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

by 필제

장악

황실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의 이름은 연아라는 어여쁜 이름으로 타고나, 황실의 후계자이자, 황후의 자식으로, 장차 황제가 될 몸이었다.

황실에는 연아보다 3개월 늦게 태어난 화련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후궁의 자식이었다. 그 덕분인지 그녀에게는 항상 ‘반역을 꽤 하고 황권을 가로챌 인물이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런 소문과는 달리, 둘 사이는 대체로 완만했다. 때론 언니, 동생이라 부르며 친서를 나누기도 하고, 때때론 처소에 모여, 녹차를 마시며, 소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녀들은 주로 서적 [농가집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밤새는 줄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시녀가 찾아와 밤이 이르다는 것을 알릴 때면, 매번 아쉬운 얼굴로 돌아가곤 했다.

쉬는 시간도 잠시였다. 엄격한 황실 예절을 어린 연아가 배우기에는 너무나 혹독했다. 그래서인지 종종 몰래 궁궐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것은 고작 6살밖에 안된 아이에게는 일탈이나 다름없었다.


5월 26일 ㅡ 인연

오늘 아침 서신이 와 있는 것이었다! 어젯밤 새벽에 몰래 보냈는데, 그로부터 하루도 안된 시간이었다. 역시나 발신인은 화련이었다.

[ 귀공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귀공을 생각하느라 하룻밤도 못 지새웠답니다. 그날 보았던 무지막지한 상처 때문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속이든 바깥이든 칼을 들이고 있기 마련이죠. 저는 당신과 잘 맞을 것 같답니다. 시간 되시면 금일 처마 밑에서 만납시다.

화련이 ]

잠깐, 무언가 이상한데? 이건 내게 보내는 서신이 아니다. 귀공이라..., 차갑고 냉정해 보이기만 했던, 화련에게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건 꽤나 뜻밖의 일이었다. 화련과 한 번도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귀공이란 사람은 누굴까? 궁금증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는 새에 내 발걸음은 어느새 처마 밑에 도착해 있었다.

바람과 함께,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무심한 눈동자가 햇살에 비추어 반짝였다. 피부는 창백하리만치 하얗고, 몸은 근육이 다부졌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풀어 해진 단추 사이에 튀어나온 상처들이었다. 이 사람은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온 걸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황실에서 엄격한 교육에 대해 투정 부릴 시간에, 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매일같이 다가오는 고통을 참아야 했을 것이다.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상처 투성이인 그의 팔을 차마 만지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많이 아팠죠?”

“...... 울지 마세요, 공주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빛이 곧 꺼져버릴 사람처럼 아득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이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울어도 돼요, 여긴 아무도 없거든요. 처마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눈물을 가려줘요, 굳세게 홀로 서 있는 기둥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려줘요. 그리고 마루는 앉아서 숨을 고를 시간을 벌어줘요. 숨어있기 적합하죠. 그러니까 여기선 맘껏 울어도 돼요.”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했고, 곧이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기는 머지않아 지나간다. 고통은 견디면 된다. 흐트러진 마음가짐은 바로 잡으면 된다.
억제된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전부 감추면 그만이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그것들이 아니다.
외로운 별하늘 아래, 살아 숨 쉬는 사람들 가운데, 지옥불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압박감이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날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차라리 지옥불을 달군 쇳덩이에 발을 담그고, 발이 달궈짐을 반복하며 타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정말로 그 편이 나았을 것이다.

우리는 처마 안에서 서로의 눈물을 주고받았다. 외로이 흘리는 눈물 끝에 비로소 웃음 지을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6월 1일 ㅡ 희망

말 이란 것은 함부로 꺼내면 안 되는 것이다. 말을 꺼냈을 때는 그 안의 내용이 모두 실천 가능 한 것들이며, 그 말을 모두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 말이 상대에게 미칠 영향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란, 신중에 신중을 가해서 뱉어내야 하는 것이다.

황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살의가 곳곳에 숨어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온전한 위험을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죄를 저지르지 않을 경우, 황제는 모든 위험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항상 신뢰할 수 있는 모습으로, 신중에 신중을 가한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하며, 자신의 권위를 함부로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

“적의도 마찬가지이지요. 불필요 한 곳에 몸과 마음을 쓰면 안 됩니다. 왕은 백성들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친 적이 있었다.

그날은 햇살이 적당히 따사로웠고, 나는 전각에서 앉아, 바람에 딸려오는 꽃의 향내음을 마시며, 머리를 비워두었다.
방 전체를 가득 메우는 샛노란 벽지는 노르스름한 마루와 이어져, 분간이 헷갈 릴 정도였고, 심신 안정을 위해 피워둔 향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다 서안의 날고 긴 모서리는 당장이라도 어린 연아를 잡아먹으려 달려들 것만 같았으나, 바람이 불어와 심신의 안정을 돋우고, 머리를 맑게 하였으며, 공부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서안 위엔,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 천자문 ]이 있었다. 한 시간째 같은 단어를 읽고, 또 읽었지만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자공부로 인해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을 때였다.

털이 온통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창문에서 내려와, 마치 자신의 집인 마냥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에게 신나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비비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잠시라도 만져주지 않으면, 저녁이 늦을 때까지 울어버릴 기세였다.
마음 같아서는 고양과 놀아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장차 황제가 될 몸.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의무였고, 하나의 책임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매사에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다. 고양이와 놀아준다는 이런 작은 선택지마저도 소홀히 여 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자니, 마음이 찝찝했다. 그것은 고양이의 마음이었다. 고양이가 다가와 애교를 부리고, 우는 것은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벌써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선선하던 공기도 점차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이대로 고양이를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면, 얼어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양이가 내 품에 꼭 안겼다. 나는 서둘러 창을 닫았다.

‘군주는 매사에 신중하게 결정하되,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됩니다. 자칫하다간 신망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죠.’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를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다. 얼어 죽을 날씨에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다. 그렇지만, 학업을 게을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타인의 처소에 보낼 수 도 없다. 자칫 일을 방해하는 셈이 될 게 뻔했다. 그렇지만, 생명보다 학업이 중시될 수는 없다.

나는 추위에 떠는 고양이를 위해 계담으로 몸을 감싸 주었다. 그리고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연어구이를 먹이로 주었다.
그날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얀 털을 가진 작은 맹수는 무엇인가를 사냥하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한 번은 쥐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 야옹이가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양이의 이빨과 무지막지한 발톱으로 인해, 하루 만에 완전히 못 쓸 지경이 되어버렸다.

