 올라는 자그마한 열매를 따먹다 사례 걸리고 말았다. 서둘러 바닷물을 허겁지겁 마시는 비탄올라.
밤이 되면 낙엽을 덮지만, 찬 바람의 매서운 추위에 몸을 떤다. 다음날 이른 아침 눈을 뜬 그녀는 몸살감기에 열병 걸린 채 돌아다니다가 그만 의식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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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숲 한가운데서 눈을 뜬 비탄올라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높다란 나무 위에 형성된 나무로 만들어진 수많은 집들이 마을을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호기심 어린 소년이 비탄올라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비탄올라를 소개해 주었고, 집이 없는 비탄올라를 위해 마을 주민으로 맞이하자는 제안까지 내주었다. 덕분에 비탄 올라는 가올라 이주머니 댁에 임시로 지낼 수 있었고, 따뜻한 모포와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처음엔 실수투성이였지만, 시간이 흐릇 지금 어엿한 12살이 되었다. 비탄 올라는 나름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스투비 아주머니께, 헤지르는 이제 12살이 되었으니, 학교에 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섬 밖의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배라니!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
그것은 단지 어부가 이끄는 자그마힌 배에 불과했지만, 평생 해적과 얽힐 대로 얽힌 비탄 올라에게 배란, 좀도둑이 타는 사치스럽고 거대한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다 해적이란 자고로 포로로 잡힌 인질들을 살려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자칫 잘 못하다가는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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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올라가 나무 위에 형성된 마을 밑으로 내려갔을 때, 그녀는 눈앞에 커다란 배가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포로로 잡아갔던 그 해적선이었다. 배 안에선 광란의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비탄올라는 앞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배의 갑판 밑에 커다란 갈고리에 가슴을 찔린 채, 쓰러져 있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비탄 올라가 포로로 잡혔을 때도, 바다에 빠졌을 때도,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었다. 키가 크고 신체가 성장한 비탄 올라와는 달리, 남자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강인해 보였던 그가 이런 몰골로 죽어있다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렇지만 터져 나오는 감정을 추스른 비탄 올라는, 서둘러 남자를 갈고리에서 빼내려고 한참을 끙끙 댔다. 온몸에 진땀이 나고, 눈앞이 수시로 흐려졌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막 15살을 넘긴 그녀에게, 성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들어 올리기 힘든 무게였지만, 끝내 해내고야 말았다.
시체를 둘러업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섬안 쪽까지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다.
나무 밑에 간신히 몸을 눕히고, 의식이 돌아오기만을 바랬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갈고리에 걸려 숨조차 쉴 수 없던, 가슴팍 부근의 거대한 구멍에바낕쪽에 굳어져있던 피가 사라지고, 새 살점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남자의 의식 돌아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때 무언가 강렬한 문장이 입밖을 스친 것은 한순간의 충동이었다.
"이상해요. 어째서 당신은 10년 전과 변함없는 모습인 거죠?"
남자는 잠시 흠칫하더니, 기운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비탄 올라의 손을 제지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이 그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하십시오. 그만, 저를... 살리지 마십시오."
뻣어대는 손과, 걱정스러운 눈망울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피로 얼룩진 몸은 수시로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다리는 절뚝거렸다. 그럼에도 남자는 끊임없이 달렸다. 포기하지 읺는 저 아이가 영영 쫓아오지 못할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빽빽하게 우거진 풀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정말? 정말로 죽음을 원해??"
순수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 때면, 마치 살아간다는 선택지 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운 손으로 쏟아 난 상처를 어루만지고, 진심 어린 애정이 담긴 눈빛을 마주 볼 때면, 가슴이 들끊는다.
'괜찮지 않아요. 아파, 아파요. 너무 아파서, 당신 마음이 울고 있어요. 살아 숨 쉬는 모든 인생이 고통이라고, 행복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행복해져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잖아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서, 오래전 잊혔던 소망까지 버린 지 오래였다. 죽음은 그저 의무일 뿐이었다.
남자는 잠시 멈춰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사무쳤다. 그 모든 희망이 이제 인생을 옥죄고, 삶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올가미였을 뿐이다.
무뎌딘 감각이, 모든 감정들이 다시 세상에 눈을 떴다. 어렸을 적부터 무적처럼 숨겨둔 그 비밀스러운 감각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남자는 손으로 귀를 막고, 작게나마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가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땅이 꺼져라 소리치고, 울부짖으며 해소되지 않는 통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만해. 그만. 이제 제발 그만해."
'이제 그만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세요. 살아가는 한 어디서나 희망은 존재하니까.'
트레탄. 그게 그 여정의 마지막 이름이었다. 찬란한 눈앞의 태양빛이 눈부셨다. 눈앞의 빛을 잡고 다시 일어서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슴속에 새기고 새 삶을 살 것이라고 다짐하던 때였다.
