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반백 년을 넘게 살았더니 제 기억 속의 추억이 그립습니다.
5살 정도인 저는 가을이 되면 할머니 손에 이끌려 충청북도 연풍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연풍 산골짜기 시골집은 제 아버지의 외삼촌댁입니다. 정말 깊은 산골이랍니다. 호롱볼, 등잔불, 집안의 외양간, 부엌아궁이, 부뚜막, 우물, 개울가의 빨래터.
버스에서 내리면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 나무 아래 평상이 있었고, 저를 데리고 간 할머니는 평상에서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가방에 넣어온 약과, 사탕을 주셨죠.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버스 타고 비포장을 달려왔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죠. 평상에서 먹었던 약과의 맛은 지금도 기억이 나요. 할머니께서 손수 만든 약과인데 지금은 그 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을 먹고 나면 할머니 손을 잡고 걷습니다. 엄청 오래 걸어야 연풍 할아버지 댁에 닿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 가면 할머니께서 저를 업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커서 가보니 그리 멀지도 않더군요.
마을 초입에 다다르면 동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름을 부릅니다. "OO 왔구나?" 제가 그 동네에서 꽤나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제 할머니께서 저를 늘 데리고 다녀서 그런지 저를 다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도 제 나이가 50이 넘었음에도 80~90 노인들이 제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할아버지 댁은 마을 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문이 없고, 왼쪽부터 소 외양간, 소죽 끓이는 곳, 할머니 부엌, 할머니방, 할아버지방, 건조실방, 건조실, 마당 가운데 우물이 있었답니다.
소 외양간에는 코뚜레를 한 황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소 외양간 바닥은 소똥이 가득했고 저는 소똥 냄새난다고 앙증맞은 작은 손으로 마스크 쓰듯이 코를 막고 다녔다고 해요. 제가 가면 소가 '음메'하는 소리가 신기해서 소를 막대기로 찔러보기도 했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작대기 던지고 '히히' 웃었죠.
할아버지는 매일 소 죽을 끓이셨고, 저는 그 옆에서 '할아버지?' 부르면서 종알종알 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제가 예뻐 소 죽을 다 끓이시면 할아버지가 아껴둔 엿을 주셨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그 기억은 지금 없습니다.
연풍 할머니는 키가 크셨어요. 그 당시 '꺽다리'로 불리셨죠. 연풍 할머니는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으셨어요. 밥솥 엄청 큰 거 아시죠? 밥을 지으시면서 아궁이에서 구운 고구마, 감자 등 제가 먹을 것을 늘 주셨습니다.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먹었고,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부뚜막에 저를 앉혀 주셨습니다. 부뚜막의 따뜻함이 제 엉덩이로 고스란히 전해졌죠. 참 따뜻했습니다. 저녁의 부뚜막은 정이 넘치는 곳입니다.
저녁밥이 다 되면 할아버지 밥상을 제일 먼저 챙기셔서 가지고 가십니다. 할아버지 방에서 할아버지는 아들과 겸상을 하시더군요. 연풍 할머니는 저와 우리 할머니 이렇게 셋이서 밥을 먹었습니다. 부엌에 딸린 방인데 다락이 있었고, 할머니 옷이 벽에 걸려있었어요. 천정은 낮았고 천정 밑의 문을 열면 그 안이 보물창고였답니다. 엿, 곶감, 약과 등 먹을 것이 많았어요. 연풍 할머니는 제게 아낌없이 그것들을 내어주셨답니다. 제가 먹는 입만 봐도 배부르다면서 우리 할머니와 웃곤 하셨죠.
연풍은 담배 농사를 많이 짓던 곳입니다. 어릴 적에 제가 본 담뱃잎은 엄청 컸어요. 개구리가 비 올 때 쓰던 그런 이만한 크기였답니다. 담뱃잎에선 이상한 진이 나왔던 것 같아요. 제가 담뱃잎을 만지려 하면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셨답니다. 할머니가 저를 데리고 연풍에 간 이유는 담뱃잎을 정리해 주러 가신 겁니다. 담뱃잎 농사 수입이 꽤 컸던 모양입니다.
하루 날 잡아 뒷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갑니다. 할머니께서 해 주신 말씀으로는 제가 도토리를 엄청 잘 주웠다고 해요. 앙증맞은 작은 손으로 주워 배꼽이 다 보이도록 옷에다 도토리를 한 움큼 주워 '할머니 ~~' 하고 부른답니다. 도토리 가져가라는 뜻이었겠죠. 그 도토리를 말려 가루를 내어 도토리묵을 쑤어 주셨다고 하는데 도토리의 씁쓸한 맛 때문에 저는 잘 먹지 않았다고 해요. 그냥 도토리 줍는 재미에 할머니를 따라다녔겠죠. 지금 도토리묵을 주신다면 귀해서 어쩔 줄 모르고 먹을 것 같습니다.