거기다 혼자 방에 남겨지는 것을 어찌나 싫어하던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함께 다녀야 했다. 하지만 측간에 갈 때면 고양이가 매번 함께 들어오려 해서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많은 음식 중에서 특히 좋아했던 것은 연어구이였다. 연어구이를 먹을 때면 항상 ‘누가 뺏어가나’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빠르게 먹어치운 데다가, 접시가 깨끗이 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서신을 보내기 위해 먹과 붓을 미리 서안 위에 꺼내 놓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이 요망한 고양이는 살금살금 다가와 먹을 사방에 흩뿌리고는 튀었다. 내가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시녀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 얼굴이 검은 고양이라면 보았어요’라고. 나중에 고양이를 마주쳤을 때, 비로소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먹을 마루와 벽에 흩뿌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에도 묻히고 돌아다녔다는 걸 말이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무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녀석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높다랗게 솟은 나무에 탐스럽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저물어가는 태양을 표현한 예술작품 같았다. 고양이는 감나무에 열린 감을 특히나 먹으려 애썼다. 나무 기둥을 힘으로 쳐서 떨어 뜨리려는 첫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이번엔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제일 아슬아슬했던 것은 가뭇 가지 위에 몸을 안착시키는 일이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내딛는 발도 차칫 떨어질까 싶었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맑은 광택을 뽐내는 감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고양이가 감을 한입 베어 물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까마귀가 날아와 고양이의 먹잇감을 가로채간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까마귀는 날갯짓을 퍼덕거리며 고양이가 힘들게 올라온 나뭇가지 주위의 감을 모조리 낚아채 갔다. 그러고는 높게 솟은 지붕 위에 올라가 보란 듯이 먹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고양이는 파렴치한 까마귀가 간신히 땅에 착지했을 때를 노려, 응징하지 않았다. 더 이상 감을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감나무 위를 올라가려 애썼고, 마침내 고양이는 꼭대기에 이르렀다. 내가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는 고양이의 다음 행동 때문이었다. 고양이가 그대로 감나무에서 떨어졌던 것이었다! 내가 고양이를 잡으려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고양이는 까마귀 위쪽으로 착지했고, 까마귀는 놀라 푸드덕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다행히도 고양이는 무사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웬만하면 높은 곳에는 잘 안 데려가려고 한다, 그럼에도 고양이의 벽 타기 스킬과 점프 스킬이 날로 늘어만 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 이름이 없었다. 몇 번을 고민하다가, 고양이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 이름을 정했다. 몇 번을 봐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한자를,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였다. 내가 막 눈꺼풀을 비비며 일어났을 때, 함께 잠을 청하던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 고양이는 창밖에서 주로 나무를 타곤 했으나, 오늘은 어재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날은 흐렸고, 거기에다 천둥까지 치고 있었다. 비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덤이었다.
나는 서둘러 창밖을 보다가 그만 숨이 멎었다. 세찬 빗줄기 틈에서, 고양이가 피를 흘리고는, 얼마 가지 못 할 숨을 헐떡이고 있던 것이었다! 온몸은 세찬 비바람으로 인해 떨고 있었고, 눈꺼풀은 거의 감기기 직전이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지만 아직 살아있다면 힘을 내야 했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무거웠다.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서둘러 밖으로 나갔지만, 고양이는 이미 죽었는지 눈을 꼭 감고 있었고, 몸은 창백한 얼굴만큼이나 차가웠다.

우선 피가 흐르는 곳을 물로 씻긴 뒤, 붕대를 감고, 계담으로 몸을 감싼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수의사의 말로는 고양이는 이미 저승의 강을 지났다고 하셨다. 그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묻어두지 않고,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았다.

가뜩이나 내 몰골은 엉망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잠옷은 축축하게 젓었으며, 버선발은 흙먼지로 가득했다. 두 팔에는 죽은 것 만 같던 고양이가 품에 안겨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양이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넘어가지 않는 식사를 하는 일이었다. 밥은 밥대로 먹을 수 없었고, 잠은 쉬이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도 걱정을 비우려 애쓰며, 펜을 잡았고, 숫 저를 들었으며,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다. 그것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지만, 장차 황제가 될 사람으로서 쇠약해 보이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학문을 배우고, 기본 소양을 배우느라 하루가 꼬박 지나갈 즈음에도, 고양이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몸도 여전히 차가웠다.

그것이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내각 바깥쪽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키가 작고, 잎이 양쪽으로 퍼져있는, 동백나무가 있다. 그 밑에 고양이를 묻어주었다.

내각의 방안에 있는 서안 위에 널브러진, 천자문 책에는 아직 읽지 못한 이름이 있었다.

希望 : 소망을 가지고 기대어 바라는 것.


6월 10일 ㅡ 내가 가진 것을 기억해라

“어마마마를 뵙습니다.”
어머니에게서 고상한 황후의 품격이 물씬 느껴졌다. 황후가 된다는 것은 한시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와는 다르게 오늘은 어딘가 흐트러짐이 눈에 보였다. 늘 정갈하게 꽂혀있던 비녀는 제대로 꽂혀있지 않았고, 머리카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늘 입던 평상복은 어딘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학문은 다 배웠느냐?”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어머니는 나인에게 물었다.

“..... 그게”
매섭게 다그치는 어머니 앞에서, 나인은 쩔쩔매었다.

“늘려”

“예,... 예?”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하루 일정을 늘리고, 올해 안에 문학과 기술학을 전부 배우도록해.”
문학과 기술학은 보통 13살 전후가 되었을 때, 약 4년에 걸쳐 배우는 과목들이었다. 그것을 6살 아이가 단 6개월 만에 전부 배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대강 상황이 짐작 갔다. 궁궐 밖으로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백성들이 남몰래하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곳곳에 퍼져, 알 사람은 다 알만한 이야기였다.

‘후궁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 애는 5살에 천자문을 뗀 데다가, 벌써 13살짜리가 배울만한 내용들을 배우고 있다더군!, 거기다 역학, 율학, 산학에 데해서는 아주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하지! 흔치 않은 천재라고, 황후의 자식이 아니라 후궁의의 자식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야!!’

‘그래도 그렇지, 후궁의 자식이 어떻게 황제가 돼?’

‘에헤이~ 무슨 소리! 황후에게 자식만 없었으면, 황제가 될 수 있다 이거야!’


어머니는 이미 한차례 무너져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 일정 탓에 심신이 피로한데, 자신의 자식이 아닌 후궁의 자식에게 왕권을 넘겨야 한다는 소문까지 들으니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화련이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소리는 궁궐 내에 흔히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같은 진도를 나가야 하나,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집중력에 좋다는 차도 마셔보고, 밤을 새우며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미 내 마음속에 내려진 결론이 있었다.
결론은 나는 화련이 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일뿐 어떻게 해서든 그 아이가 될 수 없었다.