총소리가 하늘을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처음에 트레탄은 그 피가 자신의 것 인지 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온몸이 피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잠들어도 좋을 만큼, 따스하고 눈부신 여정이었다고.. 말하면 그 아이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잃어가는 의식 속에서 , 아득히 먼 풀숲의 끝자락에서 다급히 뛰어오는, 그 아이의 환영이 보였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꽉 잡고 싶은 그것. 그 행복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예우인 것이라면 그는 기꺼이, 내리쬐는 태양볓 아래에서 잠 들어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 좋은 것만 보세요. 좋은 기억만을 남기세요. 행복했던 순간만을 기억하세요.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잊어버리 십시오."
기억을 지우기 위해 손을 뻣었다.
"아니요. 기억할 거예요. 당신의 모든 희생을, 평생토록 기억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랑이니까. 그런 당신을 떠올릴 때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일쑤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당신과 함께한 모든 날들이 소중한 추억이니까. 그러니까 결국에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당신 앞에 설 날이 오겠죠."
트레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띠었다.
"그렇습니까.. 그거 다행이네요. 당신이 다시 웃음꽃을 피울 수 있기만을 바라왔는데.."
마침내 비탄올라의 뺨을 어루만지던, 트레탄 팔이 힘없이 떨어졌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후였다.
그렇지만 여태 본 적 없는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띄인 채였다.
남자 트레탄이 완전히 죽은 뒤 땅에 묻어준 비탄 올라는 곧장 마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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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반나절만에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비탄 올라가 마을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몰아붙였다. 속사포로 말 하듯 분노를 쏟아냈다.
"어디 갔던 거야? 왜 대답을 못해?! 마을이 이 꼴이 되고도 상황파악을 못해?! 귀먹었어??! 해적이 왔다고!!! 해적이!!!!!"
사실 비탄 올라는 처음 마을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샀다. 집이 없는 아이 치곤 질 좋은 비단 옷을 입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들은 본래 해적의 침입이 빈번한 지역에 살았기에, 비탄 올라도 해적의 자식이 아니냐는 오해였다. 때마침 한바탕 해적들이 마을을 뒤집 고나서야 비탄 올라가 들어왔으니 의심은 오해로 번지기 쉬웠다.
비탄 올라가 끝까지 아무 말도 못 하자, 마을의 수장 케이디가, 비탄올라를 다그치던 메리아라를 진정시키곤,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비탄올라는 마을 사람들의 적대적인 눈빛을 바라보다가 가올라 아주머니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도 여태 옆사람의 눈빛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 비탄 올라는 잠시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설령 아무리 남이라 해도, 가올라 아주머니는 지난 6년 동안 비탄올라를 키워주고, 씻겨주었으며, 마을에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가올라 아주머니의 표정이 새삼 차갑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하다는 것이 이해되는가 하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한편으론 이번 사건의 무게감이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해적들이 쳐들어왔어. 포로가 사라졌다고 난동을 피우더군. 인질을 넘기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 분위기여서 헤지르가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뿐이야."
이건 단순히 심각하다고 말할 정도를 넘어섰다.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더없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마을을 예쁨을 받고 자란 헤지르가 해적들의 포로로 붙잡힌 데다가, 마을까지 난장판이 되었다. 이 사건의 원인을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죽여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비탄 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헤지르가요?"
"그래. 널 처음 마을로 들이지고 제안한 건 놈이었으니까. 스스로 책임을 진 거다. 그리고 이젠 네가 도와줘야겠다. 네가 해적이든 아니든 간에 우린 지난 10년간 널 키워준 데다가 머물 집까지 제공했다. 헤지르를 구할 수 있다면 증명해 봐라. 하지만 구할 수 없다면 당장 여기를 떠나라."
말이야 쉽지. 비탄 올라는 간단한 호신술조차도 일지 못했다. 특별한 그녀만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체리듬이 님들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운동신경은 영 꽝이었다. 거기에다 검을 잡아본 적도 다뤄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헤지르가 붙잡힌 마당에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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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을 승낙한 비탄 올라는 헤지르를 어떻게 뻬낼지 궁리하던 중에, 늙은 노파를 만난다. 그녀에게서 얼결에 검술훈련을 잠깐 받게 된다
3시간 동안의 검술 흔련은 익숙해질 즈음 강도가 세 단계 올라가서 나날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찗은 시간이 이었다.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구 할 수만 있다먄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삶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더 이상 바다를 떠돌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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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 올라는 해적선 전선으로 쳐들어갔다. 해적들은 비탄 올라가 휘두른 검 한 번에 모두 나가떨어졌다.
