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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드는 방 Nov 21. 2024

고3이지만 팬클럽 회장은 하고 싶어(1)

딸들에겐 비밀, 엄마의 소싯적 덕질 이야기

고3의 여름, 내 마음은 용광로였다. 주중엔 지킬 박사로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주말엔 하이드로 변신해 대학로 골목을 누볐다. 목표했던 학교의 새내기가 되고 싶다는 갈망과 좋아하는 락밴드의 팬클럽 회장이 되고 싶다는 열망 사이에서 가슴 속 불은 모순의 충돌을 연료 삼아 활활 타올랐다. 스무살이었지만 열아홉의 삶을 살아야했던 나의 고3 시절 이야기.


주재원 생활을 오래 하신 아버지 덕분에 나는 일본, 한국, 중국을 오가며 초, 중, 고 시절을 보냈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먹고 마시며 자랐고, 항공사에 근무하셨던 아빠 찬스로 해외여행도 원 없이 다니던 복 받은 10대였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제 겨우 개혁개방이 시작된 중국에서의 생활은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겐 벗어나고 싶은 동굴이었다. 학교 화장실은 칸막이만 있고 문은 없었다. 내 삶의 가장 큰 난제는 문 없는 화장실에서 자꾸만 친절하게 말을 걸던 담임 선생님, 그리고 하루 종일 빳빳한 종이 휴지로 콧물을 닦아 빨개진 코를 여전히 훌쩍이며, 일본어 만화책을 중국어로 해석해달라고 나에게 들고오던 짝꿍이었다. 마침내 해석이 가능해진 만화책 앞에 눈이 반달이 되어 기뻐하는 친구에게 "난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차마 외치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어는 어느 정도 수준에서 정체된 채 마냥 제자리 걸음인 것 같아 답답했다. 같은 학년에 한국인은 나 혼자였던 중국 현지학교. 반쪽짜리 중국어로 중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이 그립고 또 그리웠다. 고국으로부터 날아온 친구들의 편지는 나의 탈출구이자 생명선이었다. 눈에 익은 글씨체로 써 내려간 '보고 싶다'는 문장이 그토록 큰 위로가 될 줄이야.  매일 성실히 집과 학교를 오가며 '성실한 모범생 역할'에 충실했지만 속으로는 간절히도 탈출과 자유를 꿈꿨다. 어른들은 '앞으로를 생각해서' 중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라 조언하셨지만, 그때의 나에겐 '지금의 내 행복'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 결심했어! 나는 꼭 한국에서 멋진 대학생이 될 거야!"


인터넷도 없던 90년대 중국에서 나는 무려 팩스로 한국에 계신 학원 선생님께 국어 과외를 받으며 외로운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선생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학교 수업 시간엔 중국 교과 수업을 듣는 대신 수학의 정석과 성문 종합영어를 풀었다. 딱 한 분, 담임 선생님만이 본인 시간( 그 이름도 강렬한 '사상정치' 시간. 마르크스와 모택동이 메인 주역이었다. )만이라도 수업을 들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지만, 조용한 반항아였던 나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며 착한 미소로 연막을 쳤을 뿐 끝까지 내 길을 갔다. 중국은 가을 학기제라 7월에 졸업을 한다. 중국 학기에 맞추다보니 나는 고등학교를 한 학기 더 다니게 되었다. 스무살 6월, 대입 시험 전 마지막 150일을 밀도 있게 불태우고자 부모님 곁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와 막내 이모네 2층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만이 살 길이다!"

 "학교도 안 가는데 할 일이 뭐가 있냐. 낮에도 공부, 밤에도 공부!!! 내 할 일은 오직 공부뿐!!"

뜨거운 결심으로 불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책상 앞에 딱 붙어 앉아 문제집과 기싸움을 하며 오로지 명문대 합격만을 향하여 정진 또 정진하리라. 하지만 내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중국 생활 내내 그렇게 그리고 그리던 내 사랑하는 친구들은 이미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같은 대학생이 되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노는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뿅!!!”


주중에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토요일 밤 몇 시간 스트레스 좀 푸는 게 어때서? 토요일 저녁의 외출은 내가 나에게 주는 보상이요, 선물이었다. 당시 내가 머물던 막내 이모 집은 서울 서남쪽 끝, 중학교 친구들이 사는 곳은 서울 북쪽 끝. 대학로는 우리가 주말마다 접선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어느 날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새우깡에 맥주 한 캔, 어떤 날은 소주방 붉은 식탁등 아래서 레몬 소주 몇 잔, 또 어떤 날은 늦게까지 정처 없이 대학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친구들이 누리던 대학 생활의 낭만에 나도 슬쩍 발을 적셨다. 그러다 어느 주말에는 친구가 속한 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 녀석의 캠퍼스에 침투한 적이 있었다. 놀거리라곤 없던 중국에서의 고등학생 시절, 나의 취미는 우리말 소설 읽기 ( 덕분에 최명희 작가님의 <혼불> 10권과, 펄벅의 <대지>를 찬찬히 다 읽을 수 있었다.)와 M TV에서 하루종일 틀어주는 뮤직비디오 보기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너바나,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같은 밴드 음악을 좋아하게 됐다. 그런 내게 난생 처음 라이브로 접한 락 밴드의 공연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영혼을 적시는 짜릿한 청량음료였다. 아니, 아마추어 밴드 공연만 봐도 이렇게 신나는데 프로의 공연은 대체 얼마나 멋지단 말인가! 내 비록 시험이 코앞인 미천한 고3 신분이지만 이 궁금증만은 반드시 해소해야 남은 시간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터. 나는 기어코 공연 보러 갈 진짜 락 밴드를 찾아내고야 말리라.


H.O.T, 젝스키스, SES, 양파, 이지훈, 임창정.... 당시 가요 프로그램을 휩쓸던 이름들이다. 없다. 아무리 두 눈 부릅뜨고 찾아봐도 락 밴드는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온 그날 밤,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들려온 일렉기타 선율은 마치 정전 속 한 줄기 빛이 밝혀진 듯 내 맘을 뚫고 들어왔다.  

"그녀는 야이야이야~ 슬픔에 빠져있어. 그녀가 꿈꿔 왔던 그런 게 아냐."

화면 속 빨간 머리 기타 오빠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나는 직감했다. 드디어 찾았다! 이거다! 나는 그들의 콘서트를 보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팬 클럽의 회장이 되고야 말겠다. 때는 대입을 위한 결전의 날을 약 석 달 앞둔, 8월의 어느 늦은 밤이었다.


Follow your bliss, and the universe will open doors
for you where there were only walls.
하고 싶은 일을 따라가라. 그러면 벽처럼 느껴졌던 곳에 문이 열릴 것이다.


 레드 플러스가 부릅니다, <그녀는>  /  "우리 팀 팬클럽 회장은 바로 너야!!!"


추신,
혹시라도 언젠가 이 글을 보게 될 딸들아. 너희들이 오해할까봐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데, 엄만 저때 스무살이었다? 어엿한 성인이었다구. 맥주와 레몬 소주 등장에 혹시라도 너희가 동공지진 할까봐 알려주는거야. 그냥 그렇다구. 그리고 2부를 보면 알겠지만, 엄마 저때 공부 진짜 열심히 했어. 맨날 놀러다닌 거 절대 아니다? 그냥, 그냥 그랬다구.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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