“학문이 뛰어난 것도, 머리가 비상한 것 역시, 황제의 자질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배우면 될 일입니다. 황제가 되기 위한 자질 중에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깨닫는 일입니다. 자신을 가꾸어 나감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작은 결정마저 신중하게 고민함으로써 현명한 판단을 얻는 일이지요. 어마마마께서 제게 배움을 주셨던 그것들 말입니다.”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셔야 됩니다. 오히려 상대를 의식해 자신의 장점을 잃게 되면 안 됩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잘해오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점차 윤곽이 드러날 것이니, 어마마마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지요.”

내가 침착한 어조로 말을 꺼내자, 어머니와 내시, 시녀들 모두 놀란 눈치였다. 어머니는 기품 있는 태도로, 나를 한찬동 안이나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홱 하고, 몸을 돌려 나가셨다.

그날 어머니는 늘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셨지만, 여느 때와 달리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


6월 23일 ㅡ 악몽

요즘 들어 매일같이 악몽을 꾼다. 항상 처음엔 평화롭기 그지없다. 진짜 악몽은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화련과 자주 거닐었던 후원이 있다. 그곳에서는 손질 잘된 나무들이 튼튼하게 자라났고, 화초들은 건강한 꽃을 피웠다.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이상적인 화원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후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시들었던 꽃들은 화사한 꽃 봉오리를 싹 튀웠고, 나무들은 저마다의 잎사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랑하기 시작했다. 곧 이곳은 어마무시하게 많은 이들의 소리로 가득 채웠다. 그것은 무척이나 귀가 아프고, 시끄러웠기에 무심코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아, 시끄러워라”

그러자 모든 소리가 뚝 끊겼고, 화련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제야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 처음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머릿속에는 ‘실수했어. 이제 어떡하지?’라는 질문만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때였다. 배에 날카롭고, 뾰족한 무언가가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 뼈저린 고통이 몸을 감쌌다

“그러게 진즉 죽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황제의 제목에 어울린다는 걸 알잖아? 내가 나라를 더 잘 통치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난 황제가 되지 못하는 거지!!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악몽 속의 화련이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나를 찌르고, 찌르고, 수 없이 찔렀다.

지독한 악몽 속에서 난 몇 번이고 검에 찔렸다. 무자비한 악의가 가득 담긴 검에 찔렸을 때마다, 쓰라린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악몽은 매번 이런 식이다. 늘 나는 누군가에게 죽임 당한 뒤에야, 지옥 같은 꿈에서 깬다. 마치 실제로 겪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그다음은 항상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구슬 같은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가 나와 애절하게 묻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는데, 왜 나를 죽였어요?”

“왜 나를 죽임 당하도록 내버려 뒀어요?”
애절 어린 목소리는 점차, 원망 어린 목소리로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후회로 바뀐다.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해선 안되었던 거야, 당신에게 사랑을 주면 안 되었던 거야. 되돌려 받지 못할 사랑은 죽임 당할 뿐이란 걸 알겠어.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아요.”

단호한 결심은 이미 예상했던 틀 속에 갇힌 듯했다.

그렇지만, 이건 현실이 아니다. 꿈일 뿐이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7월 3일 ㅡ 행복이란

나는 그 뒤로도 귀공과 몇 번, 처마 밑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7일에 서너 번씩 의관을 불러들여 몸에 있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흘러서는 아예 둘만의 약속 장소를 정하기도 했는데, 그 장소는 궁궐 뒤쪽, 벚나무 아래였다.

날은 화창한 봄이었다. 흐트러진 벚꽃이 만개했다. 희고 부드러운 꽃잎은 벌써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벚나무 아래에서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본명이 무엇입니까?”
내가 물었다

“도화라 합니다.”

도화... 라, 참으로 세심하면서도 청초하고, 무심한 듯싶다가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이름이었다.

“좋은 이름이네요. 전 연아라고 합니다.”
나는 간질간질 거리는 공기를 모른 체 하려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번 일은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 반드시 값겠습니다.”

“눈물이란 아름답지요, 고통을 흘려보내 주니까요. 함께 할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저는 오랫동안 궁궐에서 홀로 자랐습니다. 학문을 가르치거나, 배움을 주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만났습니다만, 함께 여가 시간을 보내고, 수다를 떨며, 때론 의견을 나누기도 하는, 상호작용을 해 본 기억은 없었습니다. 소중한 인연을 맺어 주셔서,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 과찬이십니다.”

“혹시 종이 솔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세상의 인정을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종이비행기입니다. 하늘에 띄어져 있다지요. 저는 그걸 보는 게 꿈입니다. 귀공께서는 꿈이 있습니까?”

“목표라면 있습니다. 장원급제를 하는 것 이랄까요. 아버지께선 그걸 원하십니다.”

“전 당신의 소원을 묻는 것입니다. 혹 실례입니까?”

“글쎄요..... 어떤 것도 절 만족시키지 못할 겁니다. 전 행복을 얻지 목 했으니까요. 꿈과 소원은 행복을 누리는 아이들에겐 사치이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겐 희망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머지않아 희망도 곧 꺾이겠지요.”

“행복하다고 믿는 모든 순간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행복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얻기 위해 애쓰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고로 전 어떤 역경과 불행이 와도, 언제나 그것에 맞설 겁니다. 그 순간을 행복으로 물들일 겁니다.”

그는 충격받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눈매를 휘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화, 그의 첫 미소였다.

“장차 백성들의 미래를 책임지실 공주마마께서 이리 현명하신지 몰랐습니다. 덕분에 좋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다음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7월 29일 - 화련

궁궐이란.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날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함께 있으면 한줄기 휴식처가 되어버리는 귀공이 나타났다. 그의 몸엔 상처가 수두룩 했다.
귀공의 상처가 걱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많은 상처를 몸에 새기고도 꿋꿋한 그 모습이 자꾸만 눈길이 갔을 뿐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연아는, 도화란 이름을 가진, 그 마저 내게서 뺏어갔다. 그 뒤로 몇 번 귀공과의 만남을 가졌지만 온통 연아 이야기뿐이었다.
황궁에 들어오고 난 뒤로 알게 모르게 나타난 의심과 비난의 화살은 장차, 독살이라는 어마 무시한 결과로 이어지려 하기 일쑤였다. 황후의 자식보다 뛰어나단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황제가 될 수 없지만, 황제가 될 아이보다 뛰어난 후궁의 자식. 궁 내에서 위험인물로 치부할 법도 했다.
그럴수록 화련은 더욱 열심히 학문을 익히고, 배움을 얻었지만, 마음속에 가둬둔 분노가 치솟아 밖으로 튀어나오려 할 때면, 황권을 가로챌 계획을 세우고, 병사를 끌어들여, 세력을 모으곤 했다.