한참 동안 갑판을 휘젓고 다녔다. 붙잡힌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헤지르를 찾아내려 애를 썼다. 흑발과 갈발 사이에 섞인, 황금빛 머리칼을 찾기란 분명 어렵지 않은 일일터였다.
그럼에도 헤지르는 분명히 한 번쯤 있을법한 곳에도 없었다. 그의 인상착의를 물어봤지만 목격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때 즈음. 이 넓은 배에서 안 가본 곳이 딱 한군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적 트레탄이 깨부순, 거대한 나무문이 이번엔 철문으로 바뀌어있었다. 안쪽에서 절대로 열 수 없도록 바깥쪽에 잠금장치가 드러나 있었다.
과연 어지간한 흉악범들이 있는 장소다웠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의 실수로 헤지르가 저곳에 갇혀 있다면? 그때야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헤지르를 위해서라면 무슨 위험이든 각오하겠다고 다짐하던 비탄 올라는, 오랜 고심끝에 거대한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묵은 쾌쾌한 냄새가 풍겼다. 하나같이 어딘가를 다치거나, 몸에 흉터가 있는 사람들이 철장 안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한눈에 봐도 함상 궂은 인상이었다.
그중 눈에 안대를 한 남자가 말없이 낡은 회중시계를 내밀었다. 비탄 올라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간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건.."
"전에 어떤 청년을 마주쳤는데, 아주 어려 보이더군. 그자가 글쎄 여기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더라니까!! 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했지. 우습지 않나? 죽기 싫어 혼신의 힘으로 해적들에게 대항했던 사람들이 갇힌 이곳에 제 발로 들어오겠다니!!..... 그래 알아, 이런 말은 아무 소용없다는 거. 그 애가 이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야. 이건 네 거야. 아가씨."
어렸을 적 처음 포로로 붙잡혀 해적선에 올랐을 때, 옆에 있던 해적이 건넸던 말이 있었다. 배의 왼쪽 나무문 안에는 흉악범들이 살고 있으니 조심하리는 말이었다. 이제 보니 그 말은 단순히 어린애를 겁주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렇군요."
비탄올라는 조심스럽게 회중시계를 받아 들었다. 품속 주머니에 굳게 넣어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잠시 목적을 잊고 있던 비탄 올라는 풀려난 사람들에 게 헤지르의 행방을 물었지만, 하나같이 모르는 눈치였다.
비탄올라에게 회중시계를 건네었던 남자가 말했다.
"아직도 못 찾았다면 하나밖에 더 있겠어? 포로로 잡힌 채 바다에 빠져 죽은 거야."
지나가 듯한 말이었지만, 그럴듯한 말이었다. 혹시나 싶어 해안가를 훍어보던 비탄올라는 그만 숨이 멎었다.
눈부신 황금빛 광채가, 너르고 아량 한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채 있었으니까.
"내가 왔어. 헤지르 나야, 응? 비탄올라. 지난번에 너와 함께 불꽃을 보았던, 영원히 함께 할 거라던 나야. 그러니 제발 눈을 떠."
아득히 꺼져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냈다. 헤지르를 몇 번이고 흔들고, 두 손을 가슴팍에 갔다 대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기적은 이곳에 없었다. 오직 절망과 침혹함뿐이다.
방안에 처박혀 있는 비탄 올라를, 헤지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햇살이 눈부신 빛을 보듬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꽃이 화려하게 날이 올랐다가 순식간에 터졌다, 천천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 헤지르는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예쁘다"
그 한마디에 어여쁜 미소를 보여주곤 햇살 뒤로 홀랑 숨어버리는 녀석이다.
"그렇지?"
헤지르는 쉼 없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부분 별자리의 행성에 관한 설명이었다.
"사람은 죽으면 별똥별이 되어서 하늘을 장식한데, 나도 언젠가 죽으면 별이 될까?"
따스한 시체의 품을 껴안았다. 몸 안의 모든 장기와 뼈대가 아작 나고, 깨져 망가져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는 삶을 살아도 죽은 것만 같은 평생이 될 거라고 저주처럼 중얼거렸다.
눈에선 눈물이 피처럼 흘러내렸고, 얼굴은 괴로워하다 못해 고통스럽도록 찌푸려진 채였다. 머리카락이 괴로워하는 비탄올라의 얼굴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두 시야를 차단했다.
아스러져가는 모든 순간이, 현실을 뒤덮을 때면 헤지르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깨닫는다.
가슴이 몹시도 답답했다. 이 먹먹한 감정은 무엇일까. 단호하게 사로잡힌 감정의 집합체가 오묘하게 결합되어서, 심장을 붙들고 놔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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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차단된 시야에 어렸을 적 가족사진이 들어왔다.
