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
첫눈이 내렸다. 분주한 일상을 흰으로 덮을 정도는 아니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첫눈이 내렸다. 갑작스럽게 내린 눈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의 속도를 줄여준다. 천천히 또 천천히 조심해 미끄러우니깐. 아파트 단지에 올라와 우리 아파트 동과 이어지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집을 간다. 주차장 들어가는 길에는 따로 계단이 없어 오늘처럼 눈이 와 길이 미끄러운 날에는 천천히 천천히 걸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안 하면 바로 넘어져 사람이 없어도 민망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어려서부터 학교에 가는 길에 짧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항상 긴장하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런 성격이 이어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순간에도 긴장의 연속이다. 어느 정도 내 모습을 보여야 하나, 불편하지는 않을까. 사람을 못 믿는다기 보단 나를 못 믿는다고 말하는 게 맞는 말인 거 같다. 서로의 마음이 통해 사랑을 나눴던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나는 어디서 왔을지 모르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걷는 중 미끄러우니깐 조심해라고 나에게 건넨 걱정. 나에게 무의식적으로 항상 건네는 걱정이 사랑하는 이에게 처음 들었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걱정과 긴장의 연속에서 나에게 건네는 누군가의 걱정은 굳어있는 내 몸을 녹여줬다. 나란히 그 미끄러운 길을 걸으며 산책했다. 혼자 걸을 땐 긴장하면서 걸었을 텐데 지금은 긴장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며 걸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넘어져도 누군가의 걱정아래 넘어지는 건 괜찮을 것만 같았다.
이런 게 '의지'라는 건가 보다.
미끄러운 그 길을 걸을 때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준 건 아니지만, 넘어져도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것. 이것이 상대방에게 건네는 의지의 모습인가 보다. 미끄러운 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의지하고 우산에서 삐져나온 상대방의 어깨를 신경 쓰며 걸었다.
그렇게 나는 조심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