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현 Oct 28. 2024

가정폭력의 상처 (2), 온실 속 화초

나의 이야기

  전학을 가기 전 10년가량 살았던 곳은 우리나라에서 교육열로 한 손에 꼽히는 동네였다. 덕분에 회사원이었던 아버지의 소속 회사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친구들의 아버지가 뭐 하는지는 정확히 알았다. 따로 묻지 않아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많기도 했고 어느새 알게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제는 어린 나이에 몇몇 친구들은 과장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다들 부모님이 한가닥씩 했다. Y대 교수, 판사, 검사, 첼로 선생님, 화가, L사 대표이사 등등. 그런 동네이다 보니 해외여행은 안 가본 아이들이 적었고, 그 당시에 이미 3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애들도 종종 있었다.


어머니는 '헬리콥터 맘'까지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온갖 학원을 다녔다. 불행하진 않았다. 학원은 학교를 다니는 모든 아이들의 기본 소양이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학교의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잘난 척' 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논술, 그림, 체육 등 온갖 것을 미리 접해놓고는 학교에서는 처음 접해봤는데 잘하는 '힘숨찐 메타'를 즐겼다. 집에 어머니가 읽으라 가져다 놓은 어려운 교양 도서들도 스스로 재밌다고 세뇌하며 꾸역꾸역 읽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 손위형제자매들과 싸우는 일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어머니의 교육방침에서 크게 벗어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스펀지처럼 어머니의 교육 흐름을 그대로 흡수했다. 체벌의 형태로 된 가정폭력을 잘못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였듯, 종종 TV나 신문을 보면서 읊조리는 정치 성향까지도.


공부는 즐기는 자를 따라갈 수 없듯이- 성적도 무척 준수했다. 400명이나 되는 한 학년에서 10~30등 내외의 성적을 유지했으나 문제는 영어였다. 한 반에 10명 정도는 해외 거주 경험이 있었고 토종 한국인인 나는 영어 과목만큼은 100등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와 같은 성적으로는 특목고를 노릴 수 없었고, 곧 좋은 대학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잃는 것이라고 여겼다. 어머니는 발품을 팔아 신생 자율형 사립고를 알아왔고, 중학교 3학년, 나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용히 해당 학교 근처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이 선택은 나의 인생을 바꾸는 분기점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정폭력의 상처 (1),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남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