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알약

by 필제

심호흡을 하고, 파란 알약을 입 속으로 욱여넣는다. 입천장이 서슬 퍼런 사슬로 꽁꽁 싸 매이도록 알약을 한운큼 집어삼킨다.

곧바로 파잉 하고 터지는 무언가가, 시원한 기분에 절어질 때 즈음도 잠시, 상쾌한 입바람이 씁쓸한 매음향을 집어삼킨다.

도르륵. 도르륵.

키보드 소리가 빗방울처럼 굵어진다. 자연스례 눈을 감으면, 나는 어느새 낯선 사람이 되어있다. 처음 보는 인영에 익숙해질 틈도 주지 않은 채, 수많은 기억의 잔해의 폭풍우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눈을 감았다.

매일 같은 키보드 소리. 잔잔한 음악과 서슬 퍼런 조명이 숨도 못 쉴 정도로 깊게, 심장을 움켜잡는다.

잠깐의 통곡조차도 잃고 싶지 않은, 어미새의 모습처럼. 나는 어느새 도시 야경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숨이 멎었다. 셔터음과 날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 낡고 가냘픈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레아의 싱글 데뷔앨범 날개가 머릿속에서 울러 퍼진다.


ㅡ 저 푸른 하늘 밑. 칙칙한 도시의 야경 틈에 숨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 답이 없는 저곳에 있어 난.

ㅡ 자유가 된다면 어디로 날아가야 할까? 닿지 못할 이상을 꿈꾸네.

ㅡ 고요한 적막이 숨통을 끊어. 목을 조르지.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는 발끝에서, 몇 번이나 바랬는지 몰라. 아무도 모르는 저곳에서 난

ㅡ 칠흑 같은 이 도시를 달려. 행복을 가장한 Sns의 문제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통곡의 늪

ㅡ 돌아가 다시. 저 눈부신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

ㅡ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날개가 되어서 자유롭게 날아가고파

ㅡ 그래 이곳에서, 사실 나는 저곳에 있어.


레아의 데뷔이래 25주년 기념으로 발매한 한정곡은 잊혔던 세상의 기억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노래 가사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렸지만, 음원만큼은 대중적이라는 호평을 받던 노래였다. 비록 세계적인 글로벌 팝그룹 프리즘에 의해 차트 1위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남녀노소 나이대 불문하고 꾸준히 사랑받던 노래였다.

엄마는 레아의 오랜 팬이었다.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브 선물로 25주년 한정 곡이 담긴 앨범을 받았다. 그 앨범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엄마는 집 전체를 레아의 테마로 꾸미고 싶어 했다. 가족들의 극구반대에 결국 레아의 한정곡을 매일같이 틀어 놓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내가 눈을 뜬 날, 난 병실에 환자복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엄마는 자신이 틀어놓은 앨범 탓을 의심하며 미안해하셨다. 엄마가 그 노래를 당분간 틀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내가 쓰러진 사유는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돌아간 집안에서, 오전에 들이 삼켰던 파란 알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파란 알약은 가쁜 호흡을 안정시켜 준다고 해서 시험생들 필수템으로 자리 잡은 알약이었다. 다만 극 치사량을 넘기면 잠시 기절한다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유독 그 기절하기 직전의 느낌을 좋아했다.

씁쓸한 향이 입안 가득 울려 퍼지고, 머리와 정신이 서서히 분리되며, 시야는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들어온 기분. 분리된 정신이 과거의 기억에 갇혀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이를테면, 학창 시절. 내가 반 아이들과 잘 못 어울렸을 때의 이야기. 여자아이들은 짝사랑남을 흘겨보며 꺅꺅거리고, 남자애들은 웃옷을 벗어던지는 그런 일상에서 나는 그때와는 사뭇 다른 시람이 되어 나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난 저 먼 사막에서 피어난 한송이의 꽃을 안다. 얼마 안 가 꽃은 아름다운 별이 되었다. 나는 별을 안다. 그러나 내 눈에 별은 빛나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형태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진짜 현실과의 괴리감이 생겨서, 그저 행복한 상상이 모두 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불안해진다. 그러면 나는 다시 알약을 삼킨다. 한 움큼 입안 가득. 내 손을 잡아주고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는 사람 수만큼 나는 알약을 집는다.


ㅡ 엄마, 엄마는 모르죠? 내가 여태 먹은 알약을 전부 뱉어버리고 싶다는 사실을요. 그런데 그럴 수 없어서 나는 오늘도 약을 먹어요. 그러면 괜찮아져요. 모든 게.


파란 알약을 7년 동안 먹은 사람이 부작용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기사도 빈번하게 나온다. 꾸준히 먹으면 안 된다고, 일시적으로 먹고, 남은 건 버리라고 전문가들은 늘 조언하곤 한다.

아마도 끊기 어려운 것이니까, 약인게 아닐까. 중독이 사람을 얼마나 해치는지 안다. 나도 나중엔 10년 20년 동안 먹은 사람들처럼 폐가 새카맣게 타 버릴까 봐 두렵다. 저런 건 되고 싶지 않은데.. 끊기도 참 어렵다.

날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이 알약뿐이다. 처음 정신병원에 갔을 때 처방받아왔던 약이기도 하다. 그땐 별 느낌이 없었는데, 강박으로 계속 먹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이 약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처음 효과를 느꼈을 땐, 손이 벌벌 떨리고, 암기해놓은 대사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산 엄한 긴장감이 흐르는 면접장이었다. 그때 나는 파란 알약에게 죽도록 감사했다.

파란 알약에게 감사한 일은 먹다 보면 쌓였다. 사람도 못해주는 일들을 알약 하나면 해결된다. 불안도, 불행도, 긴장도, 숨 막히는 적막도, 안 돌아가는 머리 회전도 이 알약만 먹으면 해결된다.

사람에게 치유받고, 행복을 얻는 시대는, 1인가구가 급증한 시기부터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이젠 알약에 의존할 때가 아닐까 싶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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