[ 양금택목. 황제가 되면 천하가 뜻대로 이로울지니, 모든 백성들이 만사형통하고, 국세민안 하니, 경국제세하리라. ]라는 예언 속 문구를 자신의 미래로 점찍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빈민가의 어두 컴컴한 골목길을 들어가다 보면, 노예 시장이 나온다. 노예시장에서는 이른바 5세~9세까지의 아이들을 팔고 있었다. 형편없이 낡아빠진 돗자리를 펼치고는 수없이 많은 아이들을 빼곡히 앉혔다.
그러면 한눈에 보아도 귀한 비단으로 섬세하게 짜인 옷을 입은 어른들이 몇몇 아이들을 선별해 데려가곤 했다.

그곳에는 피를 나눈 자매가 있었다. 언니와 동생. 두 아이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더더욱 5살이 되었지만, 좀처럼 팔리는 일이 없었다. 또래 아이들은 이미 몇몇 사람들에게 팔려나가고, 남은 아이들은 아무도 안 데려가서 나이만 자란 아이들이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팔리지 않는 아이들은 대게 커서도 팔리지 않는 노릇이었으니, 이대로 8살, 9살이 되어 가망 없는 나이가 되면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눈앞이 선했다.

"언니, 무슨 생각해?"
호기심 어린 눈과 상기된 뺨은, 상황을 미처 알지 못하는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고개를 흔들던, 언니는 자뭇 심각한 얼굴로 동생에게 말했다.

"너, 저 밖에 나가본 적 있어?"

"없어"

"넌, 나가야 해. 그리고 말이야. 몇 마일을 걷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귀해보이는 비단을 두른 사람에게 가서 말하는 거야. 아주 다급하게 살려달라고 품에 안겨야 해. 알았지? 그리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마. 어디서 왔냐고 묻는 말엔 절대로 말해주지 말고"

"알았어."

"좋아, 뛰어!"

소리가 마치, 시합에 나가 질주를 해야 하는 상황처럼 동생은 부리나케 뛰었다. 지긋지긋한 생활도 이제 끝이다. 낡고 허름한 골목을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도시와 널찍한 길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는 불빛으로 인해 눈이 부셨고, 길은 깨끗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수많은 일을 헤쳐나가고, 수십 번 길을 헤매면서 다다른 풍경은 장관이 있었다. 거대하게 치솟은 널찍한 궁궐이 웅장했다. 누가 보아도, 궁에 사는 사람들의 비단이 가장 화려하고 귀해 보였다.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내가 몰래 들어간 곳은 내전 근처였다. 그곳에서 난 후궁의 자식이 되었고, 화련이란 이름도 얻게 되었다.
황후의 자식이 언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언니의 기억을 지웠다.
궁궐에 입성했을 때, 그녀는 화련에게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화련은 연아의 존재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녀의 존재에 진절머리가 났다. 오랜 고심 끝에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7월 30일 ㅡ 흔들리면 안 된다

음해와 독살. 이런 것들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진심으로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음해는, 진실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진짜를 보는 것이다. 음해에 흔들리면 안 되었다.
독살은, 이길 수 없는 강자를 어찌할 수 없을 때, 비겁하게 쓰는 방법이다. 그런 것들은 요리과정만 주의하면 되었다. 또한 직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가니, 점차 독이 든 음식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신경을 예민하게 독이 든 음식과 안 든 음식을 관찰해 온 덕분이었다. 어떤 것이든 심지어 그것이 두려움을 몰고 온다고 해도, 우리에겐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 모든 노력으로, 방해물을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살아오고, 부딪히면서 알게 된 경험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생각이 안 나면, 뭐든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긴다.


8월 4일 ㅡ 완벽한 세상을 바라다

오랫동안 고심해 왔던 일이었다. 장차 떠먹여 준 황제의 자리에 앉으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했던 일이 있다. 여태 황제가 되기 위해 삶을 깨우쳤다. 하지만, ‘만약 황제의 자리에 화련이 가 더 적합하다면?’이라는 생각 들었다.
물론 나라를 잘 다스릴 자신은 있었다. 그렇지만 가장 황제의 자질에 적합 자를 앉혀야만이 가장 최적의 루트로 나라를 발전시키며, 곤궁한 백성들을 돕고, 병력을 강화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외교에도 능숙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누가 왕권을 차지하든 간에, 나라를 완벽하게 통치할 사람이 되는 것이 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반대가 막강할 것을 무릅쓰고, 폐하께 조심스례 말씀드려 보았다. 폐하는 곧장 표정이 심각해지시더니, 생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8월 8일 ㅡ 적은 가까이에 있다

유난히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 깼다. 눈앞은 연기가 자욱했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곳곳에 불길이 뜨겁게 타올랐다.

"불이다! 불이야!!"

궁궐바깥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것만 같은 불길이, 사방으로 치솟고 있었다.

난 되도록 침착하려고 애썼다. 왼 손으로 투명 벽을 짚었고, 오른손으로 치마의 끝자락 천을 찢어내어 코와 입을 막았다.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바깥으로 나가는 문 끝에서 화련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다행히 바깥으론 아직 화재가 번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연아, 귀공께서 널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던데?”
수려한 웃음을 꽃피운 화련이, 말했다. 그녀의 손끝에선 높다란 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내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금세 정신을 잃었다.


8월 12일 ㅡ 세상은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장대 아저씨와 막금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나는 엊그제 저녁, 마을 변방 길바닥에서 엎드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빨래 방망이로 옷을 두드리던, 두툼한 손으로 날 번쩍 들고 오셨다고 했다.
생판 모르는 아이를 둘러업고, 집에 오신 아주머니를 보고, 장대 아저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길에 버려진 아이'라고 설명했고, 그제야 아저씨는 모든 일들을 납득하셨다고 했다.
이틀 뒤에야 깨어난 나는,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장대 아저씨와, 막금 아주머니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10년은 더 되어 보이는 오래된 초가집과, 각종 농기구를 보고는, 한 번은 허허벌판인 밭과, 하늘과 세상을 보고는, 또 날벌레와 높다랗게 자란 풀들을 보고는 적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익숙해지려고 애썼다. 지금 상황에선 그것이 최선이니까 말이다.
종종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밭일을 도왔는데, 대부분 일들은, 각종 채소들을 수확하고, 씻기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데다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일이 끝나고 먹는 밥시간만큼 행복한 일이 없었다.

막금 아주머니의 요리 솜씨는 기가 막혔다. 오늘 아침엔 닭죽을 먹었는데, 깊은 풍미가 우러나오는 닭의 식감은 이루 말할 것 없이 쫄깃했다. 거기다 죽의 간마저 완벽했으니, 입에 넣자마자 극락이었다. 점심엔 비빔밥이 나왔는데, 각종 나물들과 매콤한 초장의 어우러짐이 기가 막혔다.
나물들의 아삭한 식감과 적절한 매콤함과 고소한 풍미는 식욕을 돋우다 못해, 그릇까지 싹싹 비워 먹는 밥도둑이었다.

