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자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보통 아주 어릴 적에만 자신의 부모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고 예쁜 줄 안다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 어머니가 어여쁘다고 생각한다. 그 미모를 온전히 물려받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요새 인기인 여성 배우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젊을 적을 닮았다고도 생각한다. 한국인에겐 드문 깊고 진한 자연 쌍꺼풀과 똘망한 눈이 정말 아름답다.
어머니는 실제로도 공부를 잘했었다. 중장년기인 지금도 종종 새로운 자격증 공부를 하시는데, 어려운 시험도 척척 붙는다. 퇴근 후에도 끈기 있게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학창 시절의 모범생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그런 어머니도 대학은 한참 후에야 평범한 곳을 나오고 오래도록 전업주부 생활을 했었다.
성적 때문은 아니고 아버지, 그러니까 나에겐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잘한 남자 형제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했지만,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예전부터 나는 그것이 못내 안쓰러웠다. 많은 딸들이 다음 생에는 어머니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길 바란다고 하지 않던가. 나 역시 어머니가 마음껏 꿈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한다.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꿈을 물었지만, 중학생 때까지만 이런저런 꿈이 있었고 진지하게 적성과 평생의 진로에 대해 고민할 기회는 없으셨던 듯하다. 이제라도 생각해 보라는 나의 독촉에도 됐다며 말을 돌렸다.
그 때문일까.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가족'밖에 없는 것 같았다. 대단하신 어머니의 인생을 감히 불쌍하다느니, 안타깝다느니- 하면서 느낀 바를 확인해 본 바는 없다. 그래도 살면서 느끼기론, 가족을 위해 희생한 만큼 '이상적인 가족의 완성'은 어머니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이루고픈 모습인 것 같다. 그리고 현모양처인 어머니에게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완벽히 가부장제의 그것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답답했다. 어머니는 출산할 때 밥이니, 잠이니 하면서 한 번도 자리하지 않은 무심한 남편을 성심성의껏 내조했다. 고등학교 운동부인 내가 얼굴뼈가 동강 나 명절날 입원했을 때에는 효녀라며 살풋 웃었다. 그 해를 분기점으로 명절 당일에 친정을 갈 수 있었으니까. 그전까지만 해도 왕복 3시간 내외 거리의 시댁에서 20년 가까이 모든 명절을 하루씩 묵었었다.
남편과 시댁에 고분고분한 어머니이기에 아버지의 교육방침에도 입을 대지 않으셨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뺨을 맞는 순간에는 나를 외면했다. 아버지의 심한 체벌이 억울해 어머니에게 왜 말리지 않느냐-며 따질 때에는 어김없이 '순종'을 강조했다. 무릇 자식이란 이해가 가지 않아도 부모를 따르는 것이 도리일지니. 아버지에게도 가끔 폭력의 수위에 대해 지적했다고 했으나 알게 무언가. 결코 내 눈앞에서 확인받은 적은 없다. 자식 앞에서 부모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의 권위를 해친다고 여겼으므로.
그런 어머니의 방침은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당신이 경제활동을 담당하게 되었어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 아버지는 폭력을 휘둘러 권위를, 권력을 되찾으려 했다. 감시의 눈길이 없는 폭력의 강도는 날로 심해져 갔다. 어머니는 각자의 증언을 전해 듣고 양비론을 취할 뿐 나의 고통에는 침묵했다. 특히 통학 중어머니 없이 단 둘만 있는 차 안에서 폭력이 잦았기에, 나는 아직까지도 '어머니의 남편'과 차를 타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 어느 날, 어머니는 멀리 떠나는 단란한 가족 여행을 제안했고 나는 거절했다. 거절과 별개로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그 제안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소리쳤다. 결국 엄마도 방관자이며 가해자라고!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의 눈물을 보았다. 그 눈물은 악에 받친 눈물이었다. 그럼 어떡해야 했냐고, 20여 년간의 경력단절 후 이제 막 시작하는 소득활동만 믿고 이혼을 했어야 했냐며 소리쳤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남은 것은 양쪽으로 쏟아지는 비난뿐이라고. 이외에도 두서없이 여러 말들을 쏟아져 나왔으나 눈물이 무척 충격적이어서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지키려 했던, 기워 내던 '가족'은 무엇이었을까.
이전에도 몇 차례 서운함을 내비친 적 있었으나 어머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방관자'란 명명이었다.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마주할 수 없어 나는 다시는 '방관자'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전에도 방관자인 동시에 어머니가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을 알아서 눈치껏 언급을 미뤄왔었다. 유독 반응이 거셌던 것은 어머니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 단어를 수면 위로 꺼낸 순간, 어머니가 평생을 목표로 했던 '이상적인 가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깨뜨린 건 내가 아닐까. 유일하게 남은 성과이자 인생의 목적을, 어머니의 세계를 부순 현장을 목도한 것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어머니를 여전히 사랑하므로, 어머니가 원하는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줄 수 없다고 말로써 확인시켜주고 싶지 않다.
그렇게 어머니는 방관자이자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되었고, 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앞에서 오늘까지도 나의 아픔에 대해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