품 속에 잠시 맡겨두었던 회중시계가 열리며 안쪽 단면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안에 들어있던 비탄올라의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매우 익숙한 인영이 사진 속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와 똑닯은 흩어 내린 장발의 백발의 머리카락을 한 어린 비탄올라 곁에 낯설고도 익숙한 여자의 인영이 보였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입꼬리를 들어 올려 한결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붉은 머리를 위로 땋아 올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탄 올라와 똑닯은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내면의 목소리가 그녀가 비탄 올라의 엄마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 거렸다.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기억의 파편이, 오랫동안 머문 자리를 떠나 도록 발걸음을 부추겼다.
어렸을 적 엄마, 아빠와 함께 집에서 오순도순 살았던 기억이다. 식탁에서 따끈한 밥도 먹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기억들이 문득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그리운 집. 따뜻한 밥상. 나만의 공간은, 그동안 집 없이 떠돌던 비탄 올라에게 너무나 원했던 순간 이었다. 마침 갈 곳도 없어진 비탄 올라는 그톡록 갈망했던 기억 속의 집에 다다르는 것으로, 레이비탄호의 마지막 항해를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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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올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정복한 해적선을 직접 조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집은 한침 멀지만, 괜찮을 것이다. 언젠가는 도착하고 말 테니까.
3년의 항해 끝에, 비탄 올라는 기억을 추슬러서 예전 집에 도착했다.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기억 속 모습과 똑같은 집의 형태였다. 초인종을 누르는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대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익숙해 보이는 인영이 문을 열고 나온다.
어두운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귀 뒤로 흘러내렸다. 상당한 미모의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몇 안 되는 기억 속의 어머니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 나타난 것만 같았다. 다만 그때와는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쾅 거렸다. 엄마, 진짜 엄마다.
그동안의 엄마도 잃어버린 자식을 찾고 계시지 않았을까, 지금쯤 무심한 표정을 짓계시는 것도 희망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틴올라는 엄마에게 안기려고 한 발짝 다가갔다. 그때까지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여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
"누구세요?"
그녀는 다소 짜증 난 모습이었다.
집 안에서 갈색 머리의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갑작스례 튀어나왔다. 소녀는 낯선 사람의 모습에 놀란 눈치였다. 엄마의 손을 자연스례 붙들며 물었다.
"엄마, 누구야?"
비탄올라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렸을 적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때였다. 머리에 번개가 친 듯한 충격이 연속으로 지나갔다. 한꺼번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기억들이 연달아 휘몰아쳤다.
"저 언니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보다."
문이 쌀쌀맞게 닫혀 버릴 동안, 그 자리 그대로 차갑게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집에 대한 기억이 없었건 것인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겠다. 우리가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었던 건, 다른 누군가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야.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비탄올라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은 기억. 도망쳤던 날들. 야생에서 홀로 실아남 아야 했던 기억. 운 좋게 구해졌지만, 쉽지만은 않았던 일상들. 있는 힘을 다해 싸웠던, 첫 전투. 그리고.....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몰라요.
화려한 도시의 벼랑 끝. 한걸음 내딛는다면, 아찔한 절벽 아래로 추락할 거리였다. 오싹 힐 정도로 높게 쏟은 땅은, 다리가 후달릴 정도의 위압감을 뽐냈다.
비탄 올라는 낭떠러지 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헤엄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레이비탄호도 보고 싶고... 뭐, 이제 와서 너무 늦었나..."
..그렇지만 이제 한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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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카이사르는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득히 높은 절벽 아래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넋을 잃었다.
불꽃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서서히 땅밑으로 떨어진다. 바닷속에 잠긴다면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을 잠재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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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고 있었다. 불꽃축제를 구경하느라 새벽을 꼬박 새운 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니 우편함에 편지가 와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이사르는 편지를 뜯었다.
[ 안녕 카이사르.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널 만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 너무 오래간만이니?
그러고 보니 우리가 다시 얼굴을 보지 않은지도 10년이 넘었구나. 아마 지금쯤이면 네 여정도 새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겠지?
네 인생이 아무리 방랑뿐인 생활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는 길엔, 마음이 다쳐 있을 테니까. 바깥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따뜻하고 안락 한 공간이라면, 편안히 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때가 되면,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한 잠을 청 할 수 있겠지.
그날이 오면, 내가 구경하러 올게. 그러니까, 멋진 집을 구경시켜 줘야 해?
추신: 난 레이비탄호의 여정을 끝마치지 못했지만, 넌 너만의 답을 찾기를 바랄게. ]
당혹스럽게 짝이 없을 만큼,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편지였다. 그럼에도 보낸이 가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들어 눈가를 훔쳤다.
하늘에 띈 별들이 오색빛깔을 뿜어냈다. 그건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