그러고는 하루 일과를 끝낸, 캄캄한 저녁에 방구석에 들어와서는 이부자리 덮으며 잠을 청할 때 즈음엔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며 잠이 솔솔 잘 왔다.

생생한 아침을 기운차게 시작해 보니,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난 매일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하루가 다가는 밭일을 할 땐, 두 분 모두 말없이 묵묵히 감자를 캤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중간중간 노래를 흥얼거리고는, 잡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것은 사소한 변화처럼 보였지만, 삭막한 분위기는 한층 따뜻해졌다.
그래서 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손에 흰 장갑을 끼고는 마루를 펄쩍 뛰어내려 땅에 착지하고, 천진난만하게 달려가다, 먼저 나와있는 장대 아저씨와 막금 아주머니에게, 이 근처 보았던 시냇물에 관해 한참을 떠들어댔다.


8월 20일 ㅡ 변화를 대비해라

언제 한 번은 높다랐게 우뚝 쏟아있는, 앞산이 있었다. 난 그 산을 넘어서고 싶었다. 즉시 산을 올라갔다. 그러나 한참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돌에 앉아, 잠시라도 쉼을 가지려 할 때, 날렵하고 매섭게 생긴 눈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 눈은 초상화 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반드시 호랑이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었다. 노루의 눈일 수도 있지 않은가? 잠시만, 그런데 내가 호랑이의 초상화를 언제 보았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온 세상이 지진이 나듯 흔들렸고, 귓가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마을 사람들은 날 찾아 헤매셨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난 어느샌가 마루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호랑이를 보고는 혼비백산하게 내려와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포식자를 마주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대 아저씨는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한다고 말했고, 막금 아주머니는 호랑이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떤 방법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을까?
그것은 마을에 찾아온 어느 이야기꾼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이야기꾼의 이야기 속에는 마찬가지로 우연히 호랑이와 마주친 주인공이 나온다. 그는 호랑이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봐주지도 않는다. 등을 돌리지 않은 채 호랑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치한다. 전략적으로 알게 모르게 천천히 뒷걸음치며, 근처 마을로 호랑이를 유인한다. 물론 그렇다고, 마을로 거의 다 도착했다고 해서,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마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초가집 밖에 기대 논 괭이를 휘둘렀다. 호랑이를 맞닥 뜨린 마을 사람들은 천천히 호랑이를 잡을 준비를 한다. 각종 무기를 들고는 호랑이에게 다가간다. 결국 수에 밀려 호랑이는 숲으로 달아나게 된다. 만약 주인공이 호랑이의 거대한 몸집과 포스에 압도되어 소리 지르며 부리나케 도망친다면, 얼마 못 가 잡아먹 힐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덤벼드는 것도 좋지 않다.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땐 최대한 시간을 벌면서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호랑이를 마주친 것은 주인공이, 호랑이가 살고 있는 산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산에 올라가기 전까지 만약의 가능성을 알고, 대비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지금부터라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는 어느 날 갑자기, 더욱 치밀한 함정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니 호랑이 이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옳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8월 21일 ㅡ 사라지다

어젠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산에 갔다 온 이후로 내 머리에 내내 꽂혀있던 비녀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 마을에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옥으로 만들어진 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는 귀한 것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웬만하게 머리채를 흔들지 않는 이상, 머리에 고정된 비녀가 스스로 떨어졌을 리는 난무했다. 다양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지만, 섣불리 추측할 순 없었다. 막금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상황을 설명 한 뒤 분주히 비녀를 찾기 시작했지만,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밤이 늦어서야, 마을 사람들은 돌아갔다.

문득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어제 마주친 호랑이가, 사실 호랑이의 탈을 쓴 인간이라면?’ 비녀를 노리고 접근했다면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산속에 사는 도둑 일 터였다. 본디 도둑은 호랑이 탈을 쓰고,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힘과 기술이 부족하며, 사람 수가 적을 때나 쓰는 수법이었다.

나는 내일 반드시 호랑이를 잡겠다고 다집 하며, 잠이 들었다.






8월 29일 ㅡ 호랑이 잡기

계획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내가 미끼가 되고, 장대 아저씨와 막금 아주머니가 서로의 반대편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 호랑이를 부르면 된다.

나는 최대한 값나가 보이는 물건들을 찾아다니다가, 내가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입었던 비단옷을 발견했다. 비단옷을 잘 보이도록 보자기에 포대어 묶었다.

그리고 다시 산에 올랐다. 한참 동안 호랑이의 낌새조차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보이자 않자, 나는 범인들의 집과 이곳이 꽤나 먼 거리에 있다고 추측했다.

나는 범인의 위치를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나무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막금 아주머니와 장대 아저씨 모두 내 제안을 거절했다. 밭일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나이 들어 체력이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더 이상 이런 일로 시간 끌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나는 이번 일은 처음이 아닐 것이며, 도둑을 잡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온 동네가 털릴 것이라고 말했다. 거기에다 매일 밭을 가꿀만한 체력이시라면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다는 것이라고도 말씀드렸다.

그럼에도 막금 아주머니와 장대 아저씨의 입장은 확고했다.

“온 동네를 전부 털 수 있음에도, 범인이 도둑질이 처음이라 비녀만 훔친 겁니다. 다음번에는 더 대범해질 겁니다. 여기도 이제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잡아야 합니다.”


“잡으라 먼, 잡을 수는 있고?”

막금 아주머니였다. 말투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그려, 너 혼자 그러는 거 보기 안타까워서 잠깐 같이 해준 거지. 너무 끝까지 가고 그러지 말어. 너만 힘들어.”
장대 아저씨는 기세에 지친 기색이었다. 눈가가 몹시 피로해 보였다.


“지금 아니면, 언제 잡습니까? 우리가 도둑을 미리 대비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봐도 되지 않습니까?!”


“보름은 잡을 수 있긴 하냐? 이제껏 꼬리도 못 본 도둑놈이 어디 있다고,”


“산에 갔다 온 다음날, 제 머리에 꽂혀있는 비녀 못 보셨다면서요? 제가 제 손으로 비녀를 뺏을 리도 없고, 머리를 여러 번 흔들어도 안 빠지는 비녀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착각한 거 아녀? 아님 어디 산속 길바닥에 두고 왔는지 모를 일이지.”


“제가 잠 잘대 배고, 제 손에서 비녀를 빼놓는 모습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네가 암만 비녀도 없다 하고, 그래서 찾아봤는 데 도둑도 안 보이고 하니까..”


“아마 집과의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훔친 물건 도 어디 가서 팔아야 하니까요. 그거 하나에 100냥은 할 겁니다. 큰돈 맛본 이들은 절대 그냥 가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먹잇감이 나타나길 기다리지요. 다음 주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랑 나무 타기도 연습하시고요. 대신 그전까지 범인을 잡지 못하면 저도 이대로 포기하겠습니다.”