연풍 할아버지 댁은 건조실이라고 아궁이에서 군불을 지피면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나고, 건조실 안에는 새끼줄 사이사이에 담뱃잎을 넣어 엮은 것을 천정에 매달아 말리는 작업을 합니다. 담뱃잎을 말리면 냄새가 나요. 담배 냄새겠죠. 담배 근처에 저는 못 오게 하셨어요. 다 말린 담뱃잎을 건조실 옆방에 두면 연풍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 두 분이 앉으셔서 잎을 손으로 다 펴서 차곡차곡 정리하십니다. 저는 문밖에서 그 광경을 볼 뿐 그 방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연풍 할아버지께서는 두 할머니가 담뱃잎을 정리하시는 동안 할아버지만의 담배를 피우십니다. 담뱃대가 아마 30cm는 되는 것 같아요. 역사책에 나오는 담뱃대입니다. 담뱃잎 부서진 것을 담뱃대에 넣으시고 불을 붙이시며 한번 쭉 빨고 하얀 연기가 코와 입에서 나오면 다 된 것입니다. 저는 그 광경이 신기해서 쳐다보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시면서 뒷짐 지고 집 주변을 다 살펴보십니다. 뒷짐 지고 걷는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연풍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저를 엄청 예뻐하셨어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침밥을 먹고 할머니는 빨래하러 개울 빨래터로 가십니다. 저도 쫄랑쫄랑 따라갑니다. 개울에는 가재가 있습니다. 돌을 들어내면 숨어 있던 가재를 볼 수 있습니다. 가재는 아주 깨끗한 물에 산다고 합니다. 그 옛날 그 개울물이 엄청 깨끗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지금 그 개울엔 가재가 없습니다. 연풍 할머니가 빨래터에서 방망이로 빨래를 두들기고, 우리 할머니는 물에 헹구시고 두 분의 호흡이 척척 맞았어요. 시누와 올케 사이인데 말입니다.
연풍 할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어딘가 다녀오곤 하셨습니다. 소 풀을 뜯어오신 겁니다. 그냥 풀냄새가 많이 났어요. 할아버지 지게보다는 지게 작대기를 만져보고 싶어 만지다가 혼나기도 했습니다. 낮이 되면 정말 더웠죠. 냉장고가 없던 시절입니다. 집에서 개울이 좀 멀었어요. 집 마당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답니다. 우물 한 바가지 떠서 발 담그면 발이 엄청 시원했지만, 그 어릴 적에 제가 시원한 것을 알았을까요? 그냥 덥지 않고, 물이 좋으니 장난치고 놀았겠죠. 그러면서도 소 똥 냄새난다고 코 막고 징징거리기도 했다 합니다. 물에 담가두었던 개똥참외는 왜 그리 맛있는지요. 소똥 냄새가 참외 단 맛에 상쇄됩니다.
저녁이 되면 할아버지께서 호롱 불을 켜십니다. 연풍 할머니 방에는 등잔불이 있었습니다. 호롱 불은 할아버지 방 앞에 있었습니다. 기름을 넣고 불을 켰던 것 같습니다. 그 불도 오래 켜두지 않으셨어요.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농경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집이 지금은 없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드님께서 다 부수고 새 집을 지으셨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연풍을 다녀왔습니다.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연풍 할아버지와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다 보니 까맣게 잊었던 곳이었습니다. 두 분 가는 모습을 뵙지 못해 못내 아쉽고 죄송합니다. 나이가 들어 시간이 넉넉해지니 가고 싶었습니다. 혼자 가자니 길도 잘 모르겠고, "연풍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안 계시는데 과연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제 작은아버지와 동행하여 다녀왔습니다.
연풍 할아버지의 아드님이 고추농사와 사과 농사를 지으며 그 집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어릴 적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었고, 동네 또한 그 옛날 모습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동네 할머니 중에 저를 알아보지는 못하시면서 이름을 대니 금방 "네가 OO 냐?" 하십니다. 저는 그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냥 제 이름을 대면서 "네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고?" 하십니다. 결혼 후 제 이름을 잊고 살았는데, 그 할머니께서 제 이름을 얼마나 여러 번 부르시던지, 제가 5세가 된 양 행복했습니다. 살면서 힘들고 아팠던 제 마음이 그곳에서 며칠 묵으면서 많이 치유되었습니다.
어릴 적 추억의 장소는 많은 것을 다시 살려줍니다. 감춰져 있던 옛 추억, 연풍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억 소환, 우리 할머니와의 추억 등 제 세포 속의 찐 세포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아픈 마음도, 슬픈 마음도 다 그 연풍에 버리고 가슴속에 추억 한가득 꼭 안고 왔습니다. 정말 추억의 장소는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