“웨메, 근데 그게 100냥 짜리라고?”


“저도 들은 이야깁니다.”


“아따, 찾아야겠네. 얼른 가자. 마.”

막금 아주머니가 기운 차린 듯 일어났다. 장대 아저씨도 졸린 기색은 다 가신 얼굴이었다.

우리는 밤낮으로 나무 타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올라갈 방법을 수차례 연구했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익숙한 듯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나무를 타고 올랐다. 달빛이 눈이 부셨다. 어둠 속에서 호랑이의 두 눈이 번뜩였다. 머리가 몹시 지끈거릴 즈음이었다.

“잡았다 요놈!”


팍!


“으악!! 살려주세요!!!”



8월 30일 ㅡ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이었다. 일어나 보니 마루에 누워 잠든 모양이었다. 참새가 지붕 위에서 지저귀는 소릴 들으며, 어젯밤의 상황을 기억하려 애를 썼다.

“일어났냐?”

장대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반듯하게 생긴 미소년 한 명을 데려왔다.


“이 놈이 호랑이였던 거야. 남은 한놈은 끝까지 튀었는데, 요놈은 사과하겠다고 직접 찾아왔다.”

자세히 보니 속눈썹이 꽤나 예쁘게 자라난 미형의 얼굴이었다. 흑발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내라면 이자일 터였다. 그럼에도 도저히 곱게 볼 수가 없었다. 엄격한 황실에서 자란 탓일까,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간 죄송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신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하.”

청년의 말이 채 맺기도 전에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아픈 어머니 탓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 아닙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시지요. 그렇지만 아씨께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천민의 상황을 모르십니다. 하루에 한 끼 먹는 것도 사치가 되는 일인걸요.”

가만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눈앞의 청년은 상당한 미형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상당히 왜소한 체격이었다. 온몸에 벼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이 또한 내 또래정도밖에 안 돼 보였다. 그렇다면 이자는 어릴 적부터 온종일 굶어가며 일을 해왔다는 걸까? 그전에까지 어머니가 아프셨던 거고?


“아씨 덕분에 어머니의 치료비를 겨우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조금 전 한 말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침묵뒤에 약간 당황스러운 음성이 묻어났다.


“어라? 왜, 우십니까?”


또 나는 울고 있었다. 동정 따윈 그들에게 필요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해받기를 원치 않았기에, 소년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당신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더라도, 부모 없이 자란 아이가 홀로 꿋꿋이 버텨왔다는 게 얼나마 힘든 일인지 알거든요. 그렇지만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이런 일은 하면 안 되잖아요. 도와줄게요. 배고프면 밥도주고, 원한다면 사랑도 줄 테니까, 돈도 벌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함께 앞으로 나아가 봐요. 우리.”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의 소년 또한 엉망인 내 몰골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 품에 안기며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의 이름은 김시우였다. 알고 보니 그가 물건을 훔친 사람은 내가 최초였다. 어머니가 병에 걸리고부터 혼자 일을 맡아왔는데 너무 어리다 보니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 사이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집 뒤편에서 아주 무서워 보이는 호랑이 모양을 한 탈을 발견했다. 그걸로 물건을 훔친다는 아이디어는 그로부터 이틀 뒤에 떠올리게 되었다. 처음엔 적당히 훔칠 물건이 없으면 돌아가려고 했지만, 머리에 아주 귀해보이는 비단을 한 소녀를 마주쳤다. 어둠 속 호랑이 탈로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물건을 훔치고 난 뒤, 전당포에 가려면 도심까지 걸어서 가야 했다. 여긴 시골이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일주일을 꼬박 달려야 했다,


집은 이 마을 뒤편 구석진 골목에 있었다. 지붕이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다. 문고리는 반쯤 뜯겨나가 있었다. 그 안에 몸이 아픈 여인이 기침을 하며 누워 있었다. 장대 아저씨와 막금 아주머니는 이런 환경에서 편히 쉬지를 못한다며,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시우는 몇 번이고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자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각종 보양식을 싸와 주었고, 배고프면 들러서 밥 한 끼 챙겨 먹고 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시우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나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심부름과 때론 나의 자의로 시우의 집에 여러 차례 들렀다. 우리는 종종 함께 대화도 하고,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으며, 몰래 쪽지를 주고받았다. 기억 속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9월 15일 ㅡ 언젠간 헤어질 날이 온다.

이상하리만치 집 앞으로 익숙한 병사들이 차례로 집결해 있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걸어 나왔다. 병사들이 길을 비켰다. 변사들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짙은 흑발, 무심한 눈동자, 하얀 피부까지 전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입술이 멋대로 달싹였다.

“백도화?”

그러자 병사들이 하나둘 다리를 구부리고 허리를 구부리기 시작했다. 충성을 맹세한다는 기사들의 자세였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공주 마마를 뷥습니다!”



그날 마차가 이끄는 곳은 황궁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9월 16일 ㅡ 장원급제 (김시우)

희고 깨끗한 피부에, 칠흑같이 까만 눈동자가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어렸을 적 그녀가 마을을 떠나기 전 그와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반드시. 그때는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그때의 소년은 무럭무럭 자라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장원급제를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막 올라온 차였다. 이제 곧 눈앞의 문만 지나면 시험 장소인 명륜당 앞마당이 펼쳐질 터였다. 그때였다.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 천민 나부랭이가, 감히 장원급제를 노리겠다고? 더러운 놈. 썩 꺼져!!”

수문장이었다. 궁궐 안의 경비를 서는 자들이었다.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신분과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치를 수 있는 시험으로 아는데요. 이만, 비켜주시죠.”

눈앞을 가로막은 자가 몹시도 눈에 거슬렸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도, 자격이 없다는 듯한, 귀한 곳에 발을 들이면 안 된다는 듯한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꼬맹아, 주변을 둘러보고나 이야기하지 그러냐? 하나같이 비단옷을 입고는, 귀티가 줄줄 흐르지. 너 같은 천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알았냐? 썩 돌아가!”

“싫습니다.”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병사들을 부를 테니 그리 알아라!”

“혼자선 불리하니,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겁니까? 한심하네요.”

“뭐야?! 이것이...!!!”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상황을 갈라놓았다.

“그만하시죠. 언제부터 장원급제가 특정 계층만 치를 수 있는 시험이었죠?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요?”

“윽...!”

수문장은 여인을 보더니 쩔쩔매다, 다급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곤, 부리나케 도망치는 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괜찮습니까?”


“뭐, 한 두 번 겪어 본 일이 아니라서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그녀는 말없이 내게 초록색 봉투를 건넸다. 찻잎이 그려진 어머니의 치료약이었다. 연아가 더난 뒤, 일두일 주기로 황궁에서 보내왔던 것이었다. 약효도 굉장하기 그지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의 혈색이 하루 만에 돌아왔으니까. 기운을 차리는 것도 금세였다. 단연히 연아가 보내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어머니의 치료약입니다. 혹 상황이 많이 나아지셨을는지요.”
나긋이 말하는 목소리엔, 당혹스러운 상대방의 태도를 짐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성함을 여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무례라면 용서하십시오.”


“피차, 곧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럼 그땐 잘 부탁합니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장원급제를 한 뒤의 일이었다. 한 시녀의 부름으로 나는 궁 안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화려한 문양과 벽지로 가득 찬 방 안에서 고귀해 보이는 여인이 기품 있는 자태를 뽐내며 다가왔다.

일전에 내게 치료약을 건네주었던 그자였다. 분명 그 순간에는 수수한 옷을 입었는데, 화려한 옷을 입으니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 보였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이제부터 내 오른팔이 되어 줘야겠다”

“오른팔 말입니까?”

사람 좋은 인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다음 말로부터, 그녀가 얼마나 영악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귀공께도 연아란 이름을 필시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황궁 안에 있지요. 장차 차기 황제가 될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지요? 백성들은 영민한 후궁의 아이를 황제로 내세우기를 원하는데요. 전 반드시 황제가 될 겁니다. 방해물들은 모조리 무너뜨릴 겁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세겠습니까?”

뜻대로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어머니의 증세를 악화시킬 분위기였다. 나르 이용해 연아의 뒤를 치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이가 갈렸다. 악한 사람들이라면 수도 없이 봐 왔지만, 목숨처럼 여기는 약점을 붙들고 함부로 흔들진 않았다. 눈앞의 자는 영악하다 못해 악독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장차 황제가 될 연아가 시골에 내려와 살았던 이유도 이 자 때문인지도 몰랐다.

“외람되 오지만, 제가 천민 출신인지라, 권력이나, 암투에 대해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미래를 정하진 않는 법입니다.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니 염려 마시지요.”

“.......”

“전 화련이라 합니다. 잘 부탁하지요. 참, 절 배신한 대가를 어떻게 치러지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참고로 연아는 손 씨 일가네 가문이다.) 눈앞의 장 씨 일가. 후궁의 자식. 화련은 영악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마치 세상을 다스리는 폭군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정작 그녀에게 남은 건 짐짝뿐인 장기말일 텐데 불구하고,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굽혀, 맹세를 읊조렸다.

“평생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반드시 저자의 목을 치고 말리라’




9월 20일 ㅡ 시우

처음에는 자신만만한 그 태도가 싫었고, 영리한 그녀의 두뇌가 끔찍이도 증오스러웠다. 그러다, 점차 내시들의 대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화련이 반란을 꽤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소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꾸준히 들려왔던 이야기라고 했다. 매일같이 들려오는 이 소리가 지겹지도 않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번번이 상소문을 들고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한 마디로그녀가 반란을 꽤 하고, 황권을 가로챌 인물인지라 당장이라도 궁에서 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궁을 벗어나고 싶었던 적은 없습니까?”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째 계속되는 소리에 나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조차도 이럴 정도인데, 정작 당사자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왜인지 익숙한 얼굴이라 왜 이렇게까지 삐뚤어졌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연아의 거처에 같을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연아는 온실 속에서나 귀하게 자랐을 것 같은 이미지라, 거칠고 힘든 싸움을 해왔던 나로서는 왜인지 화련에게 더 정이 가기 시작했다.

기억해 보면 나도 처음엔 아주잠깐이긴 했지만, 나쁜 짓에 물들지 읺았던가. 그렇게 치면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연아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견고함이 있지만 화련은 늘 불안정하기 일쑤였다. 감정기복이 매우 극심했지만 신하들 앞에선 이를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ㅡ 쨍그랑!

그날은 새로운 상소문 내용을 들고 나타난 이가 있었다. 청색 도포를 입은 그자는 연아를 하루빨리 황제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깨진 유리파편들이 화랸의 손에 피가 방울져 맺히도록 만들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그녀는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 어떻게,...... 어떻게!! 그가!!! 그가!!!, 내게....!!!"


이를 드러내며 분노를 표출하는 그 모습에서 그녀가 사실은 마음깊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부터 그녀가 점차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반란을 일으킬 더욱 완벽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0월 4일 ㅡ 화련

처음에는 단지, 오랫동안 훈련이 잘된 고양이를 투입시켜 연아를 궁 밖으로 내쫓으려고만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귀여운 고양이는 그녀의 애완동물로 전락했다. 지능 고양이가 한낯 인간에게 사랑을 주고는, 이제껏 받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다. 한순간으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두 번째 방법은,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서야 실행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를 궁 밖 먼 곳으로 이송시키는 복잡한 일이었지만, 일은 생각보다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연아가 도화와 함께, 궁 안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화의 머릿속은 뼛속까지 날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연아가 돌아오자마자, 황권을 강화시킨다는 목적으로 황후의 자식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공표해 달라 청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도화의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순순히 무너질 순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고안해 낸 마지막 결정은 반란이었다.



10월 11일 ㅡ 좋아합니다. 많이.

도화는 오랜만에 궁에 돌아와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잘 챙겨주었다. 입고 갈 의상을 잊을 때면 늘 나타나 도와주기까지 했다. 늠름한 몸과 깔끔한 얼굴은 서로 대비되어 더욱 눈부신 광채를 만들어냈다. 그 빛을 보고 있을 때면 저절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숙한 저를 많이 도와주시고, 챙겨주어 감사합니다.”

“흐음, 로봇입니까? 다음부턴, 도화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하세요.”

“아?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
분명 어렸을 적엔 이렇게 능글거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도화의 낯선 태도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싫지 않았다. 그때서야 그를 향한 내 마음을 자각했다. 이건...

“사랑인가?”

잠시 놀란 눈을 한 그가, 다시 한번 이를 드러내 보이며 흐트러지게 웃었다. 접힌 눈이 아름다웠다. 새하얀 치아가 날로 눈이 부셨다. 그의 웃음, 사소한 손짓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했다.

“좋아합니다. 많이”





11월 20일 ㅡ 마지막

또 한 번 궁궐에서 탄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불길이 하늘을 덮었다. 병사들과 왕족, 귀족들은 불길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

이미 문서를 통해 화련의 반란이 시작도 전에 들통난 뒤였다. 화련의 충신이라고 이름난 자였다. 그가 배신을 한 것이었다.

그 후로 장 씨 일가는 궁에서 쫓겨났다. 그런 그녀가 내 방 처소에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얼굴을 흘러내렸고, 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내게 칼을 들이밀려 달려들었다.

"어째서, 난 황제가 될 수 없는 거지! 어째서 난 노력해도 가질 수 없단 말이냐! 네 탓이다..!! 전부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검을 잡으며, 침착하게 두 눈을 바라보았다.


"화련아, 황제가 될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이냐?"

"필요 없다. 황제에게는 권력만 있으면 된단 말이다! “

결솔한 언행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칼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틀렸다. 그것은 언행이다. 황제란 언행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입을 무겁게 해야 하는 것이다. “


"하! 언행이라!! 본디 말이란 것은 컴컴한 속내가 감춰진 것 이거늘...!!"

"황권을 장악하려고, 권력을 키우는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황제의 덕목을 잊어버린 것이냐!"

"......"

"폐하께 우리 중 현명한 자에게 왕권을 물려 달라는 제안을 승낙받았다. 네게도 기회가 있었단 말이다!"

".... 어째서?!"

"현명한 자 만이 천하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지."


"화련아, 권력을 가지고 황제가 된다면, 백성들이 네게 고개를 숙이고, 천하가 네 뜻대로 흘러갈 것 같으냐?"

"당연하지!"

"아니다. 백성은 존경할 만한 자 에게만 고개를 숙인다. 천하도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자 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깟 잔챙이들...!! 모조리 죽여버리면 그만인데.....!!!!"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도 모자라, 반대 세력을 학살하겠다는 것이냐!"

"그럼, 황제씩이나 되어서, 아랫것들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그렇지"

"그럼 어디 한번 말해보시지. 황제가 될 이유가 무엇이지?"

"이유라, 그런 것은 확실히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결국엔 황제가 되어야 한다면, 받아들이는 거다."

".....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지?!"

"내게는 황후의 자식으로 태어나 황제가 될 의 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갈고닦아야 했지. 황제로써,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 훗날 신하와 백성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다."



화련은 번번이 내 손에 들린 칼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난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네가 궁에 불을 지르고, 날 쫓아내던 해부터, 네가 고양이를 함부로 죽여버린 그때부터 난 곰곰이 생각했다. 네가 날 없애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 그날부터 틈틈이 개인 훈련을 했다. 화련아 승리는 준비된 자만이 얻는 것이다. 신하란 믿음으로부터 얻는 것이지, 천하란 자신을 갈고닦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행복을 외면한 네가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생긱하느냐?! 나도 너와 똑같았다! 상소문을 올리는 내시들의 목소리엔 내가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는 소문만 급급했지!! 그러나 난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차분히 하고, 해야 할 일들을 했지. 힘든 만큼 마음을 정돈하고, 무너지려는 하루를 매일같이 황제가 되어야 한단 마음가짐으로 버텼단 말이다!! “

화련은 처음 듣는 내용에 적잖아 충격받은 듯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불길이 서서히 조여 오는 그 방에서 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불길 속을 헤엄쳤다,



ㅡ 화련

불길이 궁 전체를 불태웠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시우였다.
한때는 내 왼팔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무릇 어머니의 병세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처절한 연기였을 뿐. 병세가 완치된 이상, 가족과 같은 친구의 원수를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을 터였다.
그는 내 목에 검을 겨누었다. ㅡ

모든 것이 무너진 이상, 무엇이 의미 있을까. 2년 밤동안 새벽을 꼬박 새운 내 원대한 계획이, 연아의 말 한마디에 한 순간에 무너졌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을까. '정녕 왕이 될 그릇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까?' 라도 물었을 때, 들려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권력에 눈이 멀어, 탐욕으로 가득 찬 네가, 어찌 왕이 될 인품을 가졌단 말이냐! 본디 왕이란 하루도 자신을 갈고닦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거늘. 사소한 말 한마디, 가볍게 내린 결정 하나가 큰 사건으로 번질지도 모르는 자리란 말이다!'

다그치는 그 눈이 너무나 올곶아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여태껏 살아왔던 모든 인생이 그녀로 인해 망신창이가 되어왔다.

‘반역을 꽤 하고 황권을 가로챌 인물입니다!’

지겨울 정도로, 수도 없이 들어왔던 음해였다. 그 소문으로 인해 한평생을 시달려왔다. 모든 게 연아가 꾸민 행적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말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왕의 도포를 입고, 익선관을 착용한 나의 용모를 마주한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할지 의문이 들었던 것도 맞았다.

그러나 입 소문이 난 이유는 내 머리가 비상하며, 학문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어딜 가나 주목받는 인재였다.

왕권을 빼앗기 위해 한평생을 달려온 지금, 그때의 용모는 온데간데없었다. 거울 앞의 소녀는 추하고 악한 기운만이 뿜어져 나왔다. 총명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실감했다.

모든 걸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나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천천히 눈을 떴더니,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내 목을 겨눈 채였지만, 치진 못했다. 시우는 한참 동안이나 내면의 목소리와 싸우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는 끝내, 검을 거두었다.

"이걸로 빚은 갚은 겁니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불길을 헤쳐나가려 했다. 내가 그를 멈춰 세우며 무어라 말을 건네기 전에, 도화가 나타났다. 화재의 현장에서 그가 아직 떠나지 않을 이유는 뻔했다.

"이럴 줄 알았다. 네 곁에 그녀는 두도 두고 후환이 될 거야"

도화가 딱 잘라 말했다.

"...... 그렇지만, 과거가 미래를 정하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눈빛은 단호했다. 생각해 보니, 과거가 미래를 정하진 않는다는 말, 내가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 말을 이 상황에서 써먹는다는 게 묘했다.
시우는 말을 마친 뒤, 검을 거둔 도화를 지나쳐 나와 함께 궁 밖을 달려 나갔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잠시뒤 우리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말하고 나서는 아차 싶었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 온 말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대답이 들려올 것을 염두에 두진 않았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일단, 어디든 가보죠. 가서 결정하는 거예요."




ㅡ 도화

내가 화련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연아에게 물었을 때, 그녀가 답했다.

"생각할 필요 없는 것들이죠. 우리는 행복을 얻었고, 전 그걸로 됐어요."

나는 유유히 불길 속을 헤쳐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안전구역에서, 연아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제 품에 쏙 들어와 안겼다. 이 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녀의 눈에선 걱정이 가득했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엉망이었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았다. 그저 살아남은 오늘에 기뻐했다.
기쁨을 전부 만끽할 새도 없이, 눈에 들어온 것은 맑고, 푸른 하늘 위에 선명히 떠 있는 종이비행기였다. 빛을 반사시키는 종이비행기의 새하얀 단면이, 투명한 무지개를 머금은 것만 같았다.

하늘이 내린 예언이 있었다.

[ 양금택목. 황제가 되면 천하가 뜻대로 이로울지니, 모든 백성들이 만사형통하고, 국세민안 하니, 경국제세하리라. ]

문득 그 예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많은 일들이 있었지. 앞으로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아름다운 세상을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고통을 이겨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면, 언젠가 빛